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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Sep 24. 2023

‘孝’는 어느덧 사라지고…

나는 전화하는 일에 부지런하지 못하다.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자주 하지 않아 벌어진 인생의 에피소드는 몇 편의 글을 써도 될 정도이다. 문자톡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답이 빠른 편이 아니다. 나는 휴대전화를 멀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전화에 힘들어하기는 남편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나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전화하는 남편은 나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그가 나에게 전화하거나 문자를 하는 날은 드물게 바쁜 일이 없어서 심심한 날이거나, 그게 아니면 급하게 전달할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도 남편에게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많은 전화에 시달리며 사는 남편에게 시어머니는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잠깐이라도 전화해라, 1분도 안 걸린다. 아무리 바빠도 화장실은 가지 않느냐, 그때 하면 되잖아’라는 핀잔 섞인 주문을 지치지 않고 하셨다. 요즘은 포기를 하셨는지 그런 하소연이 뜸해졌다. 서로가 편할 때 전화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정리를 하는 중인가 보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 번 전화하면 오랫동안 끊지 않는다는 것! 나와 전화해도 ‘용건만 간단히’를 실천하는 남편은 끊을 듯 말 듯 하면서 통화가 30분씩 계속되면 힘들어한다. 그래도 남편은 내색하지 않는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듣고 엄마말이 맞다면서 맞장구를 치는 남편은 내 기준에 보면 ‘효자’인 듯한데, 엄마가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아들은 아닌 것으로 보면 전통적인 기준의 ‘효자‘는 아닌 것도 같다. 

 


내 아버지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개의치 않고 줄기차게 전화하신다. 딸이 아버지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는 아버지의 불은 이제 전화 첫머리의 관용구처럼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내가 전화에 게으른 것은 순전히 나의 무심한 성격 탓이다. 필요한 전화는 잘하지만, 안부를 묻는 전화는 몇 마디의 인사를 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전화하는 횟수가 뜸해지는 것이 나의 심각한 문제라면 문제다. 내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것은 살아온 습관이나 성격으로만 봐도 익숙하지 않다. 가끔 나는 ‘아버지는 나의 타고난 성격을 아직도 모르시나?’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한 횟수로만 따지면 나는 불량한 자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모님을 뵈러 가끔 집에 가지만 아버지의 줄기찬 잔소리를 감당하기 힘들어지면 나는 종종 입을 닫는다. 딸의 효심을 의심하는 내용을 아버지는 나름의 유머를 섞어 무한반복 하신다. 듣는 척하지만, 실토하자면 나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딸의 죄책감을 유발하여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작전은 나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 50년이 훌쩍 넘도록 아버지의 딸로 살고 있지만 아버지는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내 아이를 키우는 일에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지만, 부모에게는 인내심이 모자란다. 나는 ‘효녀’가 아니다.


 

‘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항상 궁금했다. 어렸을 때, 병든 부모를 위해 한겨울 눈보라에 딸기를 구하러 나가는 버들이 이야기를 전래동화에서 읽고 생각했었다.


 ‘내가 암만 부모를 사랑해도 한겨울에 딸기라니... 나는 버들이가 아니야...’

 

요즘이야 겨울딸기가 흔하니 시대에 맞춰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마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늙고 병든 부모를 위해 너는 어디까지 할 수 있겠어?”

 

나는 이런 방식의 질문이 자식의 마음을 어지럽힌다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노상 되풀이하는 돌림노래와 다름이 없다. 부모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효’라고 가르쳤던 공자와 맹자까지 갈 것도 없다. ‘부생아신(父生我身)’ 하시고 ‘모국오신(母鞠吾身)’ 하오니…를 외우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돼서는 경전에 나온 ’효’를 실천하기 위해 힘쓰던 조상들이 나를 본다면 기가 막혀 무덤에서 뛰쳐나올지도 모르겠다. 가까이는 냉정해 보이는 딸이 ’효’를 다하지 않을까 만날 때마다 단도리하는 내 아버지도 있다.



“어쩌겠어… 나이들어 가면서 점점 고집만 세지고 자식들 말은 안 듣는 것을… 나는 늙으면 자식이 하는 말 잘 들어야지!“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드러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부모는 자식을 인내하며 키우지만, 자식도 부모를 참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참았던 자식도 있을테고, 성인이 되어서는 더 오래 참는 자식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일방적으로 참아야 유지되는 관계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위계가 분명한 사회에서 어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효’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서로의 말을 귀담아듣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노력하는 ‘사랑’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매일 아버지의 안부를 묻지는 않지만, 나의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심받고 싶지 않다. ‘효’는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 ‘사랑’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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