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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May 23. 2020

맥그로드 간즈의 구두장이 끝


5


"브로,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는 돌연 이렇게 물어왔다. 그가 나를 '브로'라고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담요를 사고 싶어서." 그는 예의 철제 계단 쪽을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나도 얼마간 같은 쪽을 응시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필요한데?" 급기야 나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고 자신만만하게 되물었다. 우리는 이틀 가량 짤막한 이야기를 나눈 게 고작이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런 나를 상대로 많은 돈을 요구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담요 값 정도라면 빌려줄 것도 없이 오히려 사줄 수도 있다는 은근한 아량까지 품었다. 그러나 돌아온 그의 대답은 나의 아량을 단박에 무너뜨렸다.


"4000루피." 얼토당토않은 대답이었다. 4000루피는 한국돈으로 6만 원 가량에 달했는데, 화폐의 가치를 고려한다 해도 결코 적지 않은 액수였다. 하물며 나는 당장 전날에만 해도 200루피 남짓 일회용 우산 하나를 두고 망설이는 처지였다. 따라서 나는 단칼에 거절해야 했는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러지 못했다. "그건 너무 많은데." 나는 한발 물러섰다. 곧 그 말을 후회했다. 아무래도 여지를 남겼다는 느낌이 스쳤다. 공교롭게도 그의 다음 말은 나의 희미한 후회를 명료하게 해주었다. 그는 자못 선처를 해주겠다는 어조로 "그럼 2000루피라도 괜찮아." 하고 말했다. 마치 이번에도 퇴짜를 놓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양 그는 태연자약했다. 나는 함박눈 사이에서 떨고 있던 전날의 그와 당장 눈 앞의 뻔뻔한 그를 번갈아가며 비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부탁할게." 그는 예의 팔 비비는 시늉을 해 보이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나왔다. 마침내 나는 뾰족한 수를 떠올렸다. 우선 딱하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 보인 다음 "정말 미안한데 내가 현금은 없고 카드 뿐이라. 게다가 여기는 ATM도 없던데. 100루피 정도는 가지고 있는데, 괜찮으면 그거라도 줄게." 하고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남은 경비는 모두 현금으로 지갑 안에 들어 있었다. 다만 실제로 ATM을 본 기억은 없었다. 허구한 날 정전이나 되는 마을에 그런 기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들어 언덕 위를 가리켰다. "저 위에 있어."


나는 궁지에 몰렸다. "그래?"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못 봤는데." 시간을 끌기 위해 실속 없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양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설명할 길 없는 일종의 패배감을 느꼈다. 동시에 몇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며, 미안하다고까지 해야 할까. 진작에 거절했으면 좋았을 걸 무엇하러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걸까, 하고 생각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괘씸한 그는 기어이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나는 혼자서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카페  테이블로 돌아가 지갑을 챙기는 척했다. 슬며시 커피값을 계산했다. 다행히 밖에  있던 그는 내가 계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이 예의 노파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노파의 뒤를 따라 다시 카페를 나섰다. 구두장이는 나를 보자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녀와 브로. 조금만 올라가면 보일 거야." 그는 이번엔 손도 아닌 눈짓만으로 언덕 위를 가리키며 실실 웃었다. 가증스러웠다. 노파는 느릿느릿 맞은편 사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원 입구에 다다르자 그녀는 잠시 멈추어 서더니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추추,  추추." 궁시렁대는 주름진 입가 위로 묘한 눈빛이 새어 나왔다. 치졸한 인간 군상과 세속을 비웃는 모멸의 시선이었다. 이윽고 노파는 사원 안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금빛의 산양  마리가 내리쬐는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미끄러운 언덕길 위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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