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수많은 제제들을 위하여

여린 영혼을 대하는 자세

by 허용수

치과원장이 늙어가니 환자들의 연령대도 얼추 맞추어지는지 일부러 제한을 하지 않는데도 확실히 꼬마 환자들이 줄었다.

어느 원로 원장님의 치과 대기실엔 아예 노골적으로 '어린이 환자는 사절'이라는 안내문을 내건 곳도 있다.

그만큼 꼬마 환자들을 진료하기가 힘이 든다는 뜻일 게다.

입안에서 치아를 갈아내는 핸드피스라는 절삭기계는 분당 회전수가 30만 rpm 이상으로 1초에 5000번 이상 회전하는 항공기 터빈 같은 고속 엔진이다.

입술이나 혀 같은 연조직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큰 상처를 낼 수 있는 위험한 기계인 것이다.

그러니 마구 울며 발버둥 치는 꼬마들의 좁은 입안에서 핸드피스를 사용하려면 엄청난 집중과 긴장을 해야 하니 꼬마환자와 한바탕 실랑이를 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




치과 치료는 다들 아프다고 하지만 마취만 되고 나면 감각이 없어져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마취주사도 미리 마취연고를 표면에 바르고 서서히 주사하면 아프지 않게 할 수 있다.

결국 꼬마들에게는 공포감이 가장 문제다.

치과 주사기는 금속성의 날카롭고 기괴한 모습이 일반 주사기와는 생긴 것부터가 달라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어른들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 버리지만 꼬마의 겁먹은 눈동자는 끝까지 주사기를 따라 움직이며 더 커진다.

게다가 마치 얼굴 반쪽이 없어진 듯 마비된 생경한 느낌에 놀라고, 날카로운 기계소리와 끊임없이 목으로 넘어오는 물 때문에 숨이 막히는 공포도 느낀다.

누구나 한 번은 겪고 넘어야만 하는 치과의 첫 경험을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치과와 친숙해질지 아니면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치과공포증을 지니고 살지 결정다.

그래서 꼬마환자들에게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대하고 안정이 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나도 젊었을 때는 지켜보던 아이 엄마가 의사 선생님이 마치 유치원선생님 같다고 할 만큼 잘 다루었었다.

하지만 마냥 달래고 얼르기만 하다가 지체되는 시간이 감당이 안될 때면 겁을 주거나 협박을 하기도 했고, 결국엔 속박을 하고 억지로 개구기를 물려 강압적 치료를 해야 할 경우가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악동 녀석 때문에 공포 외에도 꼬마 환자가 비협조적인 또 다른 큰 이유가 있음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그 친구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시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다섯 살 남자아이를 그냥 '악동이'라고 부르겠다.

아무리 인내심을 가지고 상냥하게 대해도 도무지 막무가내라 소아치과로 의뢰하려 했더니 엄마가 제발 좀 치료해 달라고 간청을 한다.

엄마를 밖에 나가게 하고 꽁꽁 묶어서 무서운 주사를 놓는다고 겁을 주었더니 그때부터 빈정이 많이 상했나 보다.

5세 아이답지 않게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더니 욕을 하며 노골적인 분노를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속박을 하고 강제로 치료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 친구가 올 때마다 치과가 한바탕 뒤집어지는 전쟁터가 된다.

나중엔 급기야 나도 미운 마음에 오기가 생겨 꼬마랑 감정 소모를 하는 기싸움 되고 말았다.

어찌어찌 그날의 치료를 마치고 나면 악동이는 어김없이 나를 향해 침을 뱉고 욕을 곤 했다.

그렇게 지쳐가던 어느 날, 당시 아내가 갑상선암 최종 진단을 받아 괴롭고 힘든 마음으로 출근을 한 날이었다.

암에 대한 생각과 수술에 대한 걱정 외엔 아무 생각도 의욕도 없이 무기력해 있던 그런 상황에서 그날도 악동이를 맞았다.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전투태세의 아이를 보니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악동이 왔니. 또 한바탕 전쟁을 치르게 생겼네.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이 참 힘든 날이라 너랑 싸울 힘이 없구나. 우리 집 식구가 아파서 큰 수술을 해야만 한대. 얼마나 무섭고 아플까. 그래서 걱정도 되고 선생님이 마음이 지금 너무 아파. 악동이도 그동안 많이 아프고 무서웠지. 그런데도 너에게 화내고 짜증을 내어서 선생님이 너무 미안해."


딱히 악동이에게 한 얘기가 아니라 맥없이 그저 나 스스로에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린게 입밖으로 나왔나 보다.

어! 그런데 이상했다.

그날은 악동이가 울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의연하게 치료를 잘 받는 게 아닌가.

치료가 끝나고는 욕을 하기는커녕 인사까지 꾸벅한다.

그때 깨달았다.

다섯 살 꼬마에게도 인격이 있고 자존심이 있음을.

꼬마라고 무시당하기만 했는데, 인간 대 인간으로 어른도 힘들다고 자기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서 자기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줌을 느꼈나 보다.

자존감을 회복한 꼬마는 씩씩하게 치료를 받음으로써 나를 배려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주인공 '제제'도 다섯 살 꼬마다.

형제자매가 많은 가난한 집에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말썽꾸러기짓을 해서 가족들에게 늘 매를 맞고 살지만, 뒷마당의 보잘것없는 라임오렌지나무랑 대화를 나누는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다.

다섯 살 제제에게는 자기를 때리는 아빠와 동네 아저씨를 죽일 거라는 분노도 있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죽어버릴 생각까지 하는 어른 같은 자아도 있다.

맞아서 아픈 상처보다 미움을 받는 마음의 상처를 더 아파하는 제제의 내면에는 어른과 마찬가지의 복잡한 감정과 소우주가 있다.

꼬마에게도 엄연한 자존심이 있고 인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후로 아무리 어린 친구라도 처음 보는 신환에게는 말을 놓지 않고 경어를 쓴다.

어른을 대할 때처럼 정중하게 대하고 말투를 조심한다.

상대가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하고, 어린 영혼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겠다는 나 스스로의 다짐 때문이다.




비단 꼬마들뿐만 아니다.

세상엔 감수성 예민하고 마음 여린 어른 제제들도 많다.

치과 의사는 육체노동자인 동시에 치료 결과에 불만을 가지는 환자들을 일일이 상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자이기도 하다.

어차피 아파서 인상 찡그리며 오는 환자들은 의료진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긍정적인 말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두었다가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대체 어디서 이런 식으로 치료를 받으신 거예요?"

"치석이 완전 떡져 있네요. 이를 아예 안 닦고 다니십니까?"

"제발 입 좀 크게 벌려보세요."


이런 부정적이고 비아냥대는 말들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릴까 부끄러운 소리다.

경각심을 주거나 머구리(사사)에게 치료받은 걸 질책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지만 오히려 반발심만 들게 한다.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라도 오셨으니 최선을 다해 치료해 봅시다."

"그 선생님도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제가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한번 치료를 해 보겠습니다."

"많이 바쁘시죠. 그래도 스케일링은 보험 적용이 되니까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혜택 받으러 오세요."

"힘드시죠. 지금도 잘해주고 계신데 조금만 더 크게 벌려보실까요?"


차라리 불만을 드러내고 항의하는 환자는 그래도 낫다.

잘못한 것은 솔직히 시인하고 최선을 다 하겠다고 진정성을 보이면 충성고객이 될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불만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서는 고발이나 소송을 걸어오는 환자가 더 무섭다.

세상의 수많은 어린 제제들과 어른 제제들이 더 이상 말로써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하고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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