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밑천 큰딸

by popcicle


“어느 날 내가 기분이 좀 안 좋은데 ‘나 왜 우울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근데 금방 잊어버리고 또 일만 하고 살았어. 나는 왜 참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지?”



이제 완벽한 중년이 된 지영이는 자기가 아팠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25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고 만난 그녀는 머리카락이 없었다. 유방암으로 수술을 했고 그때는 방사선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다시 2년이 지나서 나는 지영이를 만났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자라서 이제 단발이 되었지만 힘은 없어 보였다. 몸이 약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부지런히 운동해야 한다고 한다. “언니, 내가 반의사가 다 됐어. 어디가 아픈지 말해봐 봐.” 지영이는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너무 오래 참기만 하고 살아서 힘들어도 그게 스트레스가 되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암에 걸리는 원인은 수백 가지가 있을 것인데 그녀는 자기의 예민한 기질과 항상 참고 배려하는 것을 우선하며 길러진 큰딸로서의 운명이 결합해서 병이 난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픈 것이 계기가 되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어떤 부분은 예민하며, 웬만하면 참는 것이 버릇인 큰딸로 자랐는데 이러다 나도 아플지 모르겠네?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영이가 큰딸이 아니라 둘째 딸로 태어나 살았다면 암에 걸리는 일은 없었을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암 유발 인자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어떤 순간에 그녀의 몸에 침투했을 테지. 나는 그녀가 암에 걸린 것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영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내내 그녀가 하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언니, 나는 우리 부모님의 살림 밑천 큰딸이라고 그러더라. 큰딸로 사랑 많이 받고 자랐는데 뭘 더 바래냐고...”



내가 자라던 무렵의 한국 사회는 큰딸의 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살림 밑천’이라고 규정짓곤 했다. 지영이도 그렇지만 나는 그 ‘살림 밑천’이다. 밑천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어떤 일을 하는 데 바탕이 되는 돈이나 물건, 기술, 재주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즉 나는 살림에 바탕이 되는 돈이나 물건, 기술, 재주에 준하는 첫 번째 자식인 셈이다. ‘나는 우리 가정의 살림에 바탕이 되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보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다.



그래도 내 부모님은 큰 딸인 나를 대놓고 살림 밑천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동생들이 많으니 그들을 돌보는 것이 내 차지가 될 때가 많았고, 집안일을 거드는 횟수와 강도는 나이가 한 살씩 늘어갈수록 많아졌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기회는 좀처럼 얻기 어려웠어서 내 욕구를 참는 것에 익숙했고, 부모님에게 뭘 해달라고 조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큰딸들이 대부분 경험했을 시간을 나도 똑같이 지나왔다. 내가 부모님에게 조르지 않았다고 해서 원하는 것이 없었을까.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봐 준 사람이 없었을 뿐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자랐을 뿐이다. 나는 부모님의 완벽한 살림 밑천이 되지는 못하고 뭔가 어정쩡한 상태로 어른이 되었다. 적당히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그렇다고 큰딸의 위치가 주는 부담감을 벗어버리지는 못했다. 부모님의 살림 밑천이라던 지영이는 어땠을까?



지영이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부모님이 당부하는 큰딸의 역할에 충실하여 항상 듬직했고, 자랄 때 동생들과는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는 시기에 태어난 큰딸은 부모를 대신한다는 주변 어른들의 말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딸 셋에 막내가 아들이었던 그 집에서 7살 터울인 막냇동생을 자신이 업어 키웠다고 하는 그녀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나는 동생들을 돌보며 같이 놀기는 했지만, 내가 동생을 키운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영이는 그야말로 집안의 기둥으로 살기를 자처하였나 보다. 그런 그녀가 중년이 되어 몸과 마음이 다 상할 만큼 부모·형제와 사이가 안 좋아졌다.



