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살이 넘으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생각만 해도 지루하지 않냐?”
젊었던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다녔다. 친구들과 나는 중년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우월감에 가득 찬 청춘을 보냈다. 중년의 나이는 아득하게 멀어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나이 들었을 그 순간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이 되었을 때 시내버스에 올라 버스요금을 통에 집어넣는 그 순간조차도 너무 좋아서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낄 만큼 청춘이 설레었다는 한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무엇을 해도 좋기만 한 청춘이 얼마나 짧은지를 그때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젊다고도 늙었다고도 하기 애매한 나이를 맞이하고 보니 친구들 모임이 아니고서는 어디 가서 끼어있기가 편하지 않다. 무엇으로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지가 고민스러운 순간이다.
‘정체성은 사춘기에 이미 정립된 거 아니었어?’ 질풍노도의 시기는 오래전에 지나간 줄 알았는데 사춘기도 아니고 인생 중반의 어중간한 나이에 정체성 고민을 다시 하게 될 줄 몰랐다. ‘중년의 위기’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찾아온다.
마음은 평생 청춘이라, 처음 중년을 알리는 신호는 마음이 아닌 몸에서 보내온다. 대개는 이전과 달라지는 신체적 변화가 중년이 왔음을 가장 먼저 감지한다. 누군가는 노안을 발견하면서, 또 누군가는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자기가 중년에 접어들었음을 알게 된다. 어느 날은 온몸의 관절에 통증이 느껴지고 근육이 사라져가는 몸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중년을 맞이한다. 습관처럼 찾아오는 어느 불면의 밤에 오래전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중년이고 나는 청년이던 그 시절 말이다.
엄마는 가끔 속이 답답하다며 집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다녀오곤 했었다. 어느 날은 134번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경희대 앞에서 내렸다. 또 어느 날은 면목동이 종점이었던 50번 버스를 타고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서 가는 동안 창밖을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적을때였다. 그때의 나는 청춘이었고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은 매일 있었다. 집 밖은 돌아다니기만 해도 흥미진진한 일투성이였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워진 현실이었기에 불안한 청춘이어도 기가 죽는 날은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갔다. ‘면목동까지 가는 버스에 앉아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마음속의 답답함이 좀 풀렸을까?‘
엄마가 하루 종일 집에서 뭐 하며 지낼까를 궁금해했던 기억이 없다.
한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 지루한 50대를 상상하기도 싫어했던 그 친구들을 여전히 만난다. 인생의 정오를 지났으나, 수명은 자꾸 연장되어 살아온 시간만큼 살아갈 시간이 여전히 남았다. 늙어가는 부모와 이제 사회에 자리 잡느라 애쓰는 아이들과 부대끼느라 바쁜 그들에게 지루할 줄 알았던 중년은 지루할 새가 없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짝사랑은 우리 몸 어딘가의 유전자에 새겨진 흔적이라도 되는지 부모는 주체하기 어려운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힘들어한다. 중년기 우울증은 호르몬의 불균형으로부터 시작되어 뇌의 감정 중추를 건드리고 결국에는 감정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과거의 불안했던 마음을 깨운다. 이 불안한 마음은 지금까지 억눌러온 온갖 서러운 기억과 그로 인한 서운함의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 확실하다.
내 부모로부터 적절한 분량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 모양이라고 불평하면서도 내 자식에게 주어야 하는 사랑의 분량을 채우는 데는 거침이 없다. ‘짝사랑은 죄가 아니잖아요? 상대방이 그 사랑의 깊이를 모르더라도요.’ 하지만 매사가 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사랑이 넘치다 보면 집착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서로 기대하는 사랑의 양이 달라서 필연적으로 서운함을 동반하고, 심해지면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경우도 생긴다.
전력을 다해 아이를 돌보던 시간이 지나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커버리고 이제는 독립해서 집을 나갔다. 같이 살더라도 자기의 세계가 확고한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갑자기 막막하다. 품 안의 아이는 더 이상 없고 언제 나이가 들었는지 모를 중년의 나를 마주할 뿐이다. 허탈한 마음이 몰려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아이와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기회가 왔으니.
“엄마, 오늘은 뭐 하며 지낼 거야? 특별한 일정이나 할 일이 있어?”
친구의 아들은 매일 아침이면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아침을 제외하고 얼굴 보기 어려운 대학생 아들이지만 이때만은 다정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 기특한 아들은 엄마가 오늘 하루를 뭐하며 보내는지 궁금하기 때문에 항상 이렇게 묻고 엄마의 대답을 기다린다. 자기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고 물어봐 주는 이가 있음으로 인해 중년기 이후의 삶에 그녀는 오히려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고 한다. 중년기를 지나는 그녀의 인생이 풍요로워 보인다. 엄마가 뭐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도통 관심이 없었던 그 나이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바람직한 성인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서로의 삶에 안부를 묻는 사이’로 나는 규정하고 싶다. 부모의 역할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은 중년을 맞은 바로 지금이다. 돌보아야 할 존재로서의 자녀와 이제 작별할 시간이 왔다. 오래된 친구 관계가 그렇듯이 서로의 인생을 궁금해하며 잘되기를 빌어주고, 필요할 때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런 사이로 발전하는 시간이다. 각자의 인생을 살되 서로의 삶에 집착하거나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관심을 놓지 않는 관계로 발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드디어 인생 친구 한 명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서로의 삶에 안부를 묻는 사이’로 발전할 기회는 자식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다. 나와 한 시절을 공유하였지만 그 시간은 다 지나고 이제는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부모에게도 애정을 담은 안부를 물어야 할 때다.
자식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니 이제 부모님이 번갈아 가며 아프거나 돌아가시는 시기가 되었다. 같이 살았던 기억속의 부모님은 항상 젊고 활기에 차 있는 모습인데, 현실은 반대다. 집에는 온갖 약들이 쌓여가고 하루걸러 한 번씩 병원으로 출근하신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또 하루가 시작되면 인간이 유한한 존재인 것을 모르는 척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자식들이 서운하지 않을 만큼 살짝만 아프다 죽는 것은 고령 노인들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소수의 노인에게만 주어진 선물과 같다. 병원 침대에 누워 수액과 약병을 주렁주렁 달고 인생을 마지막을 맞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만은 대부분 노인의 운명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하다.
엄마는 4년 전부터 건강검진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지금껏 그렇게 살고 있다. 살만큼 오래 살았으니 병이 발견되더라도 치료하지 않고 그냥 살다가 죽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죽고 싶어’ 라고 나는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까. 생로병사의 과정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고 싶은 중년들에게 생산성(generativity)을 높일 것을 주문한다. 에릭슨이 말하는 생산성은 타인을 향한 관대함을 늘림으로써 높아질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에는 자식과 배우자도 포함된다. 다음 세대를 향한 관대함과 애정을 놓치지 않는 중년이 되기를, 나와 시절을 같이했던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변함없는 우정의 관계를 유지하며 늙어갈 수 있기를, 혹시 개인적 성취는 이번 생에서는 더 이상 없다고 해도 덤덤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