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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l 19. 2023

체의 녹색노트

by 세사르 파예흐, 파블로 네루다,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

1967년,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체포된 지 하루 만에 총살당합니다. 체포 당시 체가 메고 있던 낡은 배낭에는 열두 통의 필름과 여기저기 색연필로 표시된 지도, 고장 난 무전기, 두 권의 비망록, 그리고 녹색 표지의 스프링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 두 권의 비망록은 1968년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면서 그 내용을 궁금해하던 이들의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었지만, 녹색 노트는 여러 편의 시가 적혀 있다는 소문만 남긴 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베일에 싸여 있던 녹색 노트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노트에는 그간의 소문대로 총 69편의 시가 필사되어 있었는데 필체의 주인공은 체 게바라였고, 필사된 시는 그가 평소 좋아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혁명 동지들에 의하면 이 시들은 체가 아프리카와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펴던 시기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쿠바에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또 다른 혁명 전장에 뛰어든 체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녹색 노트에 옮겨 적어 배낭 속에 항상 지니고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체의 녹색 노트>는 이렇게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히 간직했던 시 69편이 전부 실려 있습니다.           


트릴세에서 


by 세사르 파예흐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저 모퉁이,

하지만 지금 나, 걷기 위해 앉아 있네.

죽은 연인들의 침대는 누가 빼버렸을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넌 조금 전 다른 일로 여기 도착했지.

지금은 없구나. 네 곁에서,

네 허벅지 사이에서 밤을 읽고 

알퐁스 도데의 이야기를 읽었건만.

혼동하지 마, 

이 사랑하는 모퉁에서였잖아.

지난 여름날을 생각해,

작고 창백한 얼굴로

이 방 저 방 드나들던 너를.

비 내리는 이 밤, 

우리 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열렸다 닫히는 두 개의 문,

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그리고 그림자 둘.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파블로 네루다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제가 몰랐던 작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몇 편의 시만 엿볼 수 있었지만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체 게바라의 심정이 너무나 슬프게 전달되었습니다. 노트를 꺼내 이 시들을 읽었을 그를 떠올리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어떤 시들은 가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같이 느껴졌을 수도 있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 그 시기를 무참하게 내려 누르는 일상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했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짐을 끌어안고 책임감과 무모함 속에서 그에게 이 시집은 작지만 강한 위로가 됐을 거 같습니다. 그의 동지들에 의하면 특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좋아하고 아름답게 여겨 밤에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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