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냉장인가 하는 그런 걱정>. 8화
이후
* 이번 화는 트리거가 될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숙소는 낡은 것 같지 않았다. 낮에는 북 카페로, 밤에는 숙소로 이용한다는 주인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내가 하루 묵을 침대를 배정받았다.
음식물을 들고 침대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물어보니 공동 거실 한편에 마련된 작은 냉장고를 가리키며 넣어두라고 하셨다.
‘바나나.... 도 냉장고에 넣어두나?’ 의심스럽지만 그냥 넣어두기로 했다. 뭐, 차가워지기만 하겠지. 싶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혹시 몰라 바나나를 봉지 째로 냉장고 한편에 넣어두고 미리 학교 식당에서 예약한 여성 전용 공간으로 따라 들어갔다.
“여기는 여성전용 방 거실이고 여기가 화장실, 여기는 샤워실.” 설명을 하는 아주머니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이층 침대 세대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 이 방에는 지금은 두 명 예약이 되어있어요. 같이 이용하는 거니까 방안에서는 조용히 이용하면 돼요. 학생은 여기 침대 쓰면 되고. 예약된 침대라고 또는 사람 있다고 표시하는 건 이 팻말을 노란색으로 꽂아둬요” 설명을 다 마치고 그럼 쉬라는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를 하고 방 안을 둘러봤다.
솔직히 공용 거실에 잔뜩 꽂아져 있는 책들을 보고는 밤새 책을 읽다가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신났지만, 방 안은. 여기서 잘 수 있을까 싶었다.
여성전용 공간은 만화책이 꽂혀 있는 책장 사이에 침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방안에 침대만 놓아져 있었고, 생각보다 빽빽이 자리 잡은 침대들이 숨 막혔다.
어쩌지. 하는 순간 침대에 걸려있는 커튼이 보였다. 일단 침대에 앉아봤다. 푹신한 쿠션감이 곧 놓아버릴 이성을 잡아주었다.
‘자다가 잠꼬대하면 다 들리겠다.‘ 너무 조용해서 신경 쓰이지 않을까. 고민하다 그냥 이곳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거실에 사람이 더 많을 텐데 잠꼬대를 해도 여기가 더 사람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커튼이 있으니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을지도 몰라.
침대에 두 다리를 다 올리고 커튼을 쳤다. 아래 침대로 배정받았기 때문에 위, 아래, 사방팔방이 다 막힌 침대 안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꼭 내 방 침대 밑 같았다.
작은 벙커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침대 옆에 작은 스위치를 누르니 불이 들어왔다. 침대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스탠드였다.
가게에서 산 옷을 담은 바스락 거리는 비닐봉지는 더 소리가 나기 전에 얼른 봉지에서 꺼내 침대 옆 벽면의 작은 공간에 접어 올려두었다. 작지만 알찬 공간이었다.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보았다. 조용- 한 것 보니 아직 다른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뭘 하지. 고민하다 일단 거실로 나가 보기로 했다. 거실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이 다 숙박객은 아닌 것 같았다. 계획이 따로 있지 않았으므로 만화책이나 하나 읽어볼까 하고 책장으로 다가갔다. 어릴 적 읽었던 만화책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한 권을 뽑아 들고 와 편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나는 책은 다 좋아하지만 만화책은 그중에서도 제일 좋다. 특히 사람 묘사가 예쁘고 자세한 것.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럴 수 있고, 나는 그 인물들이 말하는 대사나 그 환경을 제3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아서 만화가 좋았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보다 기준이 있어 좋았고, 일상물의 경우 진짜로 내 주위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삶이 조금은 달달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가끔은 만화에서 해주는 말 한마디가 나에게 위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도 나만의 만화 책장이 차곡차곡 쌓이곤 했다.
보고 싶었던 책을 하나 골라서 여기서 읽고 간 다음 시리즈를 모아볼까? 하는 생각에 책장으로 다가가 찬찬히 책을 골랐다.
