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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Sep 05. 2023

새로운 일을 해도 괜찮아!

채원을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운동 잘하고 사회성 좋은 여학생으로, 지금은 예쁘고 자기 할 일 잘하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잘 자랐다. 최선을 다해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에 진학하여 열심히 공부했고, 알바를 하며 부모의 도움 없이도 자기 생활을 꾸려나갈 줄 알았다. 우리 집 아이와 10년 우정을 과시하는 채원이는 집에도 스스럼없이 놀러 와 아들과 쿠키를 구워 먹으며 놀다 돌아간 적도 있다. 베이킹을 하며 노는 남녀 친구 사이라니… 나만 생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할머니와 엄마 가져다드린다며 남은 쿠키를 주섬주섬 봉지에 담는 이 아이를 보면서 예쁘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자기 인생 사느라 바빠서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연락해 만나는 눈치고, 사귀는 이성이 있을 때는 서로 조심하느라 연락을 자제한다. 남사친 여사친의 개념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남녀가 유별하다고 강요받으며 자란 중년 아줌마의 마음에 아직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씩씩하던 이 젊은이는 요새 자기 인생에서 가장 주눅 들고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고등학교 이후로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 채원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중이다. 지난해는 처음이라 시간이 모자라서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시험을 치렀다. ‘제대로 준비해서 올해 잘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지난해의 낙방은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제 석 달 정도 시험을 남겨둔 지금, 이 아이는 초조하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많지만 정작 합격한 이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를 힘 빠지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2년간 임용고시를 함께 준비했던 가장 친한 친구가 교사의 꿈을 접고 다른 진로를 찾아갔다는 소식은 그녀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기의 꿈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길었고,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이 아이는 갑자기 깊은 슬럼프의 시기를 맞았다.

 


“학생들이 점점 줄어드는 이 시점에 채원이는 교사가 꼭 되고 싶어 한다니 어려운 선택이구나…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적은 없었대?”

 


뾰족한 답이 없는 질문을 아들에게 해보았다. 교사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진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니, 힘들더라도 열심히 준비해 임용고시를 잘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의 진로이니 자신이 가장 잘 알겠지.’

 


나도 저만한 나이에 진로 탐색 검사를 해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진로 탐색 검사는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간단했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직업을 A4용지에 모두 적어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나열한 직업 중에서 내가 좋아하거나 잘하는 분야를 찾아보고 그 직업이 내 적성에 맞을까를 생각해 보는 과정이었다. 기자, 교사, 변호사, 의사 등…내가 알고 있는 직업을 떠올리며 적어 보았지만, 막상 종이에 적을 수 있는 직업은 스무 개를 넘지 못했다. 세상에는 만 가지가 넘는 직업이 존재한다는데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직업을 스무 개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젊은이의 시야가 얼마나 좁으며, 경험은 일천한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의 나와 같지 않아서 어릴 때부터 진로 탐색을 시작한다. 부모는 자기 아이가 어떤 분야에 흥미를 보이는지 궁금해하고, 직업 체험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한다. 대학에 와서는 해외로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직장을 구하는 데 필요한 스펙 쌓느라 열심이다. 하지만 양질의 직장이 점점 줄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20대의 젊음이 직장을 구하는 준비만 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직업인이 되기 위한 준비가 이렇게 길어지는 사회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어릴 때 정해놓은 장래 희망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한 채 성인이 되는 경우는 내가 생각하는 진로 탐색의 또 다른 문제이다. 부모와 함께하는 진로 탐색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교사가 되기 위한 자기만의 로드맵을 그려서 발표하던 고등학생 채원을 처음 만났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아이는 자기가 계획해 놓은 로드맵대로 살아왔다. 그동안 달려온 시간에 쉼표는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되고 싶은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직업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나는 교사가 되고 싶은 것인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교사라는 직업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성향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한다면 교사가 되지 않아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열려 있다.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사로서 일을 시작했는데 교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매일 학교에 출근하는 일이 괴로워질 것이다. 장래 희망이던 직업에서는 현실에 존재하는 직업에서 맞닥뜨리는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나는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과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의 스타일이 다르다. 또 하는 일에 맞춰서 입어야 하는 옷은 따로 필요하다.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싶지만, 그 옷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고 업무상 입어야 하는 옷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 아니다. 모든 옷을 사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나는 항상 세 가지 스타일의 옷에서 공통된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진로를 탐색하는 것은 이와 비슷한 과정이 아닐까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그 일이 돈을 벌기 어려운 일이거나, 진입하기 위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내가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은 자아실현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과 적성에 맞는 일 사이의 절충지점을 찾아내는 과정도 필요하다.

 


“채원이는 운동도 잘하고 체력도 좋은 데다 사람 대하는 능력도 탁월하니 다른 일도 잘하지 않을까? 꿈을 미리부터 정해놓았다고 해서 그 일이 운명도 아니고...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해도 괜찮아. 원래 생각했던 일이 아니더라도 어느새 인생의 목적지에 가 있을 수도 있어. 누가 그러더라?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은 세우지도 말라고... 대신 하루하루를 열심히 알차게 사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아들의 친구 걱정에 괜한 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어코 나는 한마디를 보태고 만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지만, 오랫동안 자기 시야에 머물러 있다 보면 객관적 사고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오지랖을 한 번 부려보기로 했다.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미래를 고민하지만,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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