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산

<바나나, 냉장인가 하는 그런 걱정>. 9화

by 유우진

삐빅- 한 순간 울린 알람에 번쩍 눈을 떴다. 혹여 내 알람 소리에 옆 침대 사람이 깨었을 까봐 알람을 얼른 끄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휴대폰 시간을 보니 아침 다섯 시가 되기 십오 분 전이었다. 화장품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머리도 어제 감고 자서 간단히 양치와 세수만 얼른 하고 예약해 둔 일출 체험에 참여하러 카운터로 나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자 다 오셨네, 여기 명단에 서명 한번씩 해주시고요.” 사장님이 종이 하나를 꺼내 보였다. 예약 확인 명단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다 서명을 하고 나까지 서명을 하니 사장님이 종이를 다시 카운터 파일에 넣어두시고는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부부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 녀와 청년 둘에 나까지 총 다섯 명의 일출 원정대였다. 숙소 밖으로 나오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두웠다. 아직 해가 아니라 달이 동그라이 떠 있는 시간. 어스라이 보이는 것 같은 푸름에 공기가 상쾌했다. 이렇게 아침 공기가 얼마만이더라. 아, 어제 바닷가.




벌써 떠나온 것이 오래전 같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기 때문에 입김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어제는 그토록 머리 아픈 새벽이었는데 오늘의 새벽은 깨끗했다. 시원했다. 추운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런두런 일행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고요하게 혼자 지내고 싶었다.

외투의 후드를 둘러쓰고 걸었다.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숙소 차량을 타고 산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건물들이 지나갔고 어제 갔던 광장을 지나 외곽으로 달렸다. 곧 산 근처인 듯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길의 느낌이 나의 신경을 길에 묶었다. 다른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는데. 이것이 아침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하루 동안 어떠한 마음의 힘이라도 생긴 것인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 무엇도 힘주어 다시 불러와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나에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지금 내가 걱정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었으니까.





밖으로 어두운 숲이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내 옆에 앉은 청년 둘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졸고 있었다. 고요했다. 옆에 누가 앉아있어도 편안했다.

다시 도로가 편안해지고 산 초입인지 모를 곳에 사장님이 주차를 하셨다. “다 왔습니다. 내리세요.” 차에서 내리자 등산로로 보이는 계단이 보이고 사장님이 지팡이 등을 건네었다. 혹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주려고 트렁크에 두고 다니시는 듯싶었다. 그렇게 간단한 정비를 갖추고 사장님을 뒤따라 우리들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어느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각자 앞을 보고 걸었을 뿐이었다.

조용한 산속에서 간간히 새소리가 들렸고, 간간히 풀벌레의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시원한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쳤고, 머리 위에선 나무들이 속삭였다.

숨이 찼지만 묵묵히 걸었다. 지금은 그것 말곤 할 일이 없었다. 다른 생각하지 않고 그저 걸었다.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풍경이 무엇일 지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순간, 어떤 풍경이든 처음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흙내음이 났다. 편안했다. 자연이 주는 이 편안함이 참 감사했다.




간간히 돌을 건넜고, 간간히 나뭇가지를 밟았고 간간히 편한 길을 건넜고 간간히 높은 오르막길을 건넜다. 그뿐이었다. 결국 다 내가 지나온 길이고 내가 지나갈 길이었다.

그저 그렇게 흘렀다. 물 흐르듯이 걸었다.





그즈음 앞 선 사람들의 든든 목소리가 들렸다. “아유 고생했어요.” 내 앞에서 가던 중년의 여성이 뒤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건네었다. 그녀 뒤로 정상의 광활함이 보였다.

아무런 고민과 걱정과 의심 없이 깨끗한 웃음과 평범한 얼굴로 나도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넸다.

정상이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숨을 크게 들이쉬면 시원한 공기가 폐를 늘렸다.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것 하나 없이 깨끗했고 그 어느 순간보다도 가슴이 뻥 뚫렸다. 사장님이 어디선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으시기 시작했고 내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풍경을 보니 어스름름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집에 있을 엄마와 아빠와 동생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잘 있었다고, 잘 잤다고, 미안하다고.

나도 밝아진 하늘을 보고 정상 표지판과 함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 저, 해 뜨네요!” “어머 기도 해야겠다” 잠깐의 부산스러움과 함께 고개를 조금만 옆으로 돌리니 빼꼼. 아주 아주 붉은 해의 조각이 머리를 내밀었다. 순식간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해는 열심히 올라왔다. 아무 생각도 들 수 없었다. 그저, 해가 떴다. 이 당연한 자연의 순리가 눈앞에 펼쳐지니 모를 감정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나는, 이토록 나는 뭐 하러 그 밤을 지 새웠나. 이렇게 해는 뜨고, 시간은 지나는데, 왜 나는 그날들을 잡아 놓아주지 않았을까.

죽고 싶다고 생각했고, 해 뜨는 것, 시간이 흐르는 것 따위 보다 내 당장의 마음에 이기지 못해 나를 죽이기를 수천 번. 그 수만은 어둠이 이토록 순식간에 밝아지는데.

나는 너무 나 초라하고 연약하고.




정말이지 고생 많았다.




빨간 그 해가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 것을 보는 이 순간은 행복했다. 그 어둠 동안은 절대 느끼려고도 하지 않았던 행복이었다. 그리웠다. 이런 부푼 감정이 그리웠다고 생각할 만큼 그동안 고생했구나 싶었다. 햇빛이, 눈이 부신건지 눈물이 났다. 주르륵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닦지도 않고 주르륵 흐르게 두었다. 주변 신선이 느껴졌지만 드디어 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너무 울고 싶다. 정확히 뭐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조차 모르겠다.

감동이었는지 서러움이었는지 안도감인지 그냥. 나도 모르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괜찮은 척, 그런 척하지 않고 그냥 편안한 결말을 가질 수 있기를.

산의 일출을 보며 처음 바다의 일출에서처럼 나의 신에게 기도했다. 두 손을 모은 채, 이번엔 눈을 감고.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마냥 울었다.






-내 도망은 어쩌면 바다를 바라보며 해변에서 일출을 보는 것에서부터 이미 그 효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작은 행동 하나 가 어둠 속에서 내 손을 잡아 이끌고, 그 작은 움직임이 내 마음을 이끌었을지도 모르지요.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마치 태풍과 같았듯.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심지어는 나마저도 버리고 그저 ‘모르겠다.’ 하고 떠난 것이 결국 그 발걸음을 내딛고 하나의 태양을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이 어쩌면 클리셰적인 표현이자 경험이지만 묘하네요. 하루밖에 지나치지 않은 이 짧고도 긴 순간순간에 그렇게 나는 나의 세 번째 어둠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우울은 감기와 같아서 어떻게 또 걸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 감기는 이렇게 넘어가고 있네요. 어두운 밤을 지내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듯 난 그렇게 이번의 어둠을 지나칩니다. 이번엔 그 어느 사람의 도움 없이 말입니다. 혼자. 그렇게 울며 힘들어하며 너무도 싫고 사라졌으면 좋겠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며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스스로를 죽여 나갔던 나를. 드디어 나는, 안아줄 수 있습니다. 아아, 그래요, 그래. 그러네요.


그러게요, 이게 참,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