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발

<바나나, 냉장인가 하는 그런 걱정>. 1화

by 유우진

떠났다.


너무나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 때 떠났다. 시간은 밤이었고 주위는 나무가 소리를 흡수한 듯 조용하고 고요했다.

누군가는 도망이라고 할 수 있고 누군가는 쉼이라 할 수 있으나, 나에게는 둘 다였다.

떠나기를 마음먹고 처음으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는 바다였다.

그렇게 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에서 바다가 있다고 들은 장소를 목적으로 한 가장 빠른 기차표를 하나 사서 새벽 바다를 보기 위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쉬. 한숨을 털며 앉은 덜컹거리는 기차 속에서 주위에 아무도 없음에 감사하며 귀에 노래를 넣었다.

잔잔하고 고요한 노래가 귓가를 들려오자 스르륵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나에게 생각할 여유 따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멍만 때리며 보이지도 않는 창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 누군가 나를 가만히 보고 내 어깨에 손만 올려놓다 하더라도 난 울어버릴 거야.

나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위태로웠다.



스스로가 위태로움을 자각하고 하염없이 그 밑으로 떠내려가는 그 기분은 정말이지 매우 우울하다.

더러는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라고. 수렁에서 빠져나올 시간을 가지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포기했고. 빈 껍데기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나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일 뿐이었고. 자유와 여유와 고요를 바라지만 방향을 잃고 떠내려가는 썩은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과거에는 과실을 맺고 밝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날 좀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생각은 날 잡아먹었고, 나는 더 깊은 수렁에. 더 깊은 무기력함에 들어갈 뿐이었다.



뜨거운 커피가 생각났다. 따뜻함을 넘어선 뜨거운 거피를 마시면 이 우울한 지침 속에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차에 커피를 파는 곳이 있을까. 조금 정신을 차려보려 애를 써본다.

기차의 앞 칸일까 뒷 칸일까 어디로 갈지 자리에 앉아 조금 고민해보다 어차피 지금은 나 혼자고, 휴대폰 메시지 알람도 꺼놓았으며 머리는 지끈거렸으며 그렇다고 잠을 자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밤을 셀 거라면 그냥 깨어나서 멍 때리는 게 더 상쾌할 것 같았다. 그냥 일어나 아무 곳으로나 걸었다.

내가 중간쯤에 앉았던 건지 어쩐 건지 조금 걷고 몇 개의 칸을 지나가니 간단히 음식을 파는 칸이 나왔다. 나 스스로조차 뭐라고 하는지 모르는 정신으로 간단하게 뜨거운 블랙커피를 한 잔 시켰다.

이제 막 동이 트는 건지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한 건지, 24시간 운영인건지. 열차 칸에는 나를 포함에 두 명의 적은 승객들이 앉아있었고 둘 다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

고요한 적막 속에서 내가 시킨 커피를 기다리며 급하게 챙겨 온 가방을 들어 올렸다. 급하게 챙겨 나온 터라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손에 집히는 대로 가져온 윗옷 두어 벌에 책 하나. 휴대폰 충전기와 지갑. 이게 다였다. 생각보다 너무도 적은 짐에 실소가 터졌다. 너무 대책 없이 뛰쳐나왔나.

집은 아직 새벽이고 혹여 내가 나오는 인기척에 당신이 깼더라 하더라도 기차표를 구매하고 곧바로 보낸 집으로의 문자에 ‘바람 좀 쐬고 올게’라는 짧은 글만 적어 보낸 채 쳐다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며 무시해 그 뒤로 어떤 문자들이 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알게 뭔가.

나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가지지 못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리 긴 인생을 산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내 스스로가 충분히 불행하다 생각했다.

나는 늘 조급했고. 늘 숨찼으며. 티끌이라도 눈에 나는 것들은 거슬려 하루 종일. 몇 주 내내 어쩔 때는 몇 년 후에나 다시 나를 찾아와 한 밤중에 나를 깨워 그 원인을 찾고 걱정하고 울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또 별 것도 아닌 걸로 오밤중에 힘들어했다고 하지만, 또 언제 있다, 어떡하지. 하며 다시 고민할지도 모른다. 그게 나였다.

젠장. 미치도록 짜증 나고 한심한 그 인간이 나였다.

나는 발전하지 못했고 극복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유유히 그것을 흘려보내지도 못했다.

거의 6개월간 난 아직도 그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휩쓸리고 있었다. 급하게 가방에 욱여넣은 책 한 권을 꺼냈고 주문한 뜨거운 커피가 나왔다. 김이 펄펄 나는 그 커피를 입으로 몇 번 후후 불고는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뜨거웠고 꿀꺽 삼키지 못했지만 커피 잔 위로 폴폴 나는 그 수증기가 피부에 닿으면서 따뜻한 습기가 다가왔고 혀끝에 살짝 감도는 진한 커피 향이 뇌를 건드렸으며 식도를 타고 조금 흘러간 커피가 몸을 덥혔다.

커피 잔을 살짝 옆으로 치우고 가져온 책을 살폈다. 책은 가방에 넣어온 여느 짐 보다 조금은 시간을 들여 선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두껍지도. 그리고 그렇게 글이 많은 것도 아닌 적당한 책이었다. 어느 곳의 여행 에세이였다.

나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 기차의 끝이 이 에세이에 나오는 한 장소라면 어떨까?

