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실습

메멘토 모리

by 허용수

우리 집 수족관 담당은 나다.

바쁜 아침에도 물고기 밥을 주고 밤새 죽거나 병든 놈은 없는지 확인하며 잠시 물멍을 한다.

가끔씩 수조 청소와 약제 살포도 해야 하는 등 꽤나 손이 가는 일이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다른 식구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하지만 종종 배를 뒤집고 죽어서 둥둥 떠다니는 놈들이 생길 때면 기겁을 하며 아내나 아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산 녀석들은 이쁜데 죽은 녀석들은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겠다.

아내는 그냥 맨손으로 건져내 화분의 흙속에 파묻고는 뭔 의사가 죽은 사체도 못 만지냐고 핀잔을 준다.

나는 산 사람을 치료하는 치과의사지 장의사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의사나 치과의사라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과정이 있었으니 바로 인체 해부실습이다.




중학교 때의 개구리 해부는 누구나 경험하는 통과의례인 거고 대학 때는 동물해부학 실습시간에 쥐를 해부했었다.

각 조별로 살아있는 흰색 실험쥐 한 쌍이 제공되었는데 우선 해부에 지장이 없도록 훼손시키지 말고 죽이기부터 해야 했다.

수도꼭지가 연결된 실습대에는 커다란 유리 수조와 두꺼운 장갑,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긴 바늘이 마련되어 있었다.

다들 당연한 듯 유리 수조에 쥐를 넣고 뚜껑을 덮은 뒤 수도를 틀어 익사시켰다.



오랫동안 고통을 주며 잔인하게 죽인 거다.

내가 수조 속의 죽은 고기를 못 만지는 것은 아마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제야 시범을 보인다.

장갑 낀 손으로 쥐를 단단히 잡고 긴 바늘을 귀에다 대고 그냥 쑥 찔러 넣는다.

숨골을 찔린 쥐는 몇 번 퍼득이다 이내 잠잠해졌다.

너무나 쉽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쥐 입장에서도 안락사가 아닐까 싶었다.


이런 장면은 내 유년의 기억에도 있다.

그땐 아직 아파트가 없던 시절이라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 집이 많았는데, 가족 같은 반려견이 아니라 도둑을 막고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용도로 활용하다가 복날이면 개장수에게 팔거나 잡아먹기도 하는 가축의 개념이었다.

길에는 주인 없는 개들이 돌아다녀서 동네 영감님들이 개를 잡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개를 묶어놓고 몽둥이와 곡괭이로 사정없이 내려치던 끔찍한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개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고통을 그대로 받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많이 팰수록 고기가 연해진다며 주책맞은 영감님들은 킬킬거리며 그 과정을 즐기는 듯했다.

한편 우리 집에서 일하던 공장 삼촌들이 개를 잡을 때는 완전히 달랐다.

목줄을 해서 개를 높이 매단 뒤, 뒷다리 두 개를 한 손으로 모아 쥐고 쭉 잡아당기면 몸통이 일자가 되어 꼼짝을 못 한다.

그 상태에서 다른 손에 쥔 망치로 머리통을 한 두 번 가격하니 '깽'소리와 함께 똥을 싸며 그대로 죽어버린다.

실습조교처럼 깔끔한 방식이다.

이처럼 죽음은 일상 속에서도 흔히 보는 것이었다.




본과에 진학해서는 드디어 인체 해부실습을 경험하게 되었다.

내게 조직의 쓴맛을 보게 한 조직학도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는 미세 해부학의 일종이지만, 인체를 갈라 직접 장기를 관찰하는 인체해부학이야말로 의학도의 대표적인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해부실습 첫날의 그 음산했던 느낌을 잊 수가 없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적출된 장기나 태아의 사체 같은 인체 표본들이 유리관 속에 담겨 진열된 무시무시한 복도가 나타난다.

실습실은 공포스러운 이 공간을 지나 또 다른 철문을 열고 들어서야 한다.

코를 찌르는 독한 포르말린 냄새 속에 여러 구의 사체들이 붉은 가죽 천에 덮여 차가운 콘크리트 베드 위에 뉘어져 있었다.

망자들에게 묵념을 드리고 마침내 가죽커버를 벗기니 저마다 사연이 있는 듯 다양한 표정의 시신들을 대하게 되었다.

