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냉장인가 하는 그런 걱정>. 5화
<바나나, 냉장인가 하는 그런 걱정>. 2화
광장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함께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광장을 지나쳐 광장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광장 가에 놓인 벤치에 털썩 앉아 광장이 그려진 지도를 다시 펼쳐들었다. 광장에서 시작된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상점가를 이루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유명한 상점들과 음식점이 지도에 볼드처리 되어있었다.
저녁을 여기서 먹을까. 유심히 지도를 쳐다보며 광장을 어떻게 돌아볼까 구상했다.
그러다 귀에 소리가 겹쳐 들어왔다. 신나게 울리는 이어폰 속 비트 속에서 미묘하게 다른 목소리가 중간 중간 삽입되었다.
고개를 들어 휴대폰을 확인하려는 찰나 눈에 공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어폰을 빼지 않고 그 장면만 보니 공연하고 있는 그 모습이 한 마리의 새 같았다.
자유롭고 즐거워보였다.
기타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이. 젬베를 두드리는 그 무게감이. 노래를 부르는 그 사람들이 눈빛으로 손가락과 발 박자로 함께 하는 모습이 매료시켰다.
눈을 그들에게 고정시킨 채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내 귀 속으로 그들의 목소리와 소리가 꽂혔다.
꽂혔다. 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놓칠까 눈을 떼지 못하는데 정작 공연을 하는 그들은 눈을 감고 당신들을 감싸고 있는 그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즐거웠고 부러웠다.
내가 좋아하지만 현실에 포기하며 도전하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런 공연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공연이 참 좋았다. 재능은 부족하더라도 나는 이런 공연을 꼭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는 이런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글쎄. 이것을 직업으로 삼진 못했다.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왜 난 저런 걸 도전할 용기를 못 냈을까? 또 공연을 보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노래. 나도 매주 노래는 부르는데...’ 그때 문득 내 묘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나도 매주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나의 신을 위해서. 매주. 그것도 거의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른다.
나는 왜 이걸 공연이라고, 무대라곤 생각안하고 후회만 하고 용기 없는 나를 자책할까? 매주 보는 사람들 앞에서만 노래를 불러서? 그렇다면 기회를 만들어 보면 되지 않을까.
매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참 용기 있는 일이야. 자책하고 후회하지 말자. 그리고 밖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하지 말고 잡자.
그리고 같이 부를 당신이 생각났다. 그래 같이 하자고 해보자. 이렇게 도망도 쳤는데 그거 하나 못할까. 혼자가 무서우면 같이 하면 되지. 아마 같이 하자고 흔쾌히 응해줄 지도 모른다. 돌아가면. 음, 응, 그래. 돌아가면, 돌아가면 물어보자. 집을 떠나오니 ‘도망도 나왔는데 이것도 못할까.’ 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았다.
이 위로와 이 격려가 또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돌아갈 때까지는 이렇게 돌아가면. 해보자. 하고 걱정을 뒤로 미루는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적어도 걱정을 붙잡고 있지 않아 보도록.
앞에서 공연을 하는 기타 소리가 멈추었고 박수소리가 대신했다. 나도 박수를 보냈다. 그들의 노래를 들어서 참 감사했다.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이 순간의 배경음악이 그들의 음악이어서 참 좋았다. 광장에 도착하고 이렇게 즐거운 노래를 들으니 시작이 좋다.
기분이 조금 더 달달해진 나는 지도를 가방에 넣고 일단 광장 가를 쓱 둘러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장 가에 이어진 길을 선택하기 전에 제일 앞에 광장과 닿아있는 장소를 보고 가장 흥미로운 길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지도에 그려진 큰 길은 다섯 갈래였다. 네모난 광장을 쭉 둘러보기 위해 일단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길에 깔린 회색빛의 벽돌을 꾹꾹 밟으며 따라갔다.
괜히 벽돌 안에 발을 맞추어 걸어보았다. 벽돌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따라가는 것이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 아이들 같았다.
