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놔두다

by 무무

고스란히 간직한 그 문장은 바래진 편지 속에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 크기였고, 글씨도 삐뚤빼뚤 일정하지 않았다. 편지지 안에는 날짜와 시간, 도시의 이름들이 빼곡히 섞여 있었고, 쉼표보다 말줄임표가 많았다. 급하게 나열된 단어들의 조합을 그대로 올려두었다. 한 줄씩 손으로 꼼꼼히 읽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끝까지 읽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니 예보와는 다르게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스탠드 조명을 끄자 읽고 있다는 사실만 남았고, 읽히는 내용은 어두워졌다. 그래도 기다렸다는 말, 다르다는 단어, 우산을 들었다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순서 없이 겹쳐졌다. 글 안의 주인공은 이제 없고 대신 시간만이 지키고 있었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결정을 미루기에는 늦고 포기하기에는 이른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문장을 처음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날짜를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전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현재형으로 읽혔다. 기다린다는 말이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끝났다는 설명이 없었고, 그저 그때 그랬다는 나열만 있어서 멈추는 지점을 찾고 있었다.


그 사람은 도착했을까. 도착했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은 늘 불분명하다. 그 사람은 떠났고, 나는 남았다. 남았다는 말은 없었지만, 기다렸다는 말은 곧 남아 있었다는 뜻이니, 그 밤의 비는 실제였는지, 더 커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선택이 끝난 자리에 남은 공기처럼 읽은 문장들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밀어낼 이유는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편지지의 밑바닥에 다다르자 더 붙일 말이 없을 때의 단정함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이 남긴 시간의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몇 시간, 몇 년, 혹은 평생일 수도 있었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종류의 시간이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편지지를 책상에 내려놓자 방 안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내가 읽은 문장이 그 사람의 속도와 방향에 다른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더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정리되지 않았다는 상태가 꼭 미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문장이 먼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끝까지 달렸고, 누군가는 끝까지 기다렸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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