읽어 보았던 책도, 전번에 지나쳤던 책도 두런두런 둘러보며 살펴봤다. 내가 한창 모으려던 만화책이 눈에 띄었다. 만화책을 모으는 것은 학생 때부터 한 권씩 용돈의 일부를 투자한 나름의 취미생활이었다. 한 권씩 쉬는 시간마다 읽으려고 독서실에 가져가던 만화책은 문제집의 수보다 많아졌고 만화책을 읽다 선생님께 걸려서 적잖아 민망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냥 다 허망해서 솔직히 취미 랄것도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취미가 있긴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이 시리즈를 모아볼까. 적어도 이 시리즈를 다 모을 때까지는 죽고 싶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덤덤히 한 권을 뽑아다 소파 위에 앉았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주인공의 성격이 내 기억 속의 그녀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꽤 소극적이고, 싫은 말을 못 하는 아이였는데. 지금 다시 보니 단단한 아이였다.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신중한 것이었으며 싫은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해서 최선의 말을 골라줬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아이처럼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해줘야 하는지 그 정도를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무서워졌다.
나에게는 한순간에 돌변하는 것이 사람이었고. 그걸 머릿속에서 뿌리치지 못하니까 어느 정도에서 이 사람을 믿어야 되는지 모르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졌고 이런 내가 평범한 일반적인 사고를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더더욱 나를 어느 정도까지 보여줘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 정도로. 신물이 났다. 아무도 날 몰랐으면. 그냥 그쪽에서 날 모른 척 지나가버렸으면. 사람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니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내 미래도 걱정되었다.
이런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외로워하는데 나는 혼자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
근데. 지금은 다른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데. 외롭지만 남은 무서운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싫었다. 그래서 계속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죽는 게 제일 나은 답이지 않을까? 신께는 너무 죄송한데. 죽으면. 죽으면 이 사람들 생각 신경 안 써도 되고 나는 이제 죽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도 나한테 신경 끄지 않을까. 사실 저번 주만 해도 이런 바다도, 이런 풍경도 못 보고 내 방에서 죽을 줄 알았다.
다음 달? 다음 계절? 웃기고 있네. 난 그전에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을 그어보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긋고 그어보고 긋고 그어보고 긋고 그어보고 긋고 시발.
매일 무언갈 먹으면서 잠들고. 그렇게 내 속에서 나를 하염없이 죽였다. 죽어버리고 싶어. 우습게도 아프지만 않았다면 미련 없이 힘주어버렸을 거야.
잘못 깨어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그 모순적인 생각만 없었어도 한 번에 다 털어 넣어버렸을 거야.
순간 엄습해 오는 우울함에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텅 빈 눈으로 책장을 주욱 훑어보았다. 가지런히 그런데 간간히 들쭉날쭉 꽂혀 있는 책장을 지나 중간중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끝에는 벽에 걸린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가까이 보려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께서 찍은 사진인 듯 보였다. 내가 다녀온 바닷가도 찍혀 있었다.
사장님의 사진은 일몰 때였고 보라색의 빛깔이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다. 옆으로 지나가며 사진을 마저 쭉 보았다. 나이 들었나. 나.
예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풍경사진들이 내 안에 들어왔다. 어둠에 들어오면서부터 바다가, 풍경이 가만히 서서, 가만히 앉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실제이던지 사진이던지 그림이던지 그렇게 풍경을 가만히 보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아. 어쩌면 나는 사람에게 질릴 대로 질려서 혼자 어둠 속에 있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인 내가 싫어졌다.
남들보다 본인을 위할 줄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싫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어둠에만 있었고 나가지 않았으며 그러면서 모순적이게도 떠나고 싶었다.
바다 사진 다음으로 눈에 담긴 풍경은 별 사진이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찍은 사진이었다. 도시에서는 별 볼일도 없고, 항상 번쩍 거리는 간판의 불빛은 두통을 가져왔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간간히 비치는 별들이 내 눈을 참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옆의 사진은 숲의 사진이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일렬로 서있는 멋진 길가의 사진이었다. 푸르른 잎들이 하늘이 담기지 않을 만큼 겹겹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음이 편안했다.