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로 몸과 마음이 다 지쳐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의 불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인 듯 지영이의 집안도 예외가 되지 못하였다.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업어 키웠다는 그 막냇동생의 모진 말이 그녀를 아프게 하고, 평생 자식 차별은 없을 것 같던 엄마가 아들을 보호하느라 딸들을 공격했다. 가족을 위해 항상 참고 배려하던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무시당하는 것을 느낀 그녀는 암에 걸렸을 때보다 이때가 몸이 더 많이 아팠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는 딸을 차별하며 키운다며, 내 부모는 안 그런 줄 알았더니 똑같다며 아낌없는 성토를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혈기 왕성하게 자식들 거느리며 오래도록 사실 것 같던 부모가 이제 늙어지셨다. 친구들을 만나도 이제는 늙어버린 부모 이야기가 주된 대화거리로 등장한다.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늙은 부모와 여전히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속상한 중년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팔순이 된 엄마에게 금반지를 선물하고 싶은데, 홀랑 며느리 줘버릴까 봐 사드리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딸에게 선물 받은 좋은 물건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팔지 말라고 했지만, 살던 집을 팔아서 아들에게 줘버리고, 남은 돈으로 조그마한 아파트를 구입해 불편하게 사시는 아버지 때문에 속상한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서 들었다. 그것만 속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릴 적 엄마에게 부당하게 혼나거나 감정적으로 무시당한 기억이 잊히지 않아 엄마를 보는 것이 힘들었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 매일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한마디 의논도 없이 배제되어 마음이 상해 이제는 형제를 만나지 않는다는 지영이도 거기에 있다.



중년여성들의 이야기는 도대체 왜 이렇게 산만하고 감정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뒤엉켜서 그들을 괴롭게 하는가. 늙어가는 부모에 대한 애틋함과 오랜 서운함이 섞인 양가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이 알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의 시작이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나’로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감정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던 욕구가 무슨 이유로든 좌절된 때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거기에 가부장 제도가 지배하던 시대를 살았던 부모의 자식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녀들은 내 뜻은 아니었으나 ‘살림 밑천’이 된 큰딸로, 집에서는 ‘오빠 밥 차려 줘야 하는’ 작은딸의 존재로 은연중에 길러졌다. 부모는 이제 중년이 되어버린 딸들과 감정적 대립을 마주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부모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지 영문을 모른다. 아들에게 때마다 조금씩 재산을 증여하는 어떤 엄마는 왜 딸이 세 번에 한 번은 전화를 받지 않는지 이유를 모른다.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아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어떤 의논도 양해도 구하지 않는 부모에게 화가 났다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는 그저 속 깊고 듬직한 내 딸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의 내 이야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주며, 늘 그렇듯 집안 대소사에 ‘큰딸로서’ 솔선수범하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늙은 부모와 중년의 딸은 그렇게 불통의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이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가족들과의 의사소통은 어릴 때부터 연습 되지 않는다면 성인이 된 이후 그것을 개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었다면 그것은 대부분 성인이 된 자녀가 다시 그 상황을 참는 것일 뿐이다.



지영이 엄마는 ‘우리 큰딸은 그런 것에 서운해하는 딸이 절대 아니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단호히 이야기했다고 한다.지영이는 나에게 ‘나는 서운한 내색을 해서는 안되는 배려심 많은 큰딸이니까’를 강요당하며 살았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인제 그만 서운해하렴. 어쩔 수 없는 옛 습관대로 사는 분들이라 그래.”



참고 배려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라고 조언하기에는 그마저도 몸에 밴 습관이라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런 딸이었으니.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만족할 만한 의사소통을 기대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아이들에게 나는 다른 부모가 될 수는 있다. 매일의 바쁜 삶에 치여 저녁마다 이야기 들어주고 안아줄 시간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토요일 아침이면, 딸과 둘이서만 살짝 스타벅스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앞에 놓고 세상 사는 이야기와 함께 딸의 고민을 들어보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풀이 죽어 보이는 어느 날은 뭐가 힘든지 물어봐 주고, 이제는 다 자랐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인 딸의 인생을 응원해 줄 수는 있다. 그래서 중년이 된 딸이 어느 날 세상 살기 싫고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 ‘네가 좀 더 참았어야지 그래야 두루두루 편안하지’ 하는 질책이 아니라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같은 편이 되어주는 그런 엄마는 되어야겠다.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 조금만 세심해진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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