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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Jan 21. 2022

피콜로 잔혹사

[음악듣고 소설쓰기]


"그그그그그 윙~~"


그라인더에서 갈려 나가는 원두는 평소보다 더 건조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찌잉~왕 하는 소리가 나며 진한 에스프레소가 찢어지듯 흘러내린다. 스물둘 스물셋 스물넷, 멈춰 세우고 잔을 들어 향을 맡아본다. 이제 스티밍한 우유를 넣으면 커피의 진한 킥이 제대로 오겠다 싶을 정도의 피콜로가 완성된다.


그는 완성된 피콜로의 씁쓸한 맛을 음미하며, 지난 일을 곱씹어본다.

분명 그녀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꼬일 때로 꼬인 상황에서 그녀가 급하게 피콜로를 주문했고, 그 주문을 받은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새하얀 피부에 길고 검은 옷을 즐겨 입는, 알고 보니 급하게 일자리를 구해서 이 지역으로 출퇴근하는 헤어디자이너였다.


그가 서울을 떠나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번잡하지 않은 환경에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며, 커피의 진정성을 전달하고, 나름의 독보적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오랜 외국 생활 때문이었는지, 성격 때문이었는지, 그가 만드는 커피에 대한 진정성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그날 커피의 맛과 향을 표현하는 몇 안 되는 손님이었다.


커피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커피 그라인더의 분쇄도를 처음부터 새로 맞추는 것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건조하고 차가운 날이었고, 메뉴판에도 없는 피콜로를 주문하는 바람에, 아까운 커피를 계속 버려가며 피콜로만을 위한 그라인더 분쇄도를 새로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날도 카페 의자에 앉기보다는 주문대 옆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주문한 피콜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문대에는 이미 카페 손님들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그는 그라인더 앞에서 분쇄도를 맞추기 위해 다시 한번 집중한다. 분명히 끈덕끈덕한 커피 원액이 추출되어야 하는데 너무 묽었다. 커피 원두 용량이 너무 적어서 그런가? 커피 분쇄를 너무 굵게 해서 그런가? 추출 시간을 늘려야 하나? 온갖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주문대에 기대고 서 있던 그녀는 어느새 주문한 피콜로는 개의치 않고 미용실 지인인 듯한 손님과 반갑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 커피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단지 여기 주인이 손이 조금 느린 것 같아서, 바쁜 시간에 오면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호호"


"주문한 커피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버리는 경우도 생기더라고요!"


"저도 여기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주인이 그라인더에 커피 원두를 넣고 이렇게 갈아보고 저렇게도 갈아보고, 아주 완벽히 실험하고 있네요! 참나!" "피콜로 한 잔 마시고 다시 일터로 가야 하는데, 받자마자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오늘은 괜한 메뉴를 주문했나 봐요!"


"피콜로요? 그게 뭐죠? 새로 나온 메뉴인가 봐요!"


"아니요. 피콜로는 호주나 이탈리아에서는 흔한 커피 메뉴에요. 라떼보다 우유를 더 적게 넣고 더 진하게 마시는 커피죠. 제 최애 메뉴이라서 오늘 이 집 사장님에게 수수께끼처럼 문제를 냈는데, 제대로 풀지 모르겠어요."


"저는 일터 근처에 어느 정도 카페를 다니다가 사장님과 익숙해지면 피콜로를 꼭 주문하거든요."


"그리고 피콜로 문제를 못 풀면, 가차 없이 다른 카페로 옮겨요. 이 지역이 외곽지역이라 근처에 카페가 이곳 한 군데라는 것이 아쉽지만, 사장님이 문제를 잘 풀기를 기대해야죠. 별수 없잖아요?" 그녀는 사장님이 혹시라도 들을까 봐 조용조용 말했다.


그 옆에 줄 서 있던 낯선 손님도 되물었다.


"피콜로요?" "이 집이 그 피콜로를 그렇게 맛있게 한다고요?"


"에?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요!"


그 낯선 손님은 같이 왔던 일행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피콜로? 피콜로?" "우리 그거 한 번 시켜볼까?" 점점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져가며 기다리던 손님들이 '피콜로, 피콜로'를 조용히 읊조렸다.