매일 같이 휴대폰을 손에 쥐고 내가 전송해 버린 말 한마디를 후회하며 쩔쩔 메고 끙끙 앓던 순간들이 허무했다. 풍경사진을 보니 더 그러했다.
그다음 사진은 일출 사진이었다. 바다는 아니고 산이었다. 안개가 낀 배경에서도 해는 붉었다. 그 동그란 머리를 보니 내가 참 작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날들이 너무 허무했다. 나는 아침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다. 다음날이 오는 게 싫고 반겨 주질 못했다. 두 눈을 꼭 감고 아침이 오지 않았으며 좋겠다고.
해 사진 앞에서 넋을 놓은 것인지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사진을 구경하고 있는데 옆에서 사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쁘지?” 빙그레 웃으며 사장님이 물었다. “네, 직접 찍으신 거예요?” 내가 되묻자 물어보길 기다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자랑을 했다.
“그럼~ 멋지지?” “네, 어디예요?” 내가 들어본 산인가 싶어 물었다.
“여기 금방 앞에 산이 있어. 00 산” 처음 들어본 산의 이름에 다시 한번 되물었다. “00 산이요? 많이 높은가 봐요.”
“에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진 않아~ 한 이십 분? 걸어 올라가면 금방 가.” “아 정말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조금 놀랐다. 산은 무조건 굉장히 높다고만 무의식 중에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어떻게 가요?” “왜, 산 가보려고?”
“네”. 내일 계획한 것도 따로 없고 바다를 봤으니 기차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숲을 보고 싶어서 산을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출 보고 싶으면 이거 해~” 하면서 사장님이 벽면에 붙인 종이 하나를 가리켰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인 듯, 종이에는 정갈하게 프린트된 글씨가 일렬로 쓰여 있었다.
전날 예약을 하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동행들과 함께 산 입구까지 차를 태워 보내주고 함께 등산을 한 다음 일출을 보고 내려와서 조식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할래?” 해보라는 듯이 씩 웃으며 묻는 사장님의 미소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신청하려면 어떻게 해요?” “이리 와서 예약하고 결제 미리 하면 돼” 설명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사장님을 뒤 쫓아갔다. 숙소 입구에 마련된 작은 카운터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사장님이 펜과 함께 건넸다.
종이에는 예약을 위한 정보를 적게 되어있었으며 숙박객에게는 10 퍼센트 할인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종이에 적힌 계좌번호에 돈을 송금하고 나서 사장님께 보여드렸다.
“아침에 다섯 시까지 다 준비하고 여기로 나와 있으면 다 같이 차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걸어갈 거야. 산 위에는 추우니까 아가씨도 따뜻하게 입고 나와야 돼.”.
임무를 마친 사장님이 나에게 이것저것을 일러주고는 다시 터벅터벅 걸어가셨다. 순식간에 내일 할 일도 차곡차곡 해결되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아까 사 온 바나나가 생각났다. 공용주방에 가서 냉장고에서 바나나를 꺼냈다. 차가워진 바나나를 한입 베어 물고 나니 실소가 터졌다.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순식간에 일을 끝내니 어안이 벙벙했다. 우적우적 바나나를 씹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무엇인가를 먹을 때나, 씻을 때나, 걸을 때도 항상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 전에는 무엇을 했고, 그 사람은 어떠했고, 그 사람이 무섭고, 그 일이 걱정되었는데 오늘은 부딪힌 사람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고 평온했다.
그냥 이렇게 모르는 곳에 와서 모르는 이름으로 새롭게 인생을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전에는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횡단보도 한가운데 목적지는 알지만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까먹은 사람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어디 갈지도 모르는 망망대해 무인도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당연한 것처럼 후자가 더 편안했다.