이 벽돌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달달한 초콜릿으로 벽을 세운 마녀의 집일까?
벽돌을 쭈욱 따라 걸으니 그 끝을 알리는 조금 더 큰 벽돌모양이 나왔다. 도착이다. 고개를 들으니 눈앞에 보이는 첫 번째 상점은 옷 가게였다.
소박하게 꾸민 간판을 살펴보니 빈티지 옷을 파는 상점이었다. 밖에서 바라 본 상점은 아담했다. 우선 밖 간판대에 마련된 옷들을 구경했다. 상의, 하의, 겉옷을 더하여 작은 악세서리도 자기 그릇에 소담히 담겨있었다. 손으로 직접 적은 것 같은 작은 종이에 가격이 적혀있었지만 손으로 직접 만지지는 못했다. 괜히 만졌다가 혼나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조금 어려웠다.
아직 네 갈래 길이나 더 남았으니까. 만약 이 길로 가게 되면 그럼 가게를 구경하고 저 진주가 박힌 반지를 하나 사자. 혼자 속으로 마음먹은 나는 가게 간판을 한번, 나를 빙그레 바라보는 사장님의 얼굴을 한번 보고 마소를 지어주며 꾸벅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다시 벽돌을 보려다가 이번엔 건물들의 옆모습으로 이어진 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중간 중간 작은 골목들이 보였지만 상점은 아니고 집들인 듯싶었다.
중간 중간 발코니에 걸린 흰색의 수건들이 바람에 팔락거렸다. 파란 하늘에 참 잘 어울렸다. 갈색, 흰색, 노란색 색색의 벽을 타고 옹성옹성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 사는 곳 같았다.
나는 이 어둠을 지내면서 참, 음, 뭐랄까. 사람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다. 눈을 뜨면 이미 하루를 시작한 그대들은 밖에 나가 없었고 집안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밤을 세다, 세다 결국 낮밤이 바뀌어 버려서 나는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점심은 먹었는지 걱정 반 꾸짖음 반으로 전화를 건 당신에게 항상 난 밥을 먹지 않았다고 말했고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당신은 매일 밥도 안 먹느냐고 타박했지만 정말이었다. 난 밥을 먹는 것에는 별로 즐거움이나 흥미 따위를 가지지 못했다. 먹어도 뭐,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당장 배고프지도 않았고 먹는다 하더라도 대충 허기만 채우고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깨어 있어도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매번 꿈을 꿨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하게 취해서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무기력했다. 진짜 깨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무엇하러 그러나 싶은 생각만이 들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상상하거나 잠들어버리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더 낫다고 생각했다. 꿈에선 무엇이라도 하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라도 무엇을 하긴 하고, 시간이 지나니까.
점심이 지나고 한 번 깨기 시작하면 한 시간에 한 번씩 깼지만 늘 다시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이 자서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을 뜨는 것이 피로했다. 그래서, 그래도 이 상황을 도피하고 싶어서 또 잠을 잤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이 상황을 꼭 도피하는 것처럼 자고 자고 또 잤다. 잠만 잤다.
매일을 그렇게 사니까 이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현실인지 꿈인지 자각이 잘 되지 않았다. 이 꿈이 어제 꾼 꿈인지 아까 꾼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바람을 맞고 햇살을 맞으니 오랜만에 사람들 사는 세상을 마주한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어느 수업을 불평하는 사람들, 물건을 파는 소리. 자동차와 뱃고동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누워있을 때 집 안에서만 들렸던 적막과 끊이지 않은 티비 속의 소란스러움. 가끔 들리던 현관 밖 세상의 소리 등은 내 머릿속을 마치 바늘처럼 콕콕 찌르고 나는 그저 이불 속에서 눈을 반쯤 뜬 채 천장만 바라보면서 멍 하니 흘러 보냈다. 그런데 지금 이 소리는 마치 따뜻한 온열 주머니를 귓가에 댄 듯 포근하고 편안했다.
