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을 쓰는 이** 작가는 내면의 긍정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요즘 매번 마감 직전에 글을 쥐어짜 내며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글쓰기의 재능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자기를 믿고 지지해 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을 빼먹지 않는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글쓰기에 관한 재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자기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확인해 본 것은 아니겠지만, 부모를 비롯하여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부터 대학교 선후배들까지 재능을 인정해 준 이들이 있었기에, 내면으로부터 자기의 재능을 부정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식사 자리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을 뿐,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엄마를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엄마는 내가 아는 한, 자녀에 대해 가장 관대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를 갖고 있는 여성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성인이 된 딸로부터 ‘역사 이래로 가장 멋진 여성‘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 있는 엄마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딸이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 강인한 내면을 갖고 자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했다는 그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겸손하지만 당당한 태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녀의 딸이 예고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온 집안이 반대했다. 대대로 유서 깊은(?) 집안의 자손이라는 아버지는 특히 반대가 심했다. 엄마는 딸을 카페로 불러내어 ‘지금부터 두 시간을 줄 테니 네가 예고에 왜 가야 하는지 엄마를 설득해 보라‘고 했다. 딸이 예고에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가 딸의 적극적인 설득에 엄마가 넘어갔기 때문인지,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는 딸의 재능이 특출난 것을 엄마가 알고 있어서였는지는 둘만이 알 일이다. 엄마가 자식의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 일을 잘하게 될지 아닐지에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중요한 사실은 엄마가 딸의 이야기를 깊이 듣고 ‘네 생각이 정말 그렇다니 그럼 한 번 해보라’고 믿어준 것에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속하는 오랜 시간 동안 딸의 선택에 의구심 섞인 언질을 한 적이 없으며, 조금의 불안한 심기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일단 선택한 길이니 알아서 열심히 하기를 빌어주는 수밖에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라고 의연하게 대꾸하는 엄마로 살았다. 이 다정한 모녀는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에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살고 있는 딸로, 점점 발전해 가는 딸을 한결같이 응원하는 엄마로 살고 있다. 자식을 대하는 자세도 관대하다 보니 타인에게도 한없이 너그럽다. 하지만 스스로는 절제하는 삶을 산다.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그런 단정한 삶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런 관대한 마음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일까. 처음부터 아이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부모로 살아본 이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무한한 인내심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또한 인생에서 나 말고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것들은 오래 살다 보면 터득할 수 있는 인생의 지혜 같은 것인데 경험하는 시간은 괴롭다.
부모가 아이에게 관대하지 못한 이유는 많다. 내 아이가 자기의 최선으로 노력하며 살지 않고 있다고 느낀 순간 부모는 아이를 닦달할 충분한 이유를 확보한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주관적인 마음이며 부모의 욕심이 개입하는 것이다.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심이 아이에게 전달되고 부모는 조급한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나보다 나은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드러나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을 뿐더러, 아이는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삶을 더 행복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들이 힘들어지는 순간이다. 어리거나 청소년기일 때 그들은 부모에 대항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회피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보낸다. 좀 더 적극적인 아이라 해도 사춘기에 걸맞은 소소한 반항으로 대항한다. 그렇게 지내다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독립할 나이가 되면 정서적으로 부모와 이별하는 청소년을 나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 잘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로 말이다. 성인이 되어도 부모와 잘 지내는 아이는 어릴 때 부모로부터 관대함을 배운 경우이다.
누구나 자기가 지닌 재능의 최대치를 발휘하고 살면 좋겠지만, 나와 함께 사는 동안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아이를 위해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는 어른이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떤 아이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치열한 순간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맞이할 수 있을 테니.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결국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여전히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 나랑 차 한잔하면서 같이 이야기할까?, 아니면 과일 먹으며 이야기하는 것은 어때?”
이** 작가는 부모님 집에 들르면 엄마와 밤새워 이야기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한다. 딸이 집에 오는 날이면 이 엄마는 서른이 훌쩍 넘은 딸과 새벽이 되도록 대화가 끊어지지 않아 요새 잠이 모자란다. 그 집에 엄마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자식은 큰딸 말고도 둘이나 더 있다. ‘우리 애들은 다 커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 엄마를 좋아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그 집 남편은 잘 모르는 신기한 엄마와 자식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