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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Apr 27. 2021

아내가 또 폭발했다

서로에게 잘 기대고 기댐받기 [서평] 쇼코의 미소를 읽고

아내와 나는 다툼이 잦다. 새벽에 꼭지가 돌 정도로 다투고는 그다음 날에도 상한 마음으로 카톡 대화를 한다. 카톡 대화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바둑 복기를 하듯 다툼의 원인을 찾는 데 집중하게 된다. 대게 다툼의 원인이 상대방에 있다는 입장의 대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다툼의 원인이 각자 자신에게 있었음을 시인하는 단계에 도달해서야 마무리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자만 내가 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은 몇 달은 유지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나의 섭섭함과 억울함을 상세하게 털어놓고 위안을 받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때로는 그런 말들이 무기가 되어 나에게로 돌아오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이다. 

쇼코와 소유의 관계도 가족의 그것과 같이 끈끈하다. 쇼코의 편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섭섭함과 억울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소유는 그런 쇼코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 쇼코는 일본에서 소유의 집으로 교환학생으로 온 고등학생일 뿐이었지만, 소유는 쇼코의 편지를 통하여 쇼코의 어두운 감정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소유는 연락이 끊긴 쇼코의 처지가 궁금하여 쇼코의 일본 집을 방문하게 된다. 쇼코의 처지는 어릴 적 당당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소유는 일종의 우월감을 느낀다. 


아내는 직장에서의 작은 실수담을 자주 가족 대화의 장에 꺼내 놓는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가 그렇게 좋은지 마냥 엄마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다. 엄마를 무시하고 없이 여길까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힘든 처지를 잊고 잠시나마 우월감을 갖게 되는 장치가 되는 것 같다. 실수담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가족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나 가족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는가? 그렇다면 같은 상황 같은 문제에 놓인 적이 있다는 의미이다. 


자기의 치부를 꼭꼭 숨기고 자기가 잘했던 일만 가족의 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꼭 건강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난감한 처지를 공개하여 감정의 연대를 형성하는 게 가족 간의 대화법에서 더 소중한 것은 아닐까? 


소유의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였다. 


가족 간의 다툼은 아주 사소한 것에 기인한다. 상대방의 방어기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대화의 내용에 옳고 그름은 없다. 말하는 태도, 무의식적인 단어의 사용이 상대방의 자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대화의 내용에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다툼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은 민감한 존재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말투, 행동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것 중의 일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방어기제를 자극한다. 


내가 상대방의 말에 화가 났다면 나도 상대방의 그 무엇이 나를 자극한 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상대방의 무의식적인 태도나 특정 단어의 사용이 나를 자극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났다면, 상대방의 비난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방의 그 무엇이 나를 자극한 지를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더 우선이겠다. 결국, 결론은 말싸움에 상대방은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과 싸움인 것이다. 나 자신을 알려면 결국 싸워보는 수밖에 없다. 가족 간의 다툼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정의 과정을 인정해야 한다. 


소유에게는 영화감독이 되는 꿈이 있었다. 쇼코에게도 도쿄 이주라는 꿈이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도 화가라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꿈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유에게 꿈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 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리고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쇼코와 소유는 할아버지의 납골당에서 "미스터 김."하고 뜻 모르게 같이 웃었다. 같이 살아있음에 감사한 것일까?


요즘 대세인 인생론은 [욕망 충족 이론]이라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좋은 것이고 얻지 못하면 좌절이라는 이론이다. 이 소설 곳곳에 욕망 충족 이론이 묻어난다. 그리고 지금 청년 사회도 욕망과 좌절의 홍수 시대에 사는 듯하다. 욕망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추앙받는 시대이고, 욕망을 달성하는 것이 곧 선인 사회가 되었다. 중도 포기는 좌절을 의미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는 할아버지의 납골당 앞에서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인생의 동지를 얻은 두 여자의 상황에 공감을 표현하며 미소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시대정신이란 것이 있으리라. 지금 한국은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것은 확실하다. 단지 사회에서 주어진 욕망의 모습이 개인이 추구하는 욕망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일 뿐이다. 욕망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섭섭함과 억울함의 표현이 무기가 되어 돌아올 수 있어서, 가족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꼭 반성한다. 가족이 배설구가 아니란 사실을. 가족에게도 존중이 필요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런 다짐이 몇 달은 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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