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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백일 Aug 27. 2021

추억 소환 앰플

내가 80살이 되면 일어날 수 있는 일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냄새를 더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맡는 나의 체취는 향기롭지는 않지만, 나의 모든 과거와 현재를 포함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다. 이 냄새를 통해 오늘의 나는 누구이고,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음미할 수 있다.


가족은 모두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매번 생경한 나의 체취가 익숙해질 때면, 닭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어둠을 깨우기 시작한다. 이제 곧 날이 밝겠지. 오늘의 세상도 어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마스크를 쓰고 천천히 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내가 사랑하는 일터로 일을 하러 갈 것이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바뀐 세상은 바뀐 사람들만을 위한 세상이고, 나는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난 30년간 주위의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불행해졌다. 비는 계속 이어졌고, 지반은 물렁물렁해졌으며 바닷가의 아파트는 때로 붕괴도 했다. 정부는 이런 사고 소식을 통제했지만, 통제할수록 소문은 그 흉흉함을 배가시키고만 있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자동차는 진작에 팔아버렸다. 인구가 더 늘어나지 않으니 이제는 버스를 자가용처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내 위치가 버스 정류장과 연동되었고, 행선지를 향하는 버스가 출발하여 5~6분 후에는 도착한다는 알람이 울린다.


요즘은 버스 정류장에서도 사람을 만날 일은 거의 없다. 그만큼 버스정류장이 여기저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신 버스를 타고 운이 좋으면 함께 탄 탑승객과 함께 명상하며 나의 일터로 갈 수도 있게 되었다. 지난번에 함께 했던 '냄새로 하는 명상훈련'이 나에게는 신선했고, 그 이후로도 그 체험을 지속하기 위해 '냄새로 추억소환 서비스'를 구독하였다.


보통 일반 버스에는 내 좌석이 따로 배정되지 않고, 탑승 직전 나의 상태에 따라 버스에서 좌석을 알아서 지정해준다. 나는 내 좌석이 앞녘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데, 버스회사에서 제공하는 냄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 회사에서는 광고를 위해 인공 냄새를 버스 내에 분사하는데, '냄새로 추억소환 서비스' 구독 이후에 나는 이 인공 냄새에 조금 이력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버스 회사에서 제공하는 쾌적한 냄새보다는 내가 지나치는 곳의 향을 조금 더 진하게 느끼고 싶었다.


새벽시간은 오롯이 명상하는 시간이기에 출근시간이 유일하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소식과 접하는 시간이다. 좌석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서는 어제 일어난 사건 사고의 짤막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나는 되도록 무미건조한 뉴스 콘텐츠를 선택하여 시청하는 데, 지난번 내가 봤던 영상 때문에 여기저기 길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광고로 당혹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광고는 이제는 회피할 수 없지만, 광고의 종류를 통제하는 전략은 내가 생활 속에 꾸준히 실천하면 어느 정도 효과는 있는 것 같다.


기억력의 감퇴는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내가 구독한 '냄새로 추억소환 서비스'는 특정한 냄새로 특정한 기억을 소환시키는 '냄새 앰풀'과 '호흡 훈련법'을 함께 제공한다. 특정 냄새로 특정 과거 추억을 소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서비스다. 부가적으로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정보나 이벤트가 있을 때에는 특정 냄새를 분사하여 뇌를 자극하기도 한다. 후각이 맑아진 이후로는 나는 이 서비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 제품은 후각을 활용하니, 일상 생활에서 다른 손님들에게 크게 티가 나지않게 나의 기억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게 단골의 이름과 커피 취향, 그리고 그분들의 소소한 가족사가 기억이 나지 않을 때, 나는 이 서비스를 종종 사용한다. 가끔은 일터에서 사용하는 커피 향과 이 냄새앰풀이 섞여 '추억'의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는데, 우연한 과거 추억 소환이 주는 소소한 행복감 때문에 이런 오작동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한 번은 새로 볶은 '화성 진공 숙성 원두'를 '드립'하다가 순간 서비스가 오작동했다고 믿을 정도로 강력한 '기억력 폭발'을 경험했는 데, 그 날의 추억소환은 너무 생생했다.


커피 향때문에 일어난 그 날의 '기억력 폭발' 현상으로 나는 30년 전 어느 날로 돌아가게 된다. 그날은 내가 인생에서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날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머리가 맑았고, 그가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날이었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고 충실하였으나, 그날의 계약은 그에게 객관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마음속 깊이 그 계약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 계약은 '독립선언'을 하는 계약이었고, 독립을 위해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내용이었다. 이 독립선언이 지금은 비록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결심이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날이 인생에서 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아니 오지 않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날 그렇게 한 독립의 결정이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찬란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기억이 어렴풋해져서 또 '기억력 폭발'현상을 경험해야만 그 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 지를 또렷이 떠올릴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그날의 그 결정 이후로 나의 인생이 풍요로워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점점 더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냄새로 추억 소환 서비스'에 기대어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터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맡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커피 향때문에 가끔 오작동으로 소환당하는 '추억 폭발'은 내 삶의 낙이고 덤이다.


지금은 이 삶이 좋다. 그리고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나는 그 날의 '독립 결정'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 때 한 그 일은 정말 잘 한 일이었어! 너는 멋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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