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없는 거실

소통은 어린시절부터 (2)

by popcicle

한때 텔레비전 없는 거실이 유행하던 적이 있었다. 거실의 한쪽 벽면에는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책들이 채워져 있는 책장이 있고 가운데는 커다란 책상 겸 식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실의 모습을 다들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이 집은 텔레비전이 없는 아주 바람직한 집이네요.”


어느 집에 방문했을 때 이렇게 말하는 엄마들을 자주 보았었다. 부득이하게 거실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켜는 시간이 엄격하게 제한된 집들도 많았다.



퇴근해 집에 돌아와 무의식적으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작동할 때는 어김없이 아내의 폭풍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친구의 남편이 생각난다. 아이들은 방에서 공부하다가도 화장실을 오가거나, 물을 마신다는 핑계로 거실에 나와 서성거렸다. 런닝맨의 유재석을, 신서유기의 송민호를 쳐다보느라 거실에서 방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5분이 넘게 걸려 들어가곤 했다. 확실히 텔레비전은 아이들이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친구의 남편은 퇴근해 돌아온 집에서 마음 편하게 텔레비전을 켜지 못했고, 대신 아이들이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부모도 집에서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자연스럽게 집안에 면학 분위기가 조성된다고 하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의 남편은 거실에 앉아 평소에 잘 읽지 않는 책을 붙잡고 졸다가 잠이 드는 날이 꽤 있었다. 그래도 프로야구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집에서 가장 작은 방에 놓인 예전에 사용하던 조그마한 텔레비전을 켜고 혼자 야구를 보기도 했다. 그 생활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입시를 마치고 대학생이 된 지금. 아이들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려고 서성일 필요가 전혀 없다. 각자의 방에서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예능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본다. 아이들은 이제 방에서 나오고 싶어 하지 않으며 아빠는 이제 거실에서 자신 있게(!) 리모컨을 작동해도 된다. 하지만 가족이 모여서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서로 한마디씩 보태던 시간은 없다. 아이들이 어릴 때도 거실은 비어있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거실은 여전히 비어있다. ‘가정’이라는 유무형의 공간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게 되는 지점이다.



여기저기서 아빠들이 집에 있을 때 텔레비전을 무의식적으로 켜고 볼륨을 높이는 것에 대한 불만 섞인 이야기들을 듣고 난 후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와 남편은 ‘우리 집도 거실에서 텔레비전 켜는 것을 자제하고 면학 분위기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를 아이에게 솔직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다지 바라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아이가 원한다면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었던 아이의 대답은 의외로 시크했다.



“아빠도 집에 돌아오면 쉴 권리가 있잖아. 우리 집은 그냥 하던 대로 텔레비전을 마음대로 켜는 것이 좋겠어.”

아빠의 쉴 권리를 지적하며 인정해주는 아들의 대답은 그 누구보다도 남편을 기쁘게 만들었다. 종일 밖에서 일하고 퇴근한 아빠도 거실 소파에서 당당하게 프로야구를 볼 권리는 있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곳이 부모만을 위한 곳이 아니듯이 아이들만을 위한 곳도 아니다. 이것을 알지만 가족 구성원 모두의 입장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가정도 인간이 모여 살며 부딪치는 곳이라 서로 만족하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요구를 존중하고 때로는 타협의 기술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자라던 시대의 가정은 부모의 권리를 위해 자식들이 희생하는 분위기가 많았다면, 요즘의 가정은 자녀의 편의를 위해 부모가 희생을 감내하는 분위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것이 자녀가 정말 원하는 편의인지, 부모는 자발적으로 희생하나 그것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내 아버지의 식습관은 참으로 독특해서 항상 신선한 야채로 만든 반찬이 있어야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고 생각하셨다. 기름기 있는 육류를 좋아하지도 않으셨고, 냉장고에 머물다 밥상에 올라온 절임 밑반찬 같은 것은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우리 집의 식탁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 위주로 채워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닭을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 덕분에 닭으로 만든 요리는 거의 접해보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었다. 이제 곧 팔순이 되는 내 엄마는 매일 신선한 야채를 준비해야 하는 무척이나 번거로운 반찬 만들기를 지금도 하고 있다. 자발적인 희생이 첨가된 밥상에는 여전히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은 거의 없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과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을 번갈아 가면서라도 밥상에 올렸다면 어땠을까를 가끔 생각해 본다.



집안을 적막한 면학 분위기로 만드는 대신 나는 차라리 어느 시간은 가족이 같이 모여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를 강력히 권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입시를 위해 전력으로 달리기를 하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거실에 드러누워 빈둥거리며 ‘아는 형님’ 정도는 봐줘야 한다. ‘강호동’과 ‘이수근’의 티키타카를 보며 엄마 아빠와 같이 낄낄대는 것이 학업의 피곤함을 잠깐이라도 날려버리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가정이 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휴식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직장에서의 고단함과 함께 집에 왔지만, 내 집에 들어온 순간 헐렁한 옷차림으로 프로야구를 시청하는 정도의 권리는 누려야 한다. ‘가정’은 구성원 모두가 존중받고 그곳에서 온전한 편안함을 느껴야 가정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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