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내비게이션을 켠 순간 오늘 약속 시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무실을 나오려 할 때 갑작스럽게 밀려온 콜을 처리하느라 출발 시각이 많이 지체되었고, 최단 경로를 표시하는 내비게이션 화면은 온통 빨간색 선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오롯이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우회전, 좌회전, 직진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내비게이션에서 제안하는 보다 더 빠른 경로를 찾아 몰리게 되면, 결국은 그 길은 교통체증을 일으키게 될 텐데.. 이 길을 따라가는 것이 과연 맞을까? 하는 짤막한 상상을 해본다. 교통지옥에서 길을 찾는 일은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게임과 같아서, 상대편 운전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경로를 선택할지를 알면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은 선택지를 제안하는 더 비싼 내비게이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평소보다 30분이나 넘겨서야 겨우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 내비게이션에서 보낸 '도착 시간 늦음' 알림을 모임 멤버 모두에게 전송해놓은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회의장으로 들어간다. 오늘의 모임은 일상적인 회동은 아니었다. 모임의 회원 한 명이 그동안 개발했던 서비스의 재도약 비전을 발표하는 자리다. 초기 자본금은 10억 원이 조금 넘는 회사였지만, 지난 3년간 수익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자본금을 소진하기만 했던 터라, 새로운 비전 선포식이 꼭 필요한 시점이었고, 오늘은 그간 정리된 비전을 멤버들에게 공유하는 자리였다.
비전 설명회는 예상 밖으로 지루한 내용이 많았다. 지난 3년 전의 비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고, 비즈니스 모델도 3년 전의 모습과 같았다. 시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위치 기반 플랫폼 서비스로, 중소 상인 업체에서 만든 모바일 광고를 클릭해서 보거나, 우연히 그 장소를 지나치게 되면 일정 코인이 저절로 적립되는 서비스다. 적립된 코인으로는 로또 게임을 즐기거나, 퍼즐 맞추기 게임 등을 할 수 있고, 일정 금액 이상을 적립하면 현금으로 환급받을 수도 있다.
대표는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이 서비스가 시장에서는 리워드 서비스로 인식되고 있다는 지난 3년간의 성과를 설명하며 발표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설명회 모임의 분위기는 3년 전 초반 투자 모임의 열정과 호기심, 기대와는 다르게 무관심, 걱정, 격려의 공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공기의 흐름을 감지했는지, 대표는 발표를 끝내지 않고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네이버와 카카오와 같은 플랫폼 기업의 독점적 시장 지배 현상과 그로 인한 부의 편중화 현상을 이야기하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조금 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상장을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 대표가 비전 발표회에서 플랫폼 업계의 전형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보통은 스타트업의 비전 발표회에서는 기존 시장에 편승해서 이익을 최대화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대표는 기존 시장에 경제적 부가 일부 플랫폼 업체에 집중되는 현상에 문제가 많으니, 새로운 보상체계를 만들어 경제활동의 과실이 플랫폼 기업 한두 곳에 집중되는 현상을 막는 도전을 하겠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원래 서비스를 만든 의도였다고 강조한다. 새로운 기술 기반의 경제 운용의 판을 만들어 시장을 흔들어보겠다는 취지의 발언인데, 3년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설파했던 기억이 있다. 숫자상으로는 지난 3년간의 성과에서 새로운 서비스의 미래 가능성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신념의 크기만큼은 더욱더 커진 것은 확실하다.
무엇이 그의 신념의 크기를 키웠고, 또 오늘 회의장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긴장하게 할 수 있었을까?
IT 기술 태동기에는 기술을 통한 정보 접근의 민주화를 꿈꿨다. 누구나 인터넷만 있으며 대부분의 정보에 실시간으로 접근이 가능한 세상이 올 것이라, 거의 무료에 가깝기 때문에 정보 격차를 없앨 것이라고, 그리고 부의 분배도 이전 세대보다 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IT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 경제 시스템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비게이션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항상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있다. 같은 교통환경에서도 먼저 도착지에 도착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사람이다. 기술은 이런 인간의 욕구를 가속화시킬 뿐이었다.
기술이 제공하는 무한의 자유때문에 현재 인간은 제도와 윤리바깥의 세계에서 무한 경쟁의 게임을 할 수 밖에 없다.
플랫폼 경제에서도 먼저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과 나중에 뛰어드는 사람 간의 정보 격차는 심화되고, 경제적 과실에서도 그 격차가 더 커지는 방향으로 그 본질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IT 플랫폼의 기본 운영 철학은 '자유 경쟁'이다. 자유롭게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당연하고, 그런 것이 '공정'이라고 믿게 만드는구조다.
대표는 마지막으로 '이런 플랫폼의 신자유주의적 운영 철학'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플랫폼을 대체할 대안 시스템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본인이 구축하고자 하는 것은 소수에게 경제적 성과가 집중되지 않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경제적 이득이 분배되는 시스템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기술은 언제나 더욱 더 나은 삶을 보장하며 탄생한다. 다이너마이트도, 증기기관도,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구축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달랐다. 그 결과로 매번의 산업 혁명기에 소수의 사람에게 엄청난 부의 축적을 안겨주었고,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부' 대신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는 믿음만 안겨주었다.
지금은 4차 산업 혁명의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기술의 급속한 발달이 사회와 경제의 급속한 변화를 끌어낼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 일부는 기술에 반감을 표하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신기술의 위험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왜 이 기술을 활용하여 우리는 시장을 선점한 소수가 모든 경제적 과실을 소유하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을까?', 또는 기술을 활용하여 '경제적 과실'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분배되는 시스템을 고민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