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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Nov 18. 2023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by 이미경

저녁을 짓고 있는 어머님들의 음식 냄새가 온 동네를 휘감고 있을 즈음, 신림동 골목 언덕 끝자락에 있던 집 앞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어머니가 부르십니다. 재밌게 하던 놀이들을 멈추고 친구들과 어머니가 있는 집 앞으로 뛰어가면 천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시며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 오라고 하십니다. 하던 놀이들은 잊어버리고 친구들과 뛰어가서 어머니가 시킨 심부를 합니다. 심부름을 마치고 나면 슈퍼 아주머니는 남는 동전을 주십니다. 빠르게 친구가 몇 명인지 계산을 하고 과자 몇 개를 집고 남는 동전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슈퍼 앞 구판장에 옹기종기 앉아 과자를 뜯습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체할까 봐 난로 위 돈데크만 같이 생긴 주전자에 있던 따스한 보리차를 종이컵에 주십니다. 감사합니다를 우리들은 외치고 죽기 살기로 먹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심부름 거리를 드리고 문 앞에서 친구들과 다시 하던 놀이들을 즐겁게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던 제가 살던 신림 9동 어귀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게 당연할 정도의 안전한 동네와 우리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쉴 곳이 되어주었던 가판장과 아이들이 체할까 봐 보리차를 주시던 따스한 마음의 주인아주머니, 동전 몇 개 삥땅치고 과자로 배를 채워도 뭐라 하지 않던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도 제가 가진 심상과 비슷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쉼터이자 동네 사람들의 방앗간 같은 곳이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밤새 동네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이 모여들던 곳이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의 수다로 한숨과 웃음꽃이 교차하고 온갖 종류의 과자 봉지가 우리들을 유혹하던 곳입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있는 빛바랜 외상장부가 홀로 지키고 있지만 장부가 늘어나도 독촉이 없던 따스한 이곳이 제가 살던 그 시절로 돌이킵니다.


모든 게 편해지고 간편해지면서 그때보다 아마 더 윤택하고 잘 살고 있겠지만 그 시절이 그리운 것도 그리운 거지만 아마도 사람 냄새가 그리워서 이 책을 보고 있으면 눈시울이 붉어졌던 거 같습니다. 해가 저물고 동네가 어두워져도 가게 앞은 전봇대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게 밝아 저녁 먹고 나온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한바탕 놀아대는 신나는 놀이터가 됩니다. 엄마가 싫어했던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오징어 가이상(옷이 찢어지기에), 누구네 집인지도 모르고 숨었던 다방구, 현란하게 브레이크 댄스와 같은 몸짓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친구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을 하며 맘껏 뛰어놀고 학교 근처 동네 할아버지가 있는 곳에 방방과 함께 머리 맞대고 달고나 해 먹던 최고의 놀이공간이었던 이곳이 유년 시절 가장 즐거운 기억으로 구멍가게에 숨어 있습니다.


작가님은 아이 둘을 낳고 캔버스 앞에 다시 앉았다고 합니다. 붓을 놓은 지 이삼 년 정도 지났을 때였는데 어쩌다 벚꽃 눈 흩뿌리는 날 관음리 구멍가게를 찾았습니다. 집에서 걸어 30분 거리에 보랏빛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가 갑자기 낯설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P : 가슴이 뛰고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구멍가게와 나의 인연은 시작됐다.



1998년 관음리 구멍가게를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립니다. 책에 실린 80여 점의 그림은 이처럼 구멍가게가 주인공입니다. 화사한 봄꽃에서 겨울의 함박눈까지, 계절은 변해도 그림 속 시간은 멈춰 있기에 항상 나무와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만 있는 줄 알고 봤는데 작가님은 구멍가게와 나무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고 합니다.



P : 가게는 항상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묵묵히 세상을 응시하면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구멍가게, 그리고 나무, 사람을 기억한다.



주인이나 손님이 감춰져 있지만, 분명 그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시절이 그립고 하시다면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멋진 글로 추억 여행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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