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적당한 불편과 부대끼며 살아가기
저 사람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 어디에나 그런 사람 하나쯤은 꼭 있다. 누구나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너도? 나도! 하면서 소소한 공감과 위로를 나눌 수라도 있으니.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듯한데, 유독 내 눈에만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니 불편함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다. 별 거 아닌 걸로 트집 잡는 속 좁은 인간처럼 비칠까, 어디 한 군데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도 없으니 답답함만 커져간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하는 사람들 하고만 지내면 얼마나 좋으련만. 생김새도, 타고난 천성도 제각각인 사람들 가운데서 입맛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지낸 적은 아무리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봐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어떤 식으로든 불편한 누군가와 함께 있던 적이 대부분이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같은 반 안에서도 잘 맞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어울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다른 반이 되면, 다른 학교로 진학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요새는 SNS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정하고 끈질기게 괴롭히는 매우 해로운 악질들은 일정 비율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차라리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히려 간단하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들로부터는 있는 힘껏 떨쳐내고 멀어지는 것이 최선이니까.
불편하지만 그리 해롭지 않은 상대를 대하는 건 까다롭다. 그저 볼 때마다 얄밉거나 마음이 껄끄럽다는 정도로는 밥벌이가 달린 일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칫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기분만 잡치기 일쑤다.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늪에서 질척거리며, 하루하루 신경을 살살 긁는 불편함에 시달리다가 외부적 요인으로 눈엣가시와 멀어지는 행운을 거머쥘 때도 있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얼룩덜룩한 블랙헤드 속 피지를 깔끔하게 뽑아낼 때의 만족과 비견될 수 있을 만큼의 개운함 정도랄까.
살살 긁어대던 눈엣가시가 사라져 속 시원한 것도 잠시뿐, 비어버린 모공에 다시 피지가 차오르듯이, 눈엣가시가 빠진 자리엔 그동안 눈엣가시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뾰족함들이 찔러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또라이 보존법칙이라고도 부르는 그 법칙처럼 말이다.
이쯤 되면 눈엣가시를 뽑아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알게 된다. 지나온 세월에도 여전히 깎여나가지 않는 마음속 모난 구석을 건드리는 누군가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괴로운 건 결국 나였다.
무작정 떠날 수 없으니, 눈엣가시와 적당히 불편한 동거를 하는 방법을 익히는 방향으로 선회해 본다. 조금이라도 덜 부딪치기 위해 슬쩍 눈도 감아보고, 밉상짓을 하는 그 나름의 이유도 있을 거라 짐작해 본다.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다 보면 뾰족하게 찔러오는 눈엣가시로부터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안전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감각이 생겨난다. 굳이 날을 세우지 않아도, 그럭저럭 하루를 넘기는 법도 익히게 된다. 감사함이 강물같이 흘러넘치는 하루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정도로.
조금만 앉아 있어도 쑤시는 허리와 어깨, 점점 침침해지는 눈. 야금야금 늘어가기만 하는 군살까지. 이젠 외부의 눈엣가시뿐만 아니라 몸에도 깃든 적당한 불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라는 신호를 몸에서 보내온다.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의사의 딱딱한 말에 발끈하다가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찾아오는 몸의 노화는 피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음을 받아들인다. 그저 노화속도를 늦추는 것이 유일한 대안일 뿐. 요즘 저속노화가 뜨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거다.
조금씩 삐걱대는 내 몸을 원망하며 예전으로 되돌리려는 억지를 부리기보다는 조금씩 습관을 바꾸고, 적당히 달래가면서, 데리고 살아갈 준비를 해야겠다. 눈엣가시를 뽑아내고야 말겠다고 아등바등 구는 대신 적당히 불편한 동거를 택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