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바다

<바나나, 냉장인가 하는 그런 걱정>. 2화

by 유우진

내 눈앞에 보이는 이 광경이 바다가 맞는 걸까.

막상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그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바닷가는 생각보다 더 추웠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해변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산책로의 끝자락에서 순간 주저했다.

집으로 가는데 걸으면 몇 시간이나 걸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로 떠나온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음, 충동적인 사람이었던가 싶었다.



실소가 났다. 평소엔 그렇게 가지자 가지자 한 마음가짐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한 걸음만 내딛으면 느껴질 고운 해변의 모래 감촉이 내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덮고 잠들려 노력했던 이층 침대의 극세사 이불로 변해버리는 상상을 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이 파도 소리는 내가 귀에 꽂고 듣고 있던 피아노 선율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차가운 바닷바람과 짭짤한 내음이 피부에 닿았다. 목에 오도도 소름이 끼쳤다. 바보 같은 생각. 눈과 발 끝에 힘을 주며 현실을 감각했다.

카디건의 앞섬을 여미고 산책로 나무 바닥과 해변가의 경계를 힘주어 넘었다. 흡. 내딛는 대로 조금씩 폭식포식 들어가는 걸음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바닷물이 닿지 않을 정도에서 떨어진 고운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에서 나올 때 검푸른 색의 하늘은 어느새 연한 푸르름으로 포근하게 다가왔다. 해가 뜬 것인지 아직 때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홀로 이렇게 멀리 떠나온 것은 처음이라.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정말 완벽하게 혼자인 이 순간이 굉장히 어색했지만 편안했다.

기차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와인 빛 천과 깜깜한 창 밖 대신 또 하염없이 파도와 바다와 하늘의 수평선을 바라봤다.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쳐다보게 되었다. 평소 같았다면 노래라도 틀었을 텐데 귓가에 울리는 파도 소리가 너무 좋았다. 반복적이면서도 반복적이지 않게 고요하지만 강인하게 귓가를 치고 들어와 파스스 부서지는 그 소리들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듯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 보니 떠나온 뒷 배경의 것들이 하나씩 생각났다. 내 미래와 내 과거와, 또 해야 할 일들. 사실 어떻게 보면 도피가 맞았다. 미래를 위해 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일련의 그 어떤 것들이 하기 싫어 나는 도망 나왔다. 내 미래를 위하는 당신이나.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한심하다 생각할지 모르겠다. 시간이 아까운데 뭐 하고 있는 것이냐고.



하지만 나는 정말 하기 싫었다. 다른 변명이나 이유를 붙일 수 있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고 혼자 있으니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냥 정말 하기 싫었다.

그냥 인정해 버리니 속 시원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면서 서글퍼졌다.

즐겨보는 만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한 아이가 한 아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밤새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를 찾지 못했고 결국 그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상대편이 묻는다. 그럼 그냥 싫어질 수도 있겠네? 그냥 스르륵 좋아지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냥 싫어지는 일이 왜 없을 수 있을까. 그때는 웃으며 보던 그 만화가 지금 내게 위로를 줄지 그때는 몰랐겠지.

그 만화의 대사처럼 나는 그냥 내 앞에 놓인 그 일들을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할 일이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으면 정말 무기력했고 하루하루 일이 없었으며 며칠 즐기던 무無한 일상이 그 마저도 며칠 하다 보면 지루하고 따분했다. 힘들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말 그 앞의 일들은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지금 도망 나왔다.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 막막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했는가. 그렇지만 어쩌면, 도망친 마음으로 뭔갈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헛된 걸까. 도망친 나에게 이 시간이 도움이 되길 바랐다. 이렇게 떠난 것이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부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받아들이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느 님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다른 것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어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어찌 보면 틀린 말이었다. 난 그 일을 하고 난 결과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해야 하는 일로 구분되는 그것들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나의 미래의 상은 내가 원하는, 운도 좋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향하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하기 싫은 것이었다. 하고 싶으면 노력을 하라 말한다. 당연하다. 거저 오는 것도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난 앞서 다 불타버려서 질려버렸다. 그러한 노력을 하는 것조차 너무나 버거웠고 질렸고 하기 싫었다. 나에겐 남아있는 불씨도 산소도, 장작도 남아있지 않았고 까맣게 다 타버린, 그리고 식어버린 재만 남아 바람에 한 톨씩 날아가고 있었다.

난 부디 이 떠남의 시간이 크지 않더라도 잠시 불을 지피고 내 열정을 따뜻하게 유지할 장작이나 불씨 등을 던져주길 바랐다. 지금은 차갑게 식어 추울 뿐이었다.



조금씩 찬 기운이 사라진다고 생각할 즈음 이 온도에 익숙해 진건가 하고 살짝 고개를 돌리니 불그스름한 색채가 하늘에 감돌았다.

차가운 커피 위의 크림이 살짝 섞여 들어가듯. 어떻게 푸름과 붉음이 이렇게 감미롭게 섞일 수 있을까? 당연히 보던 것들도 이런 때는 감동이고 강렬하다.

머리만 살짝 내민 그 순간이 설레었다. 옆에 이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지금은 살짝 아쉬웠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바라만 봐도 이 감동을 함께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이 이 옆에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었을까 한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들을 나열해 본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물론 당신들 중에서는 이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이 당연히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에 나가 함께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내 스스로가 부족했다. 불만족스러웠다. 이런 나는 이런 완벽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내뿜는 우울한 기운들이 그대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당신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혹은 섭섭해하겠지.