기준으로 삼을 타인이 없으니까 그냥 내가 가는 길이, 내가 하는 일이 괜찮아서. 정답이 없어서. 그래서 신경 쓸 일이 없어서 편안했다.
이렇게 살면 편했을 텐데..... 어차피 내가 이렇게 떠나도 나를 찾는 사람은 몇 안 된다는 걸. 날 신경 쓰는 사람이 생각보다 없다는 걸. 사소한 실수에 잘못했다고, 그렇게 쫓아 와서 신고하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하루 떠나온 오늘에서야 조금 인정할 만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기에는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숙소에서 나와 근처를 돌아보기로 했다. 세면도구 등을 사지 못해서 근처에 편의점이라도 들릴 생각이었다.
노을이 살짝 지고 있었다. 금방 해가 질 것 같은데 밝았다. 해가 지는 건 순식간이라 너무 멀리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숙소 앞에 바로 편의점이 있었다.
여행용 물품을 팔아서 하나 집어 들었다. 다행히 쓸만한 건 다 있는 것 같았다. 숙소에 있을 것도 같았지만 그래도 뭐, 사도 나쁜 건 없겠지. 매대를 휘적휘적 걸으면서 살펴보고 캔 음료 한 캔을 골랐다. 맥주라도 마셔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술을 마시면 속이 안 좋아서 집이라면 모를까, 밖에서는 너무 신경이 쓰여서 잘 마시지 않았다. 오늘도 공동으로 쓰는 숙소에서 배에서 소리가 나거나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온열대에 진열된 따뜻한 캔 음료를 선택했다. 날이 좋았다.
차갑게 감도는 살짝은 후텁지근하고 그러면서 싸늘한 이 공기가 살에 닿는 것이 편안했다. 혼자 있는 것이 생각보다 편했다.
예전에는 사람이 참 좋았는데, 지금은 사람이 참, 무섭다. 그리고 사람이 있는 그 상황이 참 무섭다. 이렇게 혼자 나와 떠나온 경험이 꽤나 즉흥적이었지만 꽤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참. 인생은 참. 배우며 살아간다. 나는 어쨌든 태어나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생길을 걸어오면 배우는 것도 있었다. 마지막에 이 배운 것들이 다 쓸모가 있을까. 인간이, 과연 변할까.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참 재미있다고들 했다.
나는 그렇게 변하고 내가 예상할 수 없는 그 상황들이 싫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나는 항상 힘들어했다. 언제나 그었고. 언제나 울었고, 언제나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바뀌는 인생길.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찾아오는 편안이 지금 내가 불안에 떨면서 지키려는 편함보다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르니까.
따뜻한 캔 음료를 따 입에 넣으며 한숨이 아닌 심호흡을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내가 경험한 사람들이니까. 배신을 당했다면 그 사람이 나쁜 거지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생각은 그 사람이 참 연기를 잘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사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고 돌아다녀 보니 공원이 나왔다. 팸플릿에서 본 이 동네에 유명하다던 문화재가 보였다. 잔잔히 비치는 물가에 자리 잡은 정자 하나.
가만히 물에 비치는 아경을 바라봤다. 잊고 있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머리가 아파 애써 무시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집에 있을 당신을. 내 더없이 편안했던 시절의 너를. 그리고 내가 의심했던 그대들을.
그냥 하나하나 인연들이라고 생각하며 떠올렸다. 그 사람들이 어떻고, 어떤 일을 했고, 어쩌면 나에게 이럴지도 몰라. 하며 고민하던 그런 생각 말고. 그냥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와 있을 때 웃고 있던 얼굴들이었다. 애써 그 사람들이 나를 등지는 그 모습을 상상하지 말고 그 웃는 얼굴만 생각하자.
둥실둥실 물 위를 떠다니는 달과. 불빛들에 얼굴들을 실어 보냈다. 밤은 어두웠지만 밝았고, 피곤해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날 밤은 굉장히 오랜만에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