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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Sep 07. 2016

외로움을 견딘다는 것 <셰임, 2011>

 이 영화를 무척 자주 봤고 그래서 처음에 내가 2번 이상 본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 영화에 대한 글을 가장 먼저 쓰고 싶었다. 하지만 뭘 써야 할 지가 막막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브랜든이 한참을 나온다. 그가 마침내 일어나 커튼을 젖히자마자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 사이로 타이틀이 등장한다. Shame. 영화를 여러 번 봤지만, 볼 때마다 이 영화의 제목인 Shame이 어떤 의미인지 잘 와 닿지가 않았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창피함일까?


 사람은 외롭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하다.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어쩐지 어린애 같고, 그 사실을 밖으로 표출하면 유약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괜히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다. 순간순간 감정을 속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찾는다.

 브랜든 역시 그런 보통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외롭지만 그걸 들키기 싫은 사람.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서 그는 의미 없는 섹스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그런 브랜든이 이해가 되지 않고,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종종 혼자 집에 와서 술을 마시곤 하지 않는가? 때로는 컵라면 하나에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기도한다. 그게 누군가에게 외롭다고 털어 놓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서 잠시라도 스스로가 혼자라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한다. 겉으로는 쿨 한 척 하면서. 그게 어른이니까. 어른은 그래야 하니까. 그 외로움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브랜든에게는 섹스였을 뿐이다. 내게 소주 한 병이 그런 것처럼.


 꼰대에서 탈피하려면 먼저 내 자신이 꼰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외로움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난 사실 내가 꽤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브랜든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꾸 의미 없는 섹스에 탐닉하는 브랜든을 보면서 어떤 연민을 느꼈던 것은, 사실 나에게도 브랜든과 같은, 채울 수 없는 깊은 고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내가 외로운 것은, 내가 혼자인 것은 내 자신이 너무 별로고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타인은 그저 타인이기 때문에 나만큼 나의 마음에 예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단순한 사실인데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면 한없이 괴로워지고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우울함에 매몰되어 버리면, 소중한 것들 마저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물론 그 소중함이라는 것도 그저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어떤 것에 애정을 쏟으면서, 그것이 소중하다고 믿으면서, 그 순간 내 자신이 행복하다고 나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삶에는 딱히 살아야 하는 거창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죽을 수 없으니까 살아야 하는, 그런게 산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굳이 행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불행해도 괜찮다. 때로 나를 망쳐도 괜찮다. 그래도 내일은 오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내일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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