하지만 나는 너무나 복잡한 사람이라. 그리고 완벽하고 싶은 사람이라 이런 나와 만나는 것이 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혼자 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내가 이렇게 우울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몇몇 밤을 새우고 지세고 받은 그대들의 전화에 나는 항상 밝고 괜찮았다. 상황을 아는 당신들이 괜찮다 물을 때는 잘 지나가고 있다고 안심시켰으나 피로한 눈가가 그것은 아니라고 상기시켰다.

하지만 난 말할 수 없다. 아니, 말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어둑한 것은 하루 이틀일이 아니고 매일 같이 이 일을 이야기하면 당신들도 나에게 질릴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나에게 질렸을 수도 있겠다.





불그스름한 태양이 반쯤 고개를 내밀었다. 빠르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드문드문 모여 해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누군가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다 커진 눈으로 엄마에게 재잘대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 정열적인 색채를 배경으로 연인에게 입을 맞추고 누군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기도라.

나도 두 손을 모아 나의 신에게 기도했다. 눈을 감진 못했다. 눈을 감으면 다시 울면서 원망만 할 것 같았다. 차라리 밝아지는 저 해를 바라보고 싶었다.

어둠에 빠지기 시작할 때 나는 나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내 상황을 고하고 기도할 때 항상 나는 울었다. 그리고 어느 밤엔 받아들일 테니 이 상황을 탈피할 무언가를 바랐다. 내 기도가 바라기만 한 기도였던 건가. 잘못된 기도일까. 하지만 또 어느 날은 그냥 받아들인다고 하기엔 버티기가 힘들었다. 버틸 만큼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아직 짧았던 걸까?

몇 개월을 그렇게 사니 받아들인다고 말하기도 겁났다. 그래서 눈을 뜨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래요.

다른 긴 말이나 수식어, 이야기, 대화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냥 또 아무 생각 없이 두 손을 모으고 큰 숨과 함께 그래요. 이 단말마만 뱉었다.

알아서 생각하시겠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 속에 섞인 나의 불안, 서글픔, 어둠, 작은 안도와 결단과 담담함과 그 외 모든 것을 읽으시겠지 싶으며 한참을 두 손의 깍지를 낀 채 해를 바라봤다. 배꼼 처음 내밀었던 해의 머리만큼 나올 부분이 남자, 급하게 기도에 한 구절을 더했다. 부디 내 주변의 그대들이 행복할 수 있기를. 너무 클래식한 구절인가. 싶었지만 내가 어둠 속에 있으니 밖에 있는 그들을 위해 더 기도하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에 대한 기도는 글쎄. 더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냥 내 어둠이 티가 나지 않길, 어둠에 빠져 사는 건 지금 나로 충분하길. 건강하길. 한 명 한 명 당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의 학창 시절에 함께한 그대들, 나의 신을 함께 믿는 공동체의 당신을. 그리고 나와 함께 먹고, 씻고, 잠자고 사는 당신들을. 그중에 중년의 남자와 여인인 당신들이 떠올랐다. 내가 어둠에 빠진 것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서 차마 당신들에게 밤새워 나를 원망하고, 신을 원망하는 나의 눈물과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뱉을 순 없었다.





어릴 적 첫 번째 어둠으로 긁은 나의 상처를 보고 새벽에 흐느낀 당신의 울음을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버스를 타고 도망간 나를 안아 데려올 때, 늦은 밤 깜빡 잠든 나는 차 안에서 밖에서 울던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의 울음은 내 마음을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당신만은 울지 않았으면 했다. 상처를 본 당신이 우니 난 어쩔 줄을 몰랐다.

당신들이 나보다 어른이라. 나의 보호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신들이 날 싫어하거나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선 안에 있지만 당신이 우는 것은 선 밖이다.

그 선을 넘으면 나에게 있어 당신은 위태롭다는 것이어서 당신들의 울음은 내 마음을 쥔다. 당신들만큼은 제발. 제발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서 당신이 울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도 언젠가 나는 바다에 가고 싶었다. 정작 마지막에 도망친 건 서울행 버스를 통해서였지만.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한 나의 한 마디에 당신들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다로 향하려 했다.

당신들은 혹시나 내가 나를 놓을까 갖은 애를 썼고, 겨우겨우 또 그 어둠을 벗어났는데. 웃으며 하나의 추억으로 만들어 놨는데. 이번에도 차마 또 도와달라고 할 수 없었다.

어릴 적 나의 그 어둠은 어릴 적 가질 수 있는 고민에서 비롯되었고 나의 어둠은 나와 같이 성장했다. 더 짙어졌고 더 깊어졌다. 나는 나를 한 번 더 놓고 싶어 졌고 이번엔 그것을 방해할 일말의 미련조차 없다. 하지만 더 이상 당신들에게 또 어둠을 보이긴 싫었다. 아니, 싫기보단 보일 수 없었다. 나를 낳고 기르면서 몇 번이고 무너지는 나를 보며 당신들이 후회할 것 같았다. 당신들이 잘못 키운 것이라고 생각할까 봐. 살아가는 기쁨보다 또? 하는 고됨을 줄 것만 같아서.

차마 당신들에게 늘 왜 우는지 조차 모르는 채 눈물을 흘리고 훔치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그 밤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해가 다 떴다. 그래도 혼자 떠나와서 무엇인가를 보고, 하고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휴대폰은 꺼졌고 배도 고파졌다. 따뜻한 커피와 뭔가를 먹고 싶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를 털고 가방을 메고 사람들이 더 모인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길가가 나올 것 같아 움직여 보았다. 몇 걸음 몇 분 걷다 보니 다행히 이 이른 아침에 불이 켜진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온기가 눈에 보이자 갑자기 참기 힘든 허기가 돌았다. 다른 곳을 둘러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카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딸랑- 작은 종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