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정 Sep 13. 2016

운명적 사랑이란 없다 <500일의 썸머, 2009>

 브런치를 보다 보니까 사람들이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너무 오랫동안 관심에서 멀어진 나머지 아예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한번 고민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나서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때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렴풋이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라는 결말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요즘엔 사랑이라던가 연애라던가 하는 게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연인들을 봐도 마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다. 설레는 사랑 이야기는 나와는 이미 멀어진 얘기 같다. 사랑이란 뭘까. 나도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녀 사이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결혼이라고 해봤자 제도에 불과한 것이고, 거기엔 약속만 있을 뿐 사랑은 없는거라고 생각했다. 있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건 사라지고 없다고 믿었다. 사랑이 있는 결혼이 가능하다면 왜 그것이 얘깃거리가 되고 예술의 소개가 되겠느냐고 냉소했다.

 영화 첫 부분 나레이션에서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 입니다." 라는 대사가 나온다. 수많은 로맨스에 학습된 나머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라고 하면 어떤 정형화된 형태를 떠올리게 된다. 톰도 그랬다. 영원한 사랑, 운명같은 사랑이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썸머가 바로 그 운명이라고 믿었다. 톰은 사랑을 통해 자신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이 톰에게는 자신의 꿈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썸머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이 그녀를 운명의 상대라고 믿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이 생각난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내 100%의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나도 톰처럼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때가 아주 잠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을 나의 100%의 사람이라고 정의해야 할까? 사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순간엔 나의 100%의 사람이었다. 우주의 모든 이유를 긁어모아서 그 사람이 내 운명이라고 확신했었다. 그의 숨쉬는 소리까지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


 결국 완벽한 운명의 상대라는 건 허상에 불과한 것 같다. 무수히 스쳐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 그저 나의 반복되는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내 사랑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그걸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때문에 나 자신의 불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외면해 버릴 때가 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마련해 놓은 것 처럼 완벽한 나의 선택이 잘못 되었다는 걸, 그래서 내가 지금 그 선택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저 사람은 내 운명이라고, 계속해서 되뇌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사랑 얘기를 비웃으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처럼 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은 것부터, 가령 오늘 점심에 뭘 먹을지 이런 것부터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계속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선택지가 주어지든 주저없이 내가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톰이 그랬던 것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원하던 공부를 시작하고......그러다보면 어느 한 순간 내가 했던 선택이 옳았다고 믿기 위해 애써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이미 행복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이야말로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동화 그 자체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외로움을 견딘다는 것 <셰임, 20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