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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l 19. 2023

헨젤과 그레텔의 섬

by 미즈노 루리코

20살에 대학을 들어가서 선배들에게 두 권의 해적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시민 작가님의 <항소 이유서>였고, 나머지 하나는 미즈노 루리코의 시들을 모아놓은 책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유시민 님의 책도 서점 한 구석에서 자리하는 것도 볼 수 있게 되었고, 한동안 잊고 있던 미즈노 루리코의 책도 서점에서 볼 수 있어서 하루종일 묘한 기분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7살이 되던 해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어린 시절을 공습과 배고픔, 두려움으로 채워졌습니다. 그 유년의 공포를 쉰이 다 되어서야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라는 시로 회상해 내고 1983년에 동명의 시집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출간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섬     


둘이서 한 섬에 살던 여름이었다

조그만 문에는 어느 집과도 구별되지 않도록 X표가 그어 있었다 

나는 좁은 계단을 올라 

머리에 꽃을 꽂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코끼리가 있었다 

코끼리는 돌아앉아 바다만을 상상했기에 

파도가 몇 번이고 등을 덮쳐오는 사이 어느덧 섬이 되어갔다 

이윽고 섬은 작은 등불을 밝힌 채 두 사람을 태우고 

밤마다 바다로 잠기었다 

오빠는 밤이 되면 섬 이야기만 했다 섬은 아직 어릴 때 인간에게 붙잡히고 발가벗겨져 

동물분포도까지 기입되었다(두 사람은 너무나 부끄러웠다) 

오래된 기호가 지금도 섬 곳곳에 아스라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밧줄이 남긴 자국과도 같다 

데본기에 어느 양서류가 섬을 지나간 흔적이 있지만 지나갔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 

외로운 섬은 그 후 코끼리의 형상으로 고요히 우리를 기다려온 것이다 

하늘과 반짝이는 양치식물이 있는 숲 그늘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하여

낮 동안 두 사람은 둥근 식탁에 마주 앉아 코끼리와 섬의 행방만을 생각했다 

군무의 여운이 바람을 타고 흘러 동양의 어느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코끼리에게 도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빠는 섬에게 도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코끼리 채찍을 만드는 넝쿨에 대한 노래를 짓고 

오빠는 섬의 지질과 단 하나의 커다란 발자국 치수에 대한 기나긴 논문을 썼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돌며 코끼리와 섬이 보이는 곳으로 하염없이 다가갔다

여기저기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어갔다 

어른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낯선 물고기가 계단을 올라와 문 앞에서 엿듣는 기척이 났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고기를 끌어올려 다리를 잘랐다

다리는 모두 짤막했다

창밖에서 다리와 묵은 내장 냄새가 났다

새끼를 밴 물고기 배 속에 눈먼 지도가 붉게 접혀 있었다

오빠는 어두운 타원형 접시 위에 지도를 펼쳤다

그것은 다산의 땅이었다

둘은 티 없이 맑은 상처처럼 드러누워 처음으로 낯선 물고기의 요리법을 배웠다

물고기나 사람이나 언젠가는 치유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어른들의 비밀은 거기 있었다

깊은 숲 속에서 양치식물의 포자가 금빛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부뚜막 안에서 마녀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이의 호주머니에 더는 빵 부스러기나 조약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

그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름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는 듯했다          



작가는 자전적인 경험을 토대로 어린 날 오빠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한 채 시를 지었습니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어른들의 전쟁의 황폐한 모습 대신에 코끼리와 새와 물고기와 나무가 있는 그들의 작은 섬을 창조했습니다. 책의 첫머리에서 작가는 ‘의식의 밑바닥에서 생겨나는 이미지의 단편을 직조’한 시들이라고 밝혔습니다. 꿈과 무의식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이 흘러나오고 신비스러운 선율에 책을 읽는 사람들의 추억이 덧대지면 그 자체로 커다란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될 거라고 작가가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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