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는 대체로 우리 사회처럼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회자하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과 부를 거머쥔 사람들은 거의 재능이 뛰어나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단 자기 능력을 사회에서 증명해 내고 나면 그들은 사회의 새로운 계층에 편입되어 ‘실력이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구축하는 일에 열심을 보인다.
아무것도 없이 맨주먹에서 시작해 부를 일군 자수성가형 사람은 자신의 끝없는 노력이 현재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므로 개인의 실력과 노력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만약 그 사람에게 누군가 ‘당신의 성공에는 분명히 행운이 작용했을 거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기의 노력이 폄훼당하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슷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비슷한 강도의 노력을 기울이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당장 내 주변만 보더라도 재능도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다.
대입 수능 정시에서 대학의 이름을 바꾸는 점수의 차이는 전체점수의 1점도 되지 않는다. 비슷한 성적을 받고 같은 학교에 지원한 학생들을 점수대로 줄을 세워보면 소수점 두 번째 자리나 심하면 세 번째 자리에서 당락의 희비가 갈리기도 한다. 1점을 더 받은 학생이 그렇지 못한 학생보다 실력이 더 좋은가? 노력을 더 많이 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누구도 ‘그렇다’라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당시 지원한 학생들의 숫자나 점수분포가 당락에 영향을 미치는 큰 변수가 될 것이고, 그 변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운‘의 영역에 해당한다. 어쩌면 운(행운)이 인생의 성취에 생각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사람은 재능도 있고 비슷하게 노력을 기울이지만 시의적절한 때를 만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재능과 열심히 하려는 노력을 타고난 것만으로도 ‘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성장한 환경을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데 재능과 노력을 타고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모든 것이 운칠기삼입니다.”
한 기업에 오랫동안 재직하고 있는 고위급 임원과 이야기하는 중에 나온 말이다. 업무능력도 탁월하고 인간관계도 좋은 사람이어서 회사에서 인정받아 임원으로 승진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나는 이 단어가 주는 의미를 도박꾼이 크게 한몫 벌어보기 위해 노름판을 기웃거릴 때 하는 말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도박은 운이 따라주어야 하는 거니까.’
하지만 기업에서 30년을 성실하게 능력대로 살았던 사람에게도 ‘운칠기삼’은 꼭 필요한 단어였다. 그는 임원들의 실력은 다 똑같다고 했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한 방 날릴 수 있는 자신의 무기, 즉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일 년이면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며, 아직 자기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하였다.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운’이 필요하다. 그것도 7대 3의 비율로.
“사람의 가치는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1930년대에 미국의 백인 남성으로 태어나는 로또에 당첨됐다. 운이 좋았다.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은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많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워런 버핏은 자신의 성공을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했다. ‘운이 좋았다‘라는 말은 자기 능력과 성공에 진심으로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