콕콕 찌르던 바늘이 이마를 짚어주는 당신의 손길같이 따스했다. 머리가 편안해서 기분이 좋았다.
눈을 감고 그 기분을 한껏 느끼며 슬며시 웃어보았다. 찬찬히 걸으며 손으로 쓸던 벽이 끊기고 두 번째 갈래가 시작되었다.
시작된 길의 처음에서 눈앞에 보이는 첫 번째 상점은 꽃가게였다. 통에 가득담긴 형형색색의 꽃들이 어디선가 뻗쳐 내려오는 햇빛을 받고 있었다.
붉은 빛의 장미, 노란 해바라기 초록빛의 데이지 풀꽃들이 너무 싱싱해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눈의 피로감이 한꺼풀 벗겨졌다. 그러면서 이상하게 식욕이 돋았다.
‘색을 봐서 그런가‘
집 안에만 있으면서 회색및의 또는 기름진 마른 음식들만 배고픔을 간간히 치우기 위해서 먹던 것이 생기를 보니 ‘참 안 좋게도 먹고 있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길로 가기로 결정되면 꽃하고 과일을 하나 사자. 세 번째 길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광장을 다시 마주보니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웃으며, 간혹 소리 지르며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 아이들의 부모처럼 보이는 여성과 남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풍경 속에서 내 시선을 끈 곳은 아이들이 차고 있는 공도 아니고 부모가 줄을 잡고 있는 강아지도 아니었다. 공을 열심히 차고 있는 큰 아이를 보고 있는 더 어린 남자아이였다.
자그마한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 조그만 모습과 상반되게 눈빛과 표정은 너무나 진지하게 공놀이를 하는 한 아이에게 시선이 고정되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고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그 작은 입 밖으로 큰 소리가 외쳐졌다. “형아! 나도 할래!” 귀여운 성질과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마 큰 아이가 하고 있는 저 공놀이보다도 그저‘형이 하고 있는 것’을 함께 하고 싶었으리라. 그 야무진 외침에 주변의 사람들의 표정에 미소가 띄였다.
짧은 다리로 공놀이를 하는 무리에 뛰어가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모습 속에서 결국 그 아이의 형으로 보이는 아이가 작은 아이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번쩍 들어 놓고는 부모에게로 데려다 놓아버렸다. 본인도 끙끙대며 옮겨놓고는 다시 쫒아 오는 동생을 무시해버리는 이 귀여운 일련의 사건이 그 주변 우리에게 관심사가 되었다.
형의 방해에 한껏 부픈 볼의 그 작은 아이를 보고 있자니 집에 있는 네가 생각났다.
너도 너에게 항상 내가 너를 떼어 놓고 놀러갔다고 자주 불평을 하곤 했다. 어릴 땐 왜 그렇게 너와 함께 노는 것이 나에게 썩 불쾌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너와 하는 모든 것이 제일 편한데. 나는 항상 너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너에게 신경 써주지 못했다. 이게 참 미안하다. 내 어둠 때문에 네 감정을 다 표현하지 못한 그 때가 참 미안하고 내 감정에 치우쳐 너를 마음 아프게 한 그 때가 참 미안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하지만 네 앞에서는 항상 큰 사람이고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지금은 항상 네가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내가 못하는 타인의 시선에 힘들어하지 않는 것이. 참 꼼꼼하고 그 와중에 귀여운 것 모두다. 너는 참 귀엽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내가 두 번째 어둠에서 내가 그리 믿었던 ‘우리집 차’ 안에서 힘들어 할 때 너는 그 긴 운전시간동안 내 옆에서 쉴 새도 없이 재롱을 부렸다.
그때 너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무반주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나에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걸었다. 덕분에 웃고,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가면서 숨을 고르게 쉴 수 있었다.