우리 조의 시신은 스포츠머리를 한 어린 남자였다.

무슨 말 못 할 사연이기에 이토록 젊은 사람이 여기 찬 바닥에 누워 있는지 가슴이 시려왔다.

실습에 앞서 먼저 시신을 비누로 깨끗이 씻기고 머리카락을 비롯한 전신의 털을 면도한다.

그리고 손 발과 얼굴을 붕대로 미라처럼 칭칭 감는다.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고 얼굴 표정을 보지 않을 목적에서다.

이런 준비가 모두 끝나면 비로소 가슴 절개부터 해부가 시작된다.

우리 조의 시신은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사후경직으로 굳어 있어서 가슴 해부를 하려면 손의 위치를 억지로 옮겨야 했다.

여학생들은 엄두도 못 내고 물러서 있고 남학생들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결국 나와 상조가 각자 한 팔씩 잡고 힘주어 벌려 허리춤의 등 뒤에다 괴어 놓았다.

메스로 가슴에 조심스럽게 절개선을 넣는 상조를 마른 침을 다시며 모두가 호기심과 긴장 속에 지켜보는데 갑자기


"엄마야!"


하는 여학생의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다들 혼비백산을 한다.


시신이 움직인다!!


등 뒤에 괴어 놓았던 두 팔이 풀려버려 다시 원래 위치로 모으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놀란 가슴으로 시작한 해부실습은 1학기 동안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2학기 동안은 우리의 전공인 머리와 목을 해부하며 꼬박 1년 간 진행된다.

해부를 하는 데는 메스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심장과 폐를 관찰하기 위해 갈비뼈를 자를 때는 작두를 사용했고, 뇌를 관찰하기 위해 두개골을 열 때는 전기톱을 사용했다.

해부학적 지식이 부족한 우리의 손길은 서툴고 거칠었기에 해체된 몸은 너덜너덜 해지며 점점 형체를 잃어갔다.

하지만 몸을 기증한 시신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진지하게 임해야 했으므로 실습은 늘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해부 실습을 마치고 버스 막차로 늦은 귀가를 하는데 가로등도 없는 동네 어귀에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의 검은 형체가 미동도 없이 서 있길래 오금이 저렸던 적도 있었다.

실습이 종료되는 날엔 모두가 검은색 정장을 입고 경건하게 향을 사르며, 비록 해체된 몸이지만 관에 나누어 담아 '해부제'라는 제사를 지낸다.

의학발전을 위해 기증한 시신들의 넋을 기리고 영면에 드시길 기원하면서 여학생들은 많이 울었고 남학생들은 애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많은 술을 마셔야 했다.




죽음은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이 있어서야 삶도 있는 거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마을 안에서도 공동묘지를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혐오시설이 동네에 있으면 집값 떨어진다고 기피한다.

가난했던 젊은시절 나는 평화롭고 조경이 아름다운 유엔묘지를 데이트 장소로 자주 이용했다.

온 세상이 북적이던 어린이날 한적한 공원묘지에서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논 적도 있다.

어머니께서는 산파의 도움으로 나를 집에서 낳으셨다.

우리 할머니는 모시던 작은 아버님댁에서 돌아가셨다.

이렇게 예전에는 집에서 나고 죽었다.

집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 해서 삼갔는데 요즘은 거의 다 병원에서 나고 죽는 시대다.

나의 아버지는 암투병 중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간병하시던 어머니만 간신히 임종을 지키셨다.

입관하기 전에 마지막 대할 때도 울기만 했지 장의사의 손길로 꾸며진 아버지의 육신이 낯설어 손을 대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쓸쓸히 가셨지만 영안실에서는 넘치는 근조화환들과 요란하게 맞은 손님들로

왁자지껄하게 해치우듯 장례를 치른 것만 같다.

죽음을 봐야 삶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요즘 애들은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듯 '책임도 못 질 거 왜 낳아서 고생시키냐'며 부모에게 함부로 말한다.

죽음 앞에 선다면 과연 그런 말이 나올까.

사체 해부까지 했던 내가 어쩌다 죽은 물고기조차 못 만질 정도로 죽음을 외면하게 되었까.

'메멘토 모리'를 기억하며 남은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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