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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Aug 07. 2023

낯선 장소에서 보이는 것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에 보름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에 대한 심각성을 부모나 자식이나 전혀 감지하지 못했으니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사 상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보고 싶었던 장소를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우리는 여행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치를 얻어내고 싶었던 마음을 포기했다. 하루를 돌아다니고 나니, 짧은 시간에 장대한 유럽의 역사가 담긴 도시들을 다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바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세느강 유람선을 탔고, 루브르에서는 모나리자를 오르세에서는 고흐의 작품을 둘러보다 시차 적응이 안 된 몸을 이끌고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한참을 쉬었다. 인터라켄에서는 융프라우에 올라 한국 사람은 다 먹는다는 신라면을 먹었다. 일주일 동안 빵만 먹다가 라면을 영접하니 그저 황홀했다. 베네치아 기차역을 나왔을 때 우리는 와... 하는 탄성을 질렀고 물 위에 떠 있는 오래된 도시가 신기하여 쳐다보느라 정신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에 쓸려 다니느라 이내 피곤하여 맥도날드에 가서 쉬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역시 피곤하다...     



여행의 즐거움은 의외성에 있다고 했던가. 우리 가족에게 피렌체는 의외의 즐거움을 가져다준 도시였다. 휴가를 많이 낼 수 없는 남편과 피렌체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날짜를 맞춰 아들과 나는 피렌체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치 피렌체에 오래 살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도착시간에 맞춰 기차역으로 남편을 마중 나갔는데, 그날 밤 일은 나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낯선 도시의 기차역에 내린 남편이 특별하게 멋있어 보이는, 인생에 몇 개 없는 희귀한 명장면을 획득하였다. 그 밤의 기억으로 피렌체는 나에게 특별한 도시가 되어 언젠가는 남편과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들어간 우피치 미술관에서 우리는 복도 벤치에 앉아서 졸고 있던 덩치만 큰 사춘기 남자애들을 만났다. 부모 손에 끌려온 것임을 한눈에 확인했다. 세계 어디나 비슷한 부모는 존재한다. 그들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보티첼리는 아침 꿀잠을 방해하는 존재에 불과할 뿐 큰 의미가 없었다. 국립미술관에 갈 때마다 신석기 시대관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우리 집 청소년과 정확히 닮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청소년은 미술품 관람에 흥미가 없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기억할 과거가 많은 나이 든 사람이 좋아하는 장소이다. 앞으로 펼쳐야 할 미래가 더 많이 남은 청소년이 싫다면 굳이 ‘훌륭하고 오래된’ 작품을 보러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된다.



피렌체의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석양을 정면으로 맞으며 남편과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던 순간이다. 아들이 찍어둔 사진은 엄마와 아빠도 다정함을 표현하는 때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 속의 내 표정이 마음에 들게 편안해 보여서 내 인생의 즐거운 하루로 마음에 저장했다. 유난히 붉고 황홀했던 석양 때문이었는지, 미켈란젤로 언덕을 택시 타지 말고 걸어서 내려오자고 하니 ‘군말 없이’ 따라온 남편이 맘에 들어서였는지...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여행은 눈에 무엇인가를 담아오는 것보다, 마음에 어떤 장면 한 컷을 담을 때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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