너는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에게 내가 좋은 언니였으면 좋겠다. 한 없이 부족하고 간간히 재수 없고 자주 답답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된다면 그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넌 나에게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을 너에게 의논해서 너에게 ‘괜찮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그 문제는 더 이상 고민되지 않았다.
너의 말은 나에게 그런 효과가 있었다. 물론 그 위에 두어 번 물어보면 넌 짜증을 냈지만, 그래도 항상 확신을 줬다.
내가 머리 아플 때 누군가의 핀잔을 받으면 항상 머리 아픈 사람 안 그래도 혼자 고민 다 하니까 보태지 말라며 방어해주는 너는. 아마 걱정하고 있을 부모에게 도리어 잘 다녀오는 거라고 안심시키며 또 나를 지켜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너를 내가 참 사랑한다.
그 귀여운 형제들을 보고 걷다 보니 어느새 또 다른 길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제는 어떤 가게가 있나 궁금해지고 있었다. 과자 가게일까, 책 가게일까.
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가게는 다름아닌 카메라 가게였다. 쇼 윈도우에 기품 있게 진열되어 있는 검은색의 카메라들이 반짝였다.
우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하며 창 가까이로 다가갔다. 쇼 윈도우에 내 얼굴과, 카메라 말고 다른 것이 비춰졌다. 놀라 올려다보니 가게 안에서 사람이 보였다.
주름이 있는 얼굴의 노신사.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들어와서 구경하라는 목소리가 마치 벌의 달콤한 사탕처럼 나를 불렀다. 결국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처음 내가 한 규칙을 잠깐 깨기로 마음먹었고 노신사가 열어준 문 틈 사이로 몸을 넣었다.
가게 안은 적막했고 따뜻했다. 무언가 찾는 것이 있냐고 묻는 노신사가 빙긋이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얼버무리다 지금은 돈이 없다고 말했고 곧 후회했다.
그냥 보고 있다고 하면 되지. 무엇하러 이런 얘기까지 하나 스스로 나에게 핀잔을 줬다. 그때 노신사가 허허 웃으며 나에게 이야기했다. 일회용카메라도 있다고.
엇- 하며 내가 노신사를 바라봤다. “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이 여행 오면 많이들 사가.” 가격을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저렴한 가격이었다. 고민하지 않고 산다고 이야기 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추기가 어려워 해실 해실 웃어버렸다. 그런 내 모습에 카메라를 꺼내 보였고 설명을 해주는 노신사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써본적은 있어? ”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했고 노신사는 알려줄 테니 이리 와보라며 나를 불렀다.
필름을 카메라에 넣어주고 간단한 조작법을 알려주는 그 순간이 따뜻했다. 공기도 따뜻했지만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옛날이야길 해주는 순간 같았다.
내가 잘 이해했는지 되물어 질문하는 그 모습이 참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이 참 감사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젊다 못해 어리고 어린 나에게 찬찬히 알려주는 그 목소리가 안정감을 줬고 카메라 얘기였지만 괜찮다고 토닥이는 것 같았다.
설명을 다 마치고 카메라를 건내 주는 노신사에게 깊이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동행이 생겨 기분이 좋아 방금 필름을 다 감겨준 카메라로 카메라 가게의 간판을 담았다. 짙은 녹색에 노란 글씨의 따뜻한 그 가게를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가게 안에서 노신사의 웃음과 엄지손가락을 보고 나도 똑같이 보답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른 길을 나서러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해가 쨍하니 비췄다. 예전에는 햇빛 맞는 것을 좋아해서 점심을 먹으면 꼭 친구들과 햇빛을 맞으러 산책을 하곤 했다. 밥 먹는 공간이 교실과 떨어져 거의 모든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운동장을 도는 핵심 코스이긴 했지만 나에겐 그 전심시간이 학창시절하면 떠오르는 배경이 되었다. 꼭 그때가 떠올라서 이번에도 햇빛을 온 몸으로 받아보았다. 빙그레 웃음이 걸터앉았다.
