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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Sep 05. 2023

시들지 않는 복고의 열풍

젊은 트로트 가수가 좋아 밤낮으로 트로트를 듣는 중년의 여성이 있다. 가수의 노래를 듣고 콘서트에 가기 위해 새벽 기차를 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들뻘 되는 꽃미남 트로트 가수가 나오는 예능이라면 모조리 챙겨본다. 그녀에게 젊고 발랄한 트로트 가수 덕질은 단조롭기만 하던 중년기 삶의 낙이 되었다. 젊은 가수가 트로트를 부르니 좋은 것인지, 그냥 트로트 음악이 좋은 것인지 정확하게 물어본 적은 없다. 트로트의 부활은 많은 중년에게 삶의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예전에는 나이 든 사람만 들었다는 트로트가 이제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의 장르가 되었다고 말한다. 젊은 사람들도 트로트에 열광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녀가 말하는 대중은 누구인지 궁금하다. 내가 아는 젊은이들은 BTS와 아이유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연남동 오래된 골목길이 젊은이들을 끌어당겼다. 연남동은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라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다. 앵두나무와 사과나무가 있던 이층 양옥, 우리 집도 헐리고 골목 안의 정취가 살아있는 식당 건물로 다시 태어났다. 젊은이들은 이 동네가 뭐가 좋았을까. 오래도록 변하지 못하는 옛날 모습 그대로의 동네가 나는 지겨웠었다. 이들은 또 오래된 시골집을 고쳐서 사는 것에도 열광한다고 한다. 오래된 것들에 흥미를 느끼는 MZ세대는 심지어 할머니 라이프를 꿈꾸기도 한다고… 그들이 말하는 할머니 라이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걔들이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몰라서 그래, 지들이 재래식 화장실을 알기나 하냐고…

노동이 뭔지를 모르니 그렇지, 가마솥에 밥해 먹고 우물에서 빨래하던 고단하고 불편한 삶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는 거지.“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고민이었던 기다란 판자 두 개만 달랑 걸쳐놓아 무섭기까지 한 재래식 화장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나는 이 한마디로 MZ세대의 알 수 없는 취향의 세계를 마음껏 비판했다. 하지만 그들이 태어나서 지금껏 살았던 집의 형태가 아파트일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테니 오래되어 손때묻어 보이는 물건이나 집이 그들에게 오히려 새롭게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해 본다. 이 아이들은 낡고 오래된 것들에서 무엇을 찾고 있을까?     



젊은 트로트 가수가 중년의 마음을 흔들고, 오래되고 불편한 생활방식에 젊은이들은 열광하는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잠깐 유행하다 지나갈 것 같았던 복고열풍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복고열풍은 문화 컨텐츠 산업에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컨텐츠를 소비하는 연령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중년이 많아 보이는 현상은 트로트라는 음악 장르가 갑자기 훌륭해진 것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년 인구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중년의 시청자를 위해 그들에게 걸맞은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이들도 점차 연령이 높아지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고령화사회는 사회 구석구석 영향을 미치고 있다.   


 

‘라떼는…’을 외치는 중년들은 말한다. 자기들이 살았던 그때는 낭만이 있었다며 그런 것들이 사라진 지금 세상을 아쉬워한다.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 사람들은 인심이 각박하고 이기적이다고 생각한다. ‘트로트야말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지.’며 요즘 나오는 음악은 현란한 춤만 강조할 뿐 노래는 별거 없다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과거로부터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듯하다. 하지만 과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윤색되고 미화되기 십상이다. 옛날에도 사는 모습이 궁핍하면 인심은 메말랐고, 사람들은 원래 이기적이다.    


 

나이 든 이들은 자기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미화하느라 현재를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하며, 젊은이들은 잡히지 않는 현실과 미래보다는 옛것의 정취를 사랑하는 것으로 안식을 찾는다. 세상인심이 각박해지고 인정이 없어진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경쟁에 이겨야 세상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열심히 가르친 부모 세대의 책임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자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여유와 느림을 목말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경쟁을 강요받으며 성장했어도 부모가 원하는 삶의 기준대로 살기 어려운 현실을 알고 있는 그들은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이뻐해 주는 할머니의 정이 그리운가 보다. 나에게 할머니의 라이프를 좋아한다는 말은, 할머니의 따뜻함을 그리워한다는 말과 동일하게 다가왔다. 왠지 짠하다.     


옛것의 부활을 환호하고 과거의 아름다움만 기억하는 중년 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현재를 견디는 힘과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을 주지 못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에도 인색한 중년이 젊은 세대와 화해하는 길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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