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박 무전여행
여름에는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던 곳이었다.
그곳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번 겨울 여행을 그곳으로 감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방문한 그곳에는 내가 생각했던 자연의 평화로움과 낭만은 찾아볼 수 없었고,
거친 바람과 모래, 그리고 한없이 낯선 추위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연이 물어온다. "너는 왜 이곳으로 왔니?"
나는 대답한다. "여름에 왔을 때 무지 좋더라고. 그래서 그때 감성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왔지!"
"그때의 모습은 내 본 모습은 아니야!"라고 일갈하며 자연이는 차가운 바람을 일으켜 구름을 움직이고, 그 구름으로 햇볕을 가려 온 세상을 잿빛으로 덮어버렸다.
그랬다. 이번 서산과 태안반도, 만리포 여행은 자연의 다른 면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자연의 두려운 면을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던 그런 시간이었다. 내가 평소에 마주한 자연의 모습은 산책 길에서 만나는 작은 조약돌과 들풀처럼 소소한 풍요로움과 안락함을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자연은 TV 화면을 켜면 언제나 호출할 수 있는 위대하고 경이롭고 친절한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렇게나 쉽고 편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콘크리트로 벽을 치고 그 안에 숨어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웠다. 자연이 아무리 매서운 강풍을 만들어내어도 콘크리트 벽 안쪽에 있는 인간은 그 울림을 느끼지 조차 못한다. 그저 조그맣게 뚫린 창문을 통해 TV를 보듯 자연 강풍이 만들어 내는 구름 풍광을 아름답게 감상할 따름이다.
SUV 차량 뒤 칸에 호기롭게 자리를 펴고 누워 바람 소리를 듣고, 구름을 보며, 차량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은 더도 덜도 아닌 두려움, 바로 두려운 감정이었다. 차량 밖에 보이는 소나무의 꺾어질 듯한 흔들거림과 해변 위에 보이는 거대한 구름의 빠른 이동, 그리고 세찬 파도 소리, 바람이 만들어내는 모래 조각의 스침이 자연의 본래 모습이었음을 알려준다.
자연은 결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본 모습으로 묵묵히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인간이 그런 자연에 이렇다 저렇다 요구할 권리도 없고, 그런 인간의 요구를 신경 쓸 만큼 자연은 한가하지도 않다. 우리가 자연을 느낀답시며 찬양하는 것이 실상은 인간이 만들어 낸 보호막에 대한 찬양은 아니었을지란 생각에 자연이란 것을 다시금 보게 된다.
그날은 영하 11도에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고, 파도가 너무 강해서 해변에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지역에 주거하는 분에게는 일상적인 하루이었을지언정, 나와 같은 관광객에게는 아마도 낯선 자연의 모습을 보고 경외감을 진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었지 싶다.
차박 캠핑을 계획하고 같지만, 너무도 추워서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밤에는 나 혼자 고립될 것만 같아서 차박 캠핑을 포기하고 태안에 있는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서관에 자리 잡고 드디어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밖은 아무리 추워도 여기는 따뜻한 온기가 있다. 인터넷도 있고,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책상도 있고 더욱이 옆 테이블에는 책을 읽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게 일상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사람 사는 곳의 모습은 이래야 정상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평범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연을 피상적으로밖에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연 안에 잠시 기생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지배한다는 오만한 생각 속에서 자연을 동급으로, 혹은 만나고 싶으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자연에서 선물이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선물이라함은 무엇인가 의도하지 않게 주어지는 것일텐데, 이번 여행에서 얻은 선물은 무엇이었는 지 곰곰히 정리해본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찾아낸 첫 번째 선물은 '두려움의 발견'이다. 자연은 한없이 두려운 존재고, 인간은 콘크리트 벽에 뚫린 조그만 창문을 통해서 자연을 감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연에 들어가서 스스로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느낄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번 여행의 경우, 심한 콧물과 두통의 후유증 기억만이 남아 있지만,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 나름 무게 있는 여행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찾아낸 여행의 선물은 자연으로 가야 맛볼 수 있는 '자연의 맛'이다. 서산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20분 넘게 운전하여 찾아낸 게국지 맛집에서는 할머니가 오랜 시간 정성으로 만들어 낸 자연의 숙성된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릇 하나에 호박이 그대로, 묵은지가 그대로 참깨가 그대로의 모습으로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이 험악하기 그지 없지만, 자연으로 가야 제대로 된 현지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의 매서움을 느낀 자에게만 주는 선물은 아닐런지...
마지막 선물은 해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아닐까? 무계획으로 떠난 이번 차박 여행은 문제투성이 여행이었다. 계획없이 그저 힐링을 위해 떠난 여행이었기에 다녀와서는 아직도 완벽한 피곤을 경험하고 있다. 누구에게 추천하라고? 어림없다. 이런 여행은 고스란히 고생스러운 여행이기에, 추천할 꺼리 자체가 없다.
하지만 뭐랄까! 말은 못하지만 가슴 속에는 해냈다는 뿌듯함이 있다. 나름의 전국 일주가 눈 앞에 펼쳐진다. 하지 않고 후회하는 일보다는 하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낫다는 이야기가 딱 이런 경우다. 안사람에게는 자랑할거리는 없지만 괜히 으스대기도 한다. 나중에 한 번 애들데리고 같이 가보자고! 물론 안사람은 고개를 절래절래하지만.
다음 번의 무계획 여행도 벌써부터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는 서산이 아니라 충청북도의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의 산행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