사람도 식물처럼 햇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한동안 집에만 있어서 그런지 밝은 빛에 눈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저 햇빛을 받고 있는 것 뿐 인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몸의 반은 건물의 그림자에 몸의 반은 햇빛에 담아 두고 걸어보았다. 시원하면서 따뜻했다. 내가 그간 고민하던 그 모든 것들이 생각나지 않고 그저 기분좋음만 남았다.
문득 떠나온 것이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했다고. 웃음이 입 밖으로 조금씩 흘러나올 때 즈음 새로운 길의 초입에 새롭게 다다랐다. 이번에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가게는 잡화점이었다. 이제보니 광장을 두고 길마다 특징적인 골목으로 되어있는 듯 싶다.
빛이 살짝 바랜 분홍색 간판이 눈을 사로잡았다. 초록색으로 쓰인 간판 이름이 혀에 둥글게 말아 올라왔다. 잡화점이라. 창 밖에서 보이는 가게의 소품들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엔틱한 찻잔과 시계 등이 보였다. 집에 두고 온 네가 생각나 선물을 살까 싶어 들어가볼까 고민하던 중에 마지막 남은 다섯 번째 길까지 가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두 번째 청과점에서 과일을 사려고 한 것처럼. 이 길로 가기로 결정하면 그땐 이 잡화점에서 네게 줄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것이 좋을까 고민하며 다음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지막 길을 향하려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마지막 길에 시작될 가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네 번째 길 초임에서 몇걸음 가지 않아 보인 헌책 박스와 간판 때문이었다. 이 길은 ‘책의 길‘인가보다. 과일 대신 나무 박스에 담긴 책들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예쁘게도 담겨 있었다.
다여섯개 놓인 박스들을 앞세우고 주인인 듯 보이는 남성이 간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누가 책을 들어 올려 보던지 말던지 책에 집중한 눈이 신중했다.
모자를 눌러쓴 당신을 포함하여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헌 책을 저렴한 값에 내놓은 듯 두꺼운 종이에 적인 가격은 꽤 인상적이었다. 책의 장르에 상관없이 무더기로 담겨진 모습이 나에게는 마치 엄마의 보석함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어떤 아름다운 것이 담겨있는지 모르는 채 설렘을 안고 보석함을 열기 직전 같았다. 나도 한 권 살펴볼까 하다가 그래도 길 문턱은 넘어서, 길 초입에 있는 가게로 가서 구경하기로 했다. 골목에 들어서니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 내부 같았다. 어딜 둘러봐도 달콤한 초콜릿과 쿠키들이 문 밖에 즐비어 놓여있었다. 반듯반듯한 글씨들이 정갈하게 적힌 종이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학창시절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책이 가득 담긴 서가들 사이사이는 나의 비밀공간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에겐 도서관은 안전지대였다. 책을 읽지 않아도 그냥 도서관이나 서점같이 책에 둘러 쌓여있으면 포근하고 조용하고 편안했다.
밥을 먹지 않을 때 내가 교실에 없으면 내 친구들은 도서관으로 나를 찾으러 왔고 사서선생님은 내가 좋아할 법한 책들을 추천해주셨다.
책은 양파같았다. 어떤 책을 읽으면 외국에 나간 기분이고 어떤 책을 읽으면 여름인데도 같았고 어떤 책을 읽으면 내 기분을 대변해주고 조언을 서슴치 않았다. 내가 어떤 책을 손에 잡느냐에 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경험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 몰입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온전히 찍혀있는 활자들은 믿음직스러웠고 안전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휴대폰이나 인터넷의 글들 보다 종이에 딱 찍혀있는 잉크의 물들임이 난 참 좋았다. 여행을 가도 그 지역의 유명한 도서관을 들르고 서점을 찾아 돌아다니는 나를 집에 있는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여기에 함께 왔다면 “딱 언니가 좋아할 곳이네”하고 정신없이 신나서 돌아다니는 나를 사진에 담았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너를 생각하면서 길의 초입에 닿았다.
