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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Oct 24. 2021

멀티 메타버스 안경

여행자의 삶

매년 이맘때 동네 주민들을 위해 개설하는 아크릴 회화 초보자반에 신입회원이 등록했다. 기존 회원들에게 물어보니, Netflix 영화 촬영지에 관광차 들렀다가 아예 그냥 눌러앉은 친구라고 다. 북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온 친구 같은 데, 눈매가 선하고 코가 아주 큰 친구였다.


나는 그가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업시간이면 항상 먼저 와서 커다란 통유리창앞에 자리를 잡는다. 통유리창앞은 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나는 그래서 그를 Ocean Blue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부른다. 그도 이렇게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 했다. 오션블루는 수업 시간이 없는 날에는 가끔 작업실에 들러 커피를 마신다. 그는 에디오피아 모모라 커피를 특히 좋아했는데, 시큼한 과일 향이 진하게 우러나오는 드립커피를 마치 다도를 즐기듯이 천천히 오랫동안 음미하면서 마신다. 그가 다른 이들과 함께 바다를 마시는 것은 아닌가하는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신입회원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는 바다 풍경 그림에서는 뭔가 한국의 바다에서는 볼 수 없는 북유럽의 차가운 바다 기운의 색채가 담기고 있었다. 그는 가끔 캔버스를 집에 가져가서 디테일 작업을 해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몇 겹의 두께로 덧대어 칠해와서는 화실에서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치 하나의 그림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그리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다양한 감성이 표출될 수 있지? 하고 궁금해하던 차에, 크리틱을 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그에게 그림의 의도에 관해 물어보았다. 아직도 비대면이 선호되는 상황이 지속되었으므로, 간단한 질문도 나를 대신해서 멍텅구리 로봇 퍼피가 다. 물론 멍텅구리라도 번역 한 가지만은 끝내주게 하는 로봇이었다. 이번에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서 그 나라의 언어로 잘 전달했을 것이다.


그가 질문에 관해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안경은 평범하게 보였으나 그는 안경을 통하여 여럿의 친구들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안경을 통해 만난 바닷가에 사는 다양한 친구들과의 우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라고 한다.


오션블루는 여행을 좋아해서 한곳에 오래 머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 장소를 기억하고 싶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 장르를 선택하여 그 장소에 맞는 한가지 예술작업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한 예술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그곳이 마음에 들면 잠시 머물면서 또 다른 예술 장르를 선택하여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이곳 한국에서는 우연히 아크릴화에 꽂혀서 작업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작업과는 달리 감정이 너무 겹겹이 올라와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고도 말했다. 지난 거주지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음악 작업을 진행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여러 다양한 감성을 시간 축에 나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한 화폭에 여러 감정과 캐릭터를 담으려 하니 어려워서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한다고도 전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업을 하는 친구라! 나는 오션 블루가 귀엽기도 하고 무모하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30년 넘게 아크릴화 한 장르만을 탐구하면서도 아직 내 정체성을 완벽히 표현하지 못하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무슨 자신감으로 쉽게 장르를 넘나들려 하고있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그림에서 그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이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느껴질 때, 그가 자신이 사용하지 않는 이와 비슷한 안경이 집에 남아있는데 살 의향은 있냐고 물어왔다. 마침 그림 작업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레슨 비용도 추가로 필요한 때라 안경을 적당한 가격에 넘기겠다고 제안해 왔다.


전 세계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업을 할 수 있는 안경이라고 하니 솔직히 솔깃했다. 물론 안경을 단품으로 구매한다고 바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고, 메타 버스 패키지를 따로 가입해야 혼합세계로의 접속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번 달에 모집된 회원이 몇 명은 더 있으니, 잠깐은 메타버스 패키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거래는 성사됐다. 두 달 치 교육비와 메타버스 안경을 맞교환하기로 했다. 나도 이제 곧 가상에서 함께 예술작업을 진행할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00세가 되어서 만난 친구와 함께 표현하는 나의 아크릴화 작업이 어떻게 변모할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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