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직 새벽이라 부르기에도 이른 시간, 기차역 플랫폼 위에는 안개만 자욱했다. 차갑고 투명한 공기가 폐에 깊숙이 스며들자, 기관실 문을 열고 조수석에 몸을 기댔다. 점화 직전의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피어올랐고, 엔진이 떨리며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 늘 같은 자리, 늘 같은 길, 가방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냈다. 얼룩이 배어 흐릿해진 표지의 Tender is the Night. 몇 번이고 다시 읽었지만, 단 한 번도 끝까지 닿지 못한 책이었다. 낡디 낡아진 표지를 문지르다, 오래 눌러두었던 나에게 묻던 질문이 오늘도 고개를 들었다.
왜, 지금도 달리고 있는 걸까.
열차는 금속의 긴장을 끌어올리며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점처럼 보이는 간이역에 싸라기눈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목격했을 때, 오래 묵힌 추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스무 살의 밤, 처음 유럽을 향해 떠났던, 겁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던 시절의 내가 거기 잠들어 있었다.
2
딱딱한 의자에 앉아 말라붙은 지도와 계산 같은 시간표를 붙들고 밤을 흘려보내던 아이가 있었다. 열차는 끊임없이 흔들렸고, 잠은 오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창에 희미하게 비치던 반대편 좌석의 소녀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작은 조명이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스치고, 그 손끝에 쥔 제목이 조용히 반짝였다.
Tender is the Night. 밤은 부드러워.
그 문장을 가진 책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열차의 흔들림이 누군가의 책장 넘기는 소리와 정확한 박자를 맞추고, 철륜이 철로를 두드리는 일정한 리듬, 짧은 숨, 종이가 넘겨지는 부드러운 마찰음, 난생처음 보는 조합에 한순간 심장을 세게 문질렀다. 그 풍경을 사랑한 줄 알았다. 사실은, 그 순간을 사랑한 것이었다. 그 밤을 지나가는 열차의 기관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처음으로 꾸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누군가의 삶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밤을 다시 달리고 싶었다. 이제는 소녀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단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고, 역에 내린 순간 그녀는 금세 사라졌다. 남은 건 책 표지의 감촉과, 그 밤의 부드러움뿐이었다.
3
지금 달리고 있는 이 새벽의 첫차는 늘 그렇듯, 텅 비어 있다. 나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이상하게도 멈추지 못한다. 아마 그 소녀가 넘기던 책장 소리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 밤에 스며있던 황홀함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때의 나에게 한 약속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차가 마지막 간이역을 지나칠 때, 창밖에 빛이 번졌다. 해라고 부르기에는 이르고, 밤이라고 하기에는 먼 빛, 그 사이 어딘가 걸려 있는 시간대를 돌파하고 있었다. 책을 펼쳤다. 몇 년째 벗어나지 못한 첫 페이지, 서른 번 이상 읽어온 문장인데 아무 단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아주 멀리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지금 철로가 내는 소리가 그 기억을 닮아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승객은 없다. 기관실에는 엔진의 거친 숨과 기찻길을 두드리는 박자만이 고여 있다. 창밖의 풍경은 늘 같은데, 바라보는 내가 매번 달라지고 있었다. 그게 어른이 된다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소녀의 얼굴은 끝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손등에 비치던 조명만, 서서히 내려앉던 종이의 그림자만 남았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왜, 지금도 달리고 있는가.
아마 평생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길을 계속 달릴 것이다. 멈추지 못한다는 건,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을 품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아침의 태양이 번져왔다. 밤은 비켜섰지만, 어딘가에는 아직도 누군가가 그 부드러운 밤을 한 장씩 넘기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멀고 잔잔한 밤을 따라 다시 선로 위를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