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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Jul 26. 2023

천조국의 그늘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미국 여행은 대체로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유럽 같으면 나라가 작고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으므로 자유여행으로도 어렵지 않게 나라 간 이동이 쉽고 도시를 여행하는 데 불편함이 덜하다. 반면, 미국은 나라 자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여행할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다. 같은 이유로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은 여행자들이 쉽게 이용할 만큼 발달해 있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여행자는 차를 빌려서 여행하게 된다. 차를 빌린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교통 시스템과 도로 상황에도 운전하며 돌아다녀야 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여행하는 데 긴장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적응하여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로서 미국에 올 때마다 신경이 본능적으로 곤두서있음을 느낀다.



여행만 난이도가 높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곳의 생활 난이도 또한 높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만큼 개인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나 책임도 크다. 요양원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노인들은 자유를 선택한 대가로 노년의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 80이 넘는 노인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 운전해서 마트를 다녀야 한다. 교차로에서 느린 속도로 좌회전하다 달려오는 차에 받혀 죽는 노인이 많아서 노인 사망률이 증가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미국의 교통신호체계는 좌회전 신호를 허용하는 곳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차로가 비보호 좌회전이기 때문에 운전자가 조심해서 살피지 않으면 사고를 부를 수 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보장이 좋은 의료보험을 이용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은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나라이다. 물론 저소득층을 위한 긴급구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료보험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큰 비용이 든다. 직업 세계도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알 수 있지만 이를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4일간 머무르는 이 호텔의 정문과 발렛파킹은 아프리칸-아메리칸이, 조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의 종업원은 멕시칸이, 체크인 데스크는 주로 백인 종업원이 담당하고 있다. 시카고의 수많은 빌딩 유리를 닦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색인종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양복 입은 멋진 백인들은 큰 회사 빌딩에 있거나 종합병원에 가면 주로 있다.



미국은 모든 물자가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임에는 맞지만, 거주지는 확실하게 분리되어 생활한다. 강남과 강북을 나누고 낙후된 동네와 새로 개발되는 동네를 나누는 우리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거주지 분리 현상이 있다. 안전한 동네에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동네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끼리끼리 사는 분위기가 확실하게 정착되어 있고 이것에 대해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부자는 부자대로 사는 방법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시카고 다운타운은 노숙자도 많지만, 정신이 이상한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정말 많다. 오늘 오전 건널목을 건너는 중에 어떤 흑인이 비틀거리며 걷다가 갑자기 삼보일배하듯이 길 한가운데에 길게 엎드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차들이 달려오는 거리 한가운데 엎드러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지나다닌다. 오후에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을 서너 명 마주쳤다. 그들의 정신은 왜 이렇게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었을까. 몇 년 전 갔던 엘에이 다운타운은 그야말로 노숙자들의 천국이었다. 돌아다니는 사람 중 노숙자가 더 많아 보이는 지경이었다. 집이라고 만들어 놓은 박스와 낡은 이불로 만든 보금자리가 거의 10미터마다 있었다. 그들도 과거에는 ‘진짜 집’에서 살았던 시절이 있을 텐데 지금은 왜 여기서 사는 것일까.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사는 미국 사람들의 삶이 녹록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떤 사회시스템이 사람들의 삶을 좀 더 안정적으로 도울 수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돈의 많고 적음이 사람들의 삶을 다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물질이 정신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사회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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