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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Feb 17. 2022

[에세이] 부부싸움 잔혹사?

부부싸움은 언제나 영감의 원천입니다.

서부전선에는 먼지가 만들어낸 기분 나쁜 안개와 함께 겨울비가 주적거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새벽 찬 공기는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긴 하지만, 어제의 십자 포화로 견고하게 구축했다고 생각했던 가장의 보루와 권위의 방어선은 여기저기 뚫린 채 보수공사를 기다리고 있다.


전선은 어디까지 밀릴 것인가? 어느 선까지 내주어야 하나! 이제 더 밀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지없이 밀어붙이는 전력에 전투는 점점 힘에 부치고, 한결 여유롭던 보급로가 막히면서 이제는 악에 받친 말 폭탄도 심심치 않게 날아드는 형국이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장에서 진지를 부수고, 영역을 파괴하고 다시 복구하고 구축하는 비용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미 내 것 같은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것들이 전장을 치를 때마다 협상의 테이블에 오르내린다. 이 끝도 없는 전장은 각자의 것을 지키려는 몸부림이기도 하지만, 지난 전장에서 빼앗겼던 기억에 대한 울분을 토하는 장으로 전선이 확대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쏟아지는 말 폭탄의 수위가 더 강해질수록 폭탄을 맞고 난 후, 겉치레, 체면, 권위, 전통, 의례 그러려니 하는 외피들은 여지없이 날아 가버린다. 내 것처럼 보였으나,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이 날아가는 것이다. 이번 전장에서처럼 마지막 보루만 남게 되면 진정으로 나만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안개 속에 어렴풋이 형체가 보이기도 한다.


나는 무엇을 지키기 위하여 이렇게까지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가?


내 시간 (?) 원래 내 것이 맞나? 어렵게 확보한 새벽 6시부터 8시까지도 요즘은 공격대상이다. 건조대 위의 빨래 개키기, 진공청소기로 거실 청소하기, 강아지 아침 산책시키기, 쓰레기통 비우기 등의 무기가 난무한다. 이쪽에서는 아침상 차리기, 전화 바로 받기, 홈쇼핑 줄이기 등의 재래식 무기로 반격하지만, '요즘에'라는 최신 방어막에 여지없이 요격되고 만다.


'진짜 안 맞아!'와 '정말 못 맞추겠다!'라는 핵폭탄급 벙커 버스터는 '무엇이 그렇게 다르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양측의 휴전 협상 테이블에 올릴 문구를 고민하게 한다. 상대 진영의 "교과서에 나온 대로 가르치려 하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관심 두고 존중하고!", "눈치껏 말하고!", "모든 사람이 찾는 그런 사람이 되고!" 등의 휴전 문서에 올라온 문구들은 "우리는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도와주려 했구나~ 그것이 문제였어!"라는 선지자들의 고전 문서에 각인된 비밀을 다시금 비춰보게 한다.


내 서재 (?) 원래 내 것이 맞나? 이 벙커는 오롯이 나를 위해 구축한 것이 맞다. 이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몇 년을 투자했던가? 이 벙커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책, 장식장 그리고 오디오를 가득 비축해 놓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사색한다. 이 공간은 오롯이 나의 것으로 생각했다.


가족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나만의 것을 쌓아가고, 내가 익숙하고 편안한 감정을 즐기며 나만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공간으로 성장해 나갈 즈음에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이 작은 공간에도 파편이 튀기 시작했다.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반갑게 인사라도 해야지!", "사람이 집에서 나갈 땐, 얼굴이라도 보여줘!", "사람이 집에 있을 땐, 거실에서 TV도 보고 이야기도 좀 해야지!, 그 방안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고 뭐 하는 거야!" 등 각개 전투의 기세가 쎄~다. 이 공간도 결국은 내 것이 아니었나?


내 시간, 내 공간,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나에게 익숙한 것은 무엇이고,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과연 내 것은 무엇이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번 주 아티스트 웨이의 과제다. 편안하게 쓸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련의 내부 전투를 통해서 원래 내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다. 내 시간, 내 서재, 내 권위로 둘러쌓아 놓았던 가장이라는 방어막이 여지없이 느슨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협상테이블에 앉아 휴전을 위한 협정문을 작성하는 일이 남았는 데, 이게 휴전인지 항복인지 헷갈릴 때도 많다. 아예 항목문서에 도장을 찍고 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을 모두 내어주어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일까?






내가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나랑 절대로 맞지 않는, 그리고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간은 원래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의 끝없는 교류를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다시 만나다.' p. 34 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부부싸움이란, '원래 서로가 정말로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서로가 깨닫는 과정이고, 서로를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부부싸움은 원래 내 것이라고 믿었던 것을 내어주고, 내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자신만의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발견으로 상대와의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인 듯하다. 내 것을 포기하는 게 당장은 쉽지는 않은 길이겠지만, 내 식량, 내 시간, 내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항복을 의미한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기껏 마련한 협상테이블에서 내 것을 지키려고 단교를 선언하는 것이 과연 빼앗겼던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찾는 방법일까? 고민이다. 그 방법은 오히려 자신에 덧대진 외피(겉모습) 속에 숨어 자신을 감추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그리고 '타자'와의 끝없는 대화와 다툼을 통해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나는 오늘 협상테이블에 앉기 전에 생텍쥐페리의 순수한 사상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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