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pcicle Aug 17. 2023

평균에서 벗어나는 삶으로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하는데 축의금은 얼마가 국룰인가요?”

“학기 첫날은 수업 안 하는 게 국룰 아닌가요?”

“결혼하면 양가 부모님에게 얼마를 용돈으로 드리는 게 국룰인가요?”     



나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국룰’이라는 용어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말이다. ‘국룰’을 온라인에 물어보는 경우도 많다. 내 친구 결혼식에 축의금의 액수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부모님에게 매달 50만 원을 용돈으로 드리고 있는데 ‘국룰’이 40만 원이라면, 나는 10 만원을 줄여야 하는가를 몹시 고민할 것 같은 질문이다.     



굳이 내가 ‘국룰’을 물어보지 않더라도 온라인을 통해 전파되는 ‘국룰’은 젊은이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국룰’로써 소개팅 장소나 음식의 종류를 정해주는 것은 기본이다. 신혼여행지 국룰도 있으며, 사진 촬영의 국룰 포즈도 있다. 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국룰’을 선호하게 되었을까? ‘국룰’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 그래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내 판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줄여준다는 좋은 점도 있다. ‘국룰’이 다수가 동의하는 규칙이라면, 그것은 평균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은 평균적인 삶을 원하는 것일까? ‘국룰’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와 비슷한 용어인 ‘평타’를 발견했다.     



“첫 토익점수 600점대인데 평타는 친 걸까요?” 온라인상에서 발견한 질문이다.     


평타는 평균 타격의 줄임말이니 ‘중간 정도’라는 말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내가 받은 토익 점수가 평균 정도는 되는지를 온라인에 묻는다. 남들보다 뒤처지지도 앞서가지도 않게 중간은 간다는 심리적 안도감을 얻고 싶은 마음이 반영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결국 ‘국룰’이나 ‘평타’를 온라인의 불특정인에게 물어보는 것은 남들에게 나의 삶이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보여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온 것이다. ‘국룰’을 통해 열심히 평균의 삶을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통계학에서 평균은 수치화된 자료를 설명하고 비교하는 데 유용한 지표이다. 하지만 자료를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평균’값이 얼마나 실제를 왜곡시키는지를 잘 안다.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의 평균소득이 5만 불인 것과, 빈부격차가 없이 중산층이 국민의 대다수인 나라의 평균소득이 5만 불인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국룰’을 조언하는 불특정인이 견지하는 삶의 기준이 평균적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실제의 삶보다는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목표대로 ‘국룰’을 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평균적인 삶이 아니다.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당연히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제 수준으로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적당한데, ‘국룰’은 유럽 여행이라고 하니 나도 유럽 어딘가로 신혼여행을 가줘야 평균적인 삶을 사는 느낌이 드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내 삶의 만족도를 떨어뜨린다. ‘국룰’을 온라인에 묻다가 세월이 조금 더 지나면 챗GPT에게 내 삶의 기준을 물어보게 될 수도 있다. AI에게 내 삶을 맡기는 인간으로 살고 싶은가. 


    

개별적인 삶을 존중하는 사회로 갈수록 평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N명의 사람 숫자만큼 N개의 삶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사회 속에 존재하기 위한 규칙은 지키며 살지만, 내 삶의 규칙을 온라인에 묻고 그것이 평균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남들이 평가하는 평균의 삶에서 멀어질수록 비로소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한 인간의 삶이 시작된다.     

작가의 이전글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