갑자기 카페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그라인더에 갇혀있던 의 신경은 잠시 여유를 찾아,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는 곧 손님들이 웅성거렸던 이유가 바로 '피콜로'였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이를 어쩌지? 분쇄도를 아직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는데..."


"손님들이 이렇게나 많이 기다리시니 제발 빨리 제대로 된 피콜로를 만들어야겠다." 그는 마음속으로 피콜로 주문을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도, 최적의 조합으로 동네 손님들에게 새로운 메뉴를 성공적으로 선보이겠다는 의지가 생기는 것을 느낀다.


분쇄도도 이제 적당한 것 같았고, 추출된 원두도 꽤나 꾸덕꾸덕했다. 그리고 라떼보다는 조금 얇게 그리고 플랫 화이트보다는 조금 더 두껍게 우유 거품을 만들어 올리면 피콜로가 완성이다. 시간이 꽤나 지나갔으므로, 뒤쪽 줄에 서 있던 손님들은 이미 떠나갈 줄 알았는데, 매장에 들어온 대부분의 손님이 아직 줄을 서서 피콜로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문하신 피콜로 나왔습니다.!"


이제 평가의 시간이다. 수수께기 같았던 피콜로 만들기에 사장님의 자존심을 걸었다.


그녀가 잔을 받아든 순간 매장 안의 모든 손님의 시선은 그녀의 입에 맞춰졌다. 그녀가 "음~~~"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대성공인 것이다. 그가 진정성있 는 커피 장인이란 사실도 이 지역 주민에게 공고히 알릴 좋은 기회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으음?" 하는 애매한 소리가 났고 고개는 왼쪽으로 45도 기울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맛을 평가했고, 다음에는 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킥이 오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녀는 솔직히 커피 감정가도 아니었고,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색과 빨간 립스틱의 입술, 그리고 긴 머릿결에 검은색 상의가 알지 못할 권위를 그녀에게 부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건 아닌데"라고 말하더라도 사장님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쌓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 순간 매장 분위기는 그녀의 한 마디에 모든 에너지가 응축되어, 그녀의 반응에 따라 사장님의 평판이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분위기로 흘렀다.


"사장님!! 이건 대박인데요!!"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피콜로 같아요!"


"전 바빠서 가요. 또 올게요~~"


그녀는 피콜로 한 모금만 마신 후, 딱 이렇게 세 마디 말만 남긴 채 카페를 급하게 떠났다.


사장님을 포함하여 매장 안의 모든 손님은 이 순간만을 기다린 듯 잠시 조용한 정적이 흘렀고, 잠시의 정적 후에 오랫동안 기다리던 손님들은 하나둘씩 피콜로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손님이 드문 지역에서 피콜로는 생소한 음료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사장님도 메뉴에 넣지도 않은 것이고, 피콜로로 진정성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런데 여기 손님들이 피콜로를 주문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피콜로 만들기가 까다롭지는 않았지만 피콜로 마시는 문화가 아직 생소한 이곳 손님들은 피콜로 잔이 빠르게 회전해야 더욱 많은 사람이 피콜로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 피콜로 주문은 넘쳐났고, 생소한 피콜로의 맛에 흠뻑 빠진 지역 주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피콜로 잔을 내어놓지 않는 바람에 한 잔을 맛보려면 20~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고야 말았지만, 그 날은 사장님의 커피에 대한 진정성을 지역 주민에게 강하게 각인시킨 날이 되었다.


그날은 사장님에게도 쉴 틈도 없이 피콜로를 만들고 잔을 설거지하느라 잔혹한 날이었고, 지역 주민들도 평소보다 진한 카페인이 들어가 음료를 마셔대서 새벽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한 잔혹한 날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이후로 카페에 찾아오지 않았다. 피콜로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직장을 다른 곳으로 급하게 옮긴 탓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피콜로가 카페의 대표 메뉴로 등극하는 데 일조를 한 것은 분명했다.


사장님은 메뉴판에 피콜로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피콜로는 부드러움 목 넘김 속에 날카로운 킥을 숨긴, 그러나 한 번 중독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잔혹한 면을 지닌 음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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