나는 도망치고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로를 하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커피 한 모금에 책 몇 장. 그렇게 서너 장을 읽으면서 덜컹거리는 기차의 철로 소리에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차 안은 따뜻했고 눈에 피로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조금 풀린 것일까. 하루를 세고난 여파가 조금씩 내 눈을 공격하고 있었다.

활자들이 눈에 잘 차지 않자 나는 곧이어 책을 덮고 적당히 따뜻해진 커피 잔을 손에 가득 쥐며 눈을 편안하게 해 주려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치만 이미 눈이 피로해서인지 창밖에 빠르게 거쳐 가는 풍경들을 보니 더 멀미가 날 것 같아 쉼 없이 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적당히 빛이 바랜 와인 빛 색감의 바닥과 건너편 의자의 커버가 눈에 닿았다. 단색의 포근한 그 색감이 눈을 덜 아프게 하는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이 또 정처 없이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와인 빛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나에게 그 색은 젊기보단 오래된 나이 듦의 색이었다. 숙성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와인처럼 그 색 또한 시간을 감고 감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나에겐 발목을 붙잡고 마는 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푸른색이다. 하늘빛에 가까운 연한 파스텔의 톤보다도 눈이 시리도록 진한 그런 색. 정석의 파란색에 가까운 그런 색감이 좋았다. 그 푸름이 나에게 생기를 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시원한 바다가 생각나서 그 색을 좋아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색은 녹색이었다. 연한 녹색보다도 울창한 숲에서, 이끼냄새가 나는 그런 숲에서 그냥 털썩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내 눈에 펼쳐질 진한 녹색이 좋았다.

숲과 바다. 흔히들 묻는다. ‘바다가 좋아 숲이 좋아?’하고. 어렸을 적 나의 대답은 바다였다. 넓디넓은 무한할 것 같았고 바다 하면 해변에서 어우러져 노는 사람들의 생기와 활기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하하 호호한 웃음소리보다도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얼굴을 차갑게 해주는 내 뇌를 깨워주는 추위가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적어도 지금은 바다보다도 숲이 좋았다. 나무가 나를 가려주고. 나무에서 나오는 청량함이 새벽의 숲이 나를 적당히 깨워주면서 안식이 되어줄 것 같았다.

좋다. 바다를 보고 다음은 숲을 보자.

그렇게 얼렁뚱땅 나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홀짝이며 한 모금 남은 식은 커피를 꿀꺽 삼키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스르륵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이라도 이제는 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꺼지지는 않을 정도로 충전하는 것 같이 약간의 짧은 잠을 청했다.



기차가 정차하는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잠에서 깼다. 창밖을 보니 내 목적지가 맞았다. 가벼운 내 배낭을 짊어지고 옷을 챙겼다. 겨울은 아닌 날씨라 춥진 않았지만 집을 떠날 때 나온 시간이 워낙 이른 시간이라 밤공기에 가까운 차가운 공기 때문에 두꺼운 카디건을 하나 챙겼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로 결정한 나로서는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 였던 역엔 도착했지만 아직 해는 뜨지 않고 어둑어둑했다. 손목에 찬 손목시계를 보니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역에서 가져온 얇은 종이 지도를 펼쳐보니 역이 바다와 인접해 있어 그냥 일단 정처 없이 걸어보기로 했다. 바닷가 근처에 잠시 앉을 수 있는 실내가 있기를 바라면서 일단 걸었다. 아무 생각하기 싫었다. 두렵기보단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차가운 새벽공기를 마시면서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나 조금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일단 바다를 보자.

곧 새벽이고 해가 뜰 시간이었다.

일출을 보자.

답답했던 가슴을 먼저 뚫기로 결정했다.


혼자 이 새벽을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짓인지는 실감 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다가와 위해를 가한다면 그 조차도 대꾸나 저항을 할 힘조차, 기력조차 없었다. 정말로 나는 모든 걸 놓고 싶었다. 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 만해도 대단하다고 스스로를 되뇌어 위로해 보지만 그래도 나는 실패자 같았다.

도망치고 애써 위로를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은 다시 어지럽게 천사와 악마가 싸우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정처 없이 걸었다. 다행히 해안 산책로를 만든 것인지 잘 포장된 산책로여서 길을 잃지는 않을 수 있었다.

가는 길에 그냥 눈물이 났다. 이렇게 도망쳐 나온 내가 너무 한심해서. 근데 어찌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아무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으며 설명하기도 벅찼고 무슨 일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는 이 일련의 모든 것들이 싫고 무기력했다. 그래서 박차고 떠난 것인데. 다시 돌아가기도 싫고 정말 애써 생각을 잠재웠다.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지만 주르륵 떨어지진 않았다. 우는 것조차 지금은 내 맘대로 하지 못했다.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울 수가 없었다.

사람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괜찮다는 확신을 받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까. 혼자 우는 내가 서글퍼서, 나 스스로에게 해주는 위로로는 충분히 그 힘이 차지 않아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지 않았다.

꾸역꾸역 가슴에 쌓였고 나는 이걸 해결할 수 없었다. 가슴에 수도꼭지를 달아서 밸브를 열어서 한번 주르륵 안에 쌓인 물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까. 지금은 무겁고 답답하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맺혔던 눈물조차 말라갔고, 몸인지 마음이 지친 것인지, 어디든 가서 잠깐 앉자. 조금 쌀쌀했지만 밖이라도 일단 앉고 싶었다.



쏴아- 어느 순간부터 파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