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서백일 Mar 13. 2021

[서문] 수레바퀴 아래서 예술적인 삶을 선택하기

창조성을 촉발하는 시럽의 서문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가 20대 때 쓴 청년 성장기 소설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지금까지 읽지 않았어도 책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지만, 막상 읽어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 전개에 조금은 당황하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풍부한 상황 묘사력에 감탄하면서 쉽게 읽히지만, 처음 읽을 때는 책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마침 서평 모임을 통하여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니, 주인공 한스에 대한 연민의 깊이가 짙어졌다. 주인공 한스는 국가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입학할 만큼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시골 소년이지만, 재능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캐릭터다. 사회의 엄격한 규율과 규범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01. 국가가 베푸는 혜택에는 엄격한 규율이 수반되는 법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한스는 우정과 야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No'라고 말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노'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시스템이 주는 혜택을 일찌감치 맛보고 자랐다. 초등학교 때에는 친구보다는 반장이라는 타이틀이 좋았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시험을 잘 치르면 반에서 나름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며 지냈다. 졸업 후 직장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쪼개어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경력이 쌓이면 회사 내에서 권력이 생기는 것도 알았다. '소통'보다는 '권력'의 힘에 의지했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우정보다는 야망이 언제나 앞섰다. 그래도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직장에서의 프로젝트가 곧 나였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통로였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1년간 프로젝트는 전혀 없었고, 프로젝트에서 주어진 일에만 집중했던 나는 이제 자신의 프로젝트를 만들어 직접 실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누구의 지시도 없다.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관리하며 실행을 해나가야 한다. 사회적 야망과는 거리가 있는 소소한 모임도 시작하였고, 인터넷 강좌도 열심히 수강하고 있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나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권력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희망을 준다. 그래서 2022년에 직장에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No'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나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프로젝트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자본주의는 '자본'으로 '자본가'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시스템이다. 자본가는 축적된 자본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구입하여, 타인의 '시간'으로 '꿈'-회사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꿈'을 이루는 사람들을 칭송하고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구성원들의 노력과 무한 경쟁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자본을 축적할 수 있고, 자본이 축적되어야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지속해서 주입한다. 제발 지치지는 말게. 안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 테니까] 한스가 다니던 수도원 교장의 말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본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서 가끔은 뛰어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수레바퀴에서 뛰어내린다고 그리 쉽게 깔려 죽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굴리는 수레바퀴가 누구의 것인지를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직접 만든 프로젝트에 나의 자원을 투자해서 나만의 수레바퀴를 조금씩이라도 굴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02. 예술가들은 외적인 실수 따위에 개의치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려 애쓴다]


헤르만 헤세는 한스와 하일러라는 인물을 통하여, 예술적인 삶과 학문적인 삶, 우정과 야망, 사랑, 열정, 실연, 좌절의 감정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헤르만 헤세는 책에서 학문적인 삶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늘 옳다고 인정받지만, 예술적인 삶은 항상 믿음과 사랑, 위로, 아름다움, 영원에 대한 예감 등의 씨앗을 뿌리면서 계속 좋은 밭을 일구는 삶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삶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삶인가? 아니면 규율적이고 학문적인 삶인가? 나는 예술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아내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핀잔으로 자주 받아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대신 돈이 되는 일을 하라고 한다. 예술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려 애쓰는 삶인데, 돈을 벌어서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해주라는 말도 한다.


분명한 것은 예술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시스템 속에서 주어진 일만 충실하게 하고 사는 삶은 결코 아니다. 분업시스템에 의해 나에게 주어지는 일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 일을 충실하게 한다고 나만의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주어진 일만이 나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나태해진다는 것은 예술적인 삶에서 멀어지는 삶이라 믿는다.


예술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오히려 야생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시스템 밖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나만의 씨앗을 심고 밭을 가꾸는 일, 부지런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예술적인 삶이라 본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지만 스스로 찾아서 하는 일, 소소하지만 작게라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반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꾸준히 하는 삶이 예술적인 삶이리라.


오늘 하루도 주어진 일에만 충실한 하루를 보냈는지, 아니면 야생의 삶에 뛰어들어 스스로 개척하는 소소한 삶을 살았는지는 오늘 밤의 일기장에 기록해보자.




[03.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인가한 원칙에 따라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사회에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

헤르만 헤세가 20세기 초에 바라본 학교의 모습이다. 어쩐 지 100년이 지난 지금의 교육과 너무나도 닮았다.


나도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4년간의 기숙 생활을 했고 1, 2학년때는 4인 1실, 3학년이 되어서야 2인 1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체육관에는 수영장도 있었고, 음악감상실에는 좋은 음향 장비도 갖추어져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을 수가 있었다. 시험만 없었다면 최고의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는 여건을 고루 갖춘 곳이었다. 학교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이해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같은 수업을 듣고도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서 나중에 따로 책으로 공부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1등은 더는 나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낙제를 면하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었으며, 그나마도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고 집중해서 공부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캠퍼스의 낭만, 여유, 자유, 민주, 청춘, 죽음, 사랑 등에 대한 이야기는 사치였다. 학교 식당에서 제공해주는 삼시 세끼와 야식으로 먹는 라면, 도서관 휴게실의 쪽잠, 퀴즈, 시험의 연속이었다.


학교는 사명을 다한 것일까? 젊은 과학자를 양성하고자 세심한 훈련과정을 만들고, 그 훈련과정을 이수케 하였다. 혹독한 훈련과정을 통하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으니, 국가와 학교는 소임을 다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적 내면의 성장을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소모적 시간을 투자해야 했나?를 생각해보면, 참 아쉬운 점도 많다.


우리 사회 시스템은 보상을 통하여 기존 체제(시스템)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시스템의 견고함을 강화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만들어 놓았다. 수레바퀴에 잘 올라타면 어느 정도까지는 본인의 노력 없이도 언덕을 쉽게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기존의 수레바퀴가 같은 곳을 맴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과감하게 수레바퀴에서 내려와서 자신만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 그때부터는 스스로 학교가 될 필요가 있다. 세심한 훈련과정을 만들고 자신에 맞게 훈련을 지속해야 한다. 그 과정이 사회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졌던 나를 자연인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과정은 아닐까?

 

https://brunch.co.kr/brunchbook/speculative


작가의 이전글 삶에서 나만의 예술만들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