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 Nov 07. 2023

세상의 아내

by 캐롤 앤 더피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 예전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도 궁금하고 어떻게 글이 나오는지도 옆에서 보면서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상상력은 여기까지였지만 더 큰 상상력을 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만약 “파우스트의 아내가, 프로이트의 아내가 시를 쓴다면?”이라고 까지 연장선을 그어놓고 그 아내들에게 영혼을 부여해 입을 열게 한 후 시로 승화를 시켰습니다. 그 작가는 영국 최초로 국가가 인정한 계관시인이었는데 350여 년이 다되어 가는 역사의 이 영광에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1999년 처음 계관시인 후보에 올랐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좌절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역사, 신화, 소설 속 인물들의 아내 시각에서 써 내려간 시집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하여 신랄한 풍자를 해나갑니다. 19금에 해당할 만한 비속어가 뒤섞인 언어로 대담하고 주체적인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메두사, 미다스, 시시포스 등 신화 속 인물과 다윈이나 프로이트 등 역사적 인물, 그리고 파우스트 등 문학작품 속 주인공의 아내뿐만 아니라 영화 <킹콩>을 여성으로 변형해서 “퀸콩” 등을 등장시킵니다.


예를 들어 <종의 기원>이 발표되기 7년 전, 다윈 부인은 동물원에 함께 간 다윈에게 “저기 있는 저 침팬지, 뭔가 자기를 생각나게 하네.” 하는 말이라던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치운 것으로 유명한 파우스트의 부인은 “영민하고, 약삭빠르고, 냉담하던 그 개자식에겐 애당초 팔 만한 영혼이 없었다는 것.” 이라며 남편을 폭로하기도 합니다. 현실의 여성들을 지독히 혐오해 자신의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피그말리온의 신부는 남편에게 아이를 낳고 싶다 구걸하기도 하고 절정에 이르러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댐으로써 남편 피그말리온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기까지 합니다. 하늘을 날다 추락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이카로스의 부인은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전적으로, 철저하게, 절대적으로, 최상급 멍청이임을 그 스스로 세상에 입증하는 것을 작은 언덕 위에 올라서서 지켜본 처음 여자도 마지막 여자도 아니야”라고 일갈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남성 인물들이나 실존 인물, 신화 속 인물 모두의 목소리에 가려져 그 존재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여성 인물들의 목소리를 여기에 담아냅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나긋나긋하지 않고 그렇다고 우아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습니다. 적나라한 욕설과 비속어, 외설적인 표현 등을 검열 없이 담아낸 이들의 목소리는 지독히 현실적이고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입 밖에 내보았거나 혹은 내보고 싶어 했던 말들이 시어가 되고 글이 되었고 책이 되었습니다.



P : 늑대의 은신처, 그곳에 다다랐지, 한층 주의해야 했어. 그날 밤의 제 1과, 내 귓전에 들리는 늑대의 숨소리, 사랑 시였어. 나는 동이 틀 때까지 요동치는 그의 모피를 붙잡고 늘어졌어, 어찌 어떤 소녀가 그 늑대를 끔찍이 사랑하지 않겠어? 그런 다음 나는 늑대의 엉겨 붙은 무거운 두 발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와 살아 있는 새를 찾아 나섰어.



시는 주어진 것에 대한 안주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향한 질문이라고 말한 어떤 시인이 떠오릅니다. 통쾌함을 넘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녀의 일침이 이 말에 가장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혜경궁 홍 씨나 허난설헌의 기분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왕건의 열두 번째 아내는 행복했을지도 생각나게 했고 계백의 칼날을 받은 그의 부인은 어떤 최후의 한 마디를 남겼을지도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