예상했던 것이 맞았다. 서점이나 헌책방들이 늘어져 있는 길 같았다. 군데군데 책과 커피를 함께 파는 북 카페가 있는 것인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커피와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이 길목 사이사이에 앉아있었다. 길 초입에도 역시 서점이 있었다. 원목으로 된 가판대에 글이 적혀 있어 읽어보니 중고서적과 새 책을 모두 판매하는 것처럼 보였다.
들어가 보니 복층으로 되어있는 좁은 서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소란스럽지 않았다.
작은 쪽지에 하나하나 적혀있는 서점 주인의 추천서가 귀여웠다. 어떤 책이 있는가 찬찬히 둘러보니 장르는 다양했다. 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종류의 책이 마련되어있었고 서가의 한 자리를 잔뜩 차지한 그림책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맨 바닥에 앉아 그림책을 읽고 있었고 그런 아이들을 보고도 남색의 앞치마를 맨 직원들은 저지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며 아이와 그림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설, 에세이 등 여러 신간 책들을 뒤로하고 중고 서점 코너로 향했다. 평소 책을 고를 때 항상 표지나 맨 뒷장에 간략적인 내용이 보이는 것을 읽고 책을 골랐다. 가끔은 그냥 제목만 보고 책을 구매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하면 가끔 취향에 안 맞는 책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는 내가 골라온 책의 뒷내용이 궁금해서 끝까지 읽게 됐다.
이번에도 그런 보물 같은 이야기를 찾아내보고 싶은 마음에 중고 코너에 진열되어있는 책들의 책등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고전 소설부터 유행했던 에세이집, 시집들까지 서점에 팔거나 기증했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왔듯 다양한 책이 놓아져 있었다. 다들 어느 집을 얼마나 오래 지내면서 시간이 쌓이고 이곳에서 또 어느 곳으로 가게 될지 꼭 내가 다음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이 설레었다.
서가를 주욱 눈으로 훑으며 동시에 손 끝으로 무뎌진 모서리를 쓸는 사이 한 책의 제목에 순간 멈쳤다.
제목에 도망과 마을의 이름이 동시에 적혀있었다. 작가도 이 마을로 도망 온 것일까? 도망 온 여행 책이라, 나의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책을 펼쳐 보았다.
기행문 형식으로 엮인 책은 단순히 이 마을의 유명 음식점이나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이 거닐고 느낀 에세이에 더 가까워서 마치 저자가 되어 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기분을 주었다.
내가 다녀온 바다의 사진도 실려 있었다. 아침의 바다가 아니라 저녁의 노을을 지닌 바다였다. 나와 다른 시간대에 같은 공간을 사진으로 바라보니 묘했다.
문득 이것을 너의 선물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곳을 다녀왔어. 내가 여기로 도망 다녀왔어. 라고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이걸 선물하자. 마음을 먹고 책을 덮었다. 더 읽으면 왠지 저자가 가라는 데로 갈 것만 같았다. 난 나의 도망을 하고 싶어. 도망이잖아.
나중에 이 도망이 끝나고 이걸 네게 건내 줄 때 함께 사진을 보고 내가 다녀온 곳은 표시해서 줘야겠다. 줄을 서고 계산을 했다. 구매한 책을 가방에 넣고 나니 가방이 묵직해 졌다. 묵직한 가방만큼 순간 뭔가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젊은이들이 광장으로 향한다. 좀 전 보다 북적한 거리가 조금은 낯설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옷가게부터 청과점, 카메라, 잡화점까지 가지각색의 길을 맛보고 나니 다음 행선지가 메인 메뉴 고르기만큼이나 어려웠다.
문득 길바닥에 하늘색으로 길안내를 해놓은 표시를 보고 나는 지금 서 있는 이 길로 주욱 발걸음을 옮겨봐야겠다 싶었다.
반짝- 길에 햇빛이 무언가에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그 반짝거림 사이로 ‘대학교’라는 글씨가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