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잉크 부자다. 여주 아웃렛 몽블랑 매장에서 IRISH GREEN 색상의 잉크를 구매함으로써 나의 몽블랑 잉크 컬렉션을 완성하였다. 60ml 잉크병 6개가 모이면 온전한 한 세트가 된다.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몽블랑 만년필이 있다. 한참 동안 사용하지 않은 만년필이다. 이 만년필을 사용해 보고 싶어 인터넷 쇼핑몰에서 거금을 들여 잉크를 구매했다. 약 23,000원 + 배송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급 만년필에는 만년필 전용 잉크를 꼭 넣어주고 싶었다.
배달받고 나서는 내가 구매한 잉크가 Black이 아니라 Mystery Black 인 것이 왠지 신나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이 잉크로는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써야만 할 것만 같았다. 오늘 다시 보니 가장 오래전에 구입했지만, 가장 덜 사용한 잉크다. 아마도 만년필로 글을 쓰기보다는 그림을 더 많이 그렸던 때문일 것이다.
Mystery Black 색상 이후 구매한 잉크는 당연히 파란색 잉크다. 그런데 Blue 색상에는 두 가지 다른 버전이 존재했다. 하나는 Royal Blue 색상이고, 다른 하나는 Midnight Blue 였다. Royal Blue에서는 이름 자체에서 귀족적인 냄새가 났다. Royal은 왕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중한 왕실은 아니고, 모차르트와 같은 경쾌하고 발랄한 왕실의 모습이 연상된다. 역시 사용해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파란색을 만들어 낸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잉크다. 그림도 역시 무겁지 않고 경쾌하다.
또 다른 Blue 인 Midnight Blue는 말 그대로 한밤중의 짙은 파란색이다. Mystery Black 이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색상이고, Royal Blue가 개방적이고 젊은 색상이라면, Midnight Blue는 그 보다는 세련되면서 진중한 비평가의 모습을 보인다. 이 잉크를 사용하면 좀 더 진중한 비판의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 구매한 잉크는 Burgundy Red와 Toffee Brown이다. 다 사용한 후에야 다른 잉크를 구매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나는 좋은 도구가 좋은 글쓰기를 부른다고 믿고 샀다. 둘 다 붉은 기운이 도는 색상으로, 따뜻함이 느껴진다.
나는 Burgandy Red는 글을 쓰는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하루 일과를 작성하고, 취침 전에 계획된 하루 일과를 점검하고 정돈하는 데 주로 사용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몽블랑 펜 대신 라미 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라미 펜에서도 다양한 색상의 잉크 카트리지가 나오지만, 지금의 나는 하나의 라미 펜에는 Burgandy Red 전용으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의 펜은 Black 혹은 Blue를 번갈아 가며 사용 중이다.
잉크 색상이 너무 예뻐서 한 때는 만년필 자체를 세 자루씩 들고 다닌 적도 있다. Black, Blue, Brown 이렇게 세 가지 색상이었다. 잉크를 채워놓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만년필 내부에서 잉크는 한 달 정도면 휘발해 버린다. 심한 경우, 만년필 촉에 잉크가 굳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욕심이었는지, 세 자루를 동시에 다발적으로 사용할 일은 크게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두 자루로 만족한다. 만년필의 잉크가 갑자기 다 떨어진 경우, 예비의 만년필이 있어 안심이다.
나의 손글씨와 만년필 사랑은 몰스킨 까이에 노트를 만나고 꽃을 피웠다. 몰스킨 노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만년필과 잉크색 만을 중요하게 여겼다.만년필과 궁합이 잘 맞는 종이와 노트가 따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글의 초안을 쓸 때는 만년필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해야 한다. 생각의 흐름을 놓치는 일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잉크가 충분히 잘 스며들어 글을 쉽고 빨리 쓸 수 있어야 하고, 너무 많이 스며들지 않아 뒷 장에도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몰스킨 까이에가 지금까지는 최고의 궁합이다. 그 점이 가장 맘에 들었다.
좋은 도구에 대한 투자는 좋은 행동을 유도한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 지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손에 쥐는 감촉, 부드러운 미끄러움, 아름다운 잉크의 번짐과 같은 사소한 것들이 집중력 발휘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를.
오늘도 펜을 잡고 미묘한 손의 감각적 움직임을 직접 느껴본다.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펜 촉의 사각거림에 기분이 좋아진다. 종이 위에 나 만의 생각과 감정을 쏟아낸다. 펜 촉에서 흘러나오는 잉크는 나의 아름다운 배설물이다.
아직까지 나의 만년필에는 MYSTERY BLACK 잉크와 BURGANDY RED 잉크가 꽉 차있다. 빨리 비우고, 새로 구매한 IRISH GREEN을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