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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Apr 03. 2022

창조성 촉발제 3가지

결핍, 자연, 사회적 관계...


"어떻게 하면 저도 소설가님처럼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가 소설가에게 물었다.


"아! 글쎄요? 여러분은 아마도 저처럼 글을 쓰실 수는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결핍 덩어리거든요!!

여기 참석한 여러분은 인생에 성공한 경험만 있으신 분처럼 보여요, 과연 결핍이 있으시겠어요?"


소설가의 자신감 넘치는 그 한 마디에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끌어올랐다. 나도 알고 보면 누구 못지않은 결핍 덩어리였기 때문이었다.


결핍은 우리의 감정을 풍성하게 만든다. 마감 시간에 쫓겨 시간의 결핍을 온몸으로 느끼며 하는 작업은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점잖고 소심한 내가 아닌 제2의 내가 튀어나와 자판을 대신 두드리게 만들고, 화판을 휘졌게 만든다. 내가 모르는 나의 글은 거침이 없다.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 신변잡기에서부터 과거의 치부까지 다 헤집고 다니면서 글감을 찾아내고, 이를 노트북의 스크린에 투사한다. 나 대신 튀어나와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을 내가 막으려 해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 제2의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창피하지만 속이 시원하다. 그리고 또 브런치 문우들의 평도 좋다. 뭔가 읽는 사람도 같은 결핍을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티스트웨이 3기를 시작하며, 감정이 리드하고 정보는 그 뒤를 따르는 글을 쓰겠다고 한 약속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때 그 소설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결핍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단지 그 결핍을 마주할 용기가 없거나 결핍을 호출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나의 두 번째 창조성 촉발제는 위대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다.


지난 3월 13일에는 정말로 오랜만에 묘목 단지에 다녀왔다. 조그마한 집 마당에 감나무를 더 심을 요량이었다. 찾아간 묘목 하우스가 한산하여 우리가 너무 시기를 앞당겨 와서 그런가 싶었는 데, 우리는 늦은 편이라고 핀잔을 듣는다. 묘목의 뿌리가 이미 많이 자라 있어 직접 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땅은 녹아있었고, 다행히 구덩이를 크게 파서 뿌리가 다치지 않게 잘 심을 수 있었다. 3월 13일 ~ 14일에는 서울에 많은 비가 내렸고, 가끔은 겨울 날씨 속에서도 볕은 좋아 보였다. 3월 말에 다시 찾아간 마당에서는 분명 봄이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 심은 묘목과 지난해 심은 묘목 일부에서 벌써 연두색 싹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가지에서 파릇파릇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지난겨울 모진 추위를 이기고 살아남은 묘목에서는 싹이 쪼그만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다 죽어간 듯 보이던 나뭇가지에서도 새싹을 틔운다. 그리고 한 번 틔운 새싹은 거침이 없다. 겨울 내 갇혀있었던 분을 풀어내듯이 쭉쭉 뻗어나간다.


자연은 창조성을 배우기 가장 좋은 곳이다. 모진 고난 속에서도 때가 되면 여지없이 창조해내는 자연을 그대로 닮고자 한다.


자연은 급하지 않는다. 기다릴 줄 알고 때가 되면 거침없이 피운다. 나도 그렇다.

내가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창조성 촉발제는 사람과의 관계다. 코로나와 함께한 지난 20여 개월간의 나의 생활의 변화를 되돌아보면, 창조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던 삶에서 매일 아침 창조하는 삶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함께 하는 사람들로부터의 격려와 자극이 가장 중요했다. 혼자 하면 빠르게 갈 수는 있지만, 멀리 가지는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다.


요즘은 빠짐없이 매일 아침에 혹은 저녁에 모닝 페이지를 작성한다. 매일 아침,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남아있는 앙금은 없는지, 지난 하루는 무사히 잘 보냈는지 점검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를 건너뛸 수도 있지만, 함께 하는 아티스트웨이 동료가 있어서 하루도 빠짐없이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최근 우연히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학생 대표 연설 현장을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는 개인의 재능이 개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공공의 것, 즉 주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탁하고 무릎을 치며 동의하는 바이다. 인간은 창조적인 존재이지만,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동료로부터 지속해서 자극을 받음으로, 그 창조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라 켄야(유명한 일본의 디자이너)는 인류는 창조성을 촉발하는 매개체 덕분에 지금처럼 창조성에 꽃을 피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돌'을 본 순간 태초에 없었던 창조성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고, 그것을 새롭게 하는 과정에서 인류 문명의 창의성이 지속적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사람은 각자 나름의 창조성 촉발제를 가지고 있고, 그 매개체를 통하여 창조성의 발현을 경험할 수 있다.

나에게는 결핍, 자연, 사회적 관계가 창조성을 촉발하는 매개체인 셈이다. 창조는 정말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창조성을 호출하기 위하여 매개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창조하는 경험이 쌓일수록 매개체의 종류도 다양해지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창조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싹을 틔운 듯, 힘들게 표면을 뚫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행위, 그것은 바로 창조의 기쁨이다. 창조성이 촉발되기를 매개체에 의존하기보다는 이 창조의 기쁨 자체가 매일같이 나를 독려하는 진정한 매개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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