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기분 좋은 꿈을. 별안간 쾌활하고 야심만만한 몽중몽을! 그래서인지 곧장 눈이 떠졌다. 늦은 새벽 또는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맵시 있게 들어맞는 정장 차림으로 잠자리 위에 앉아 있다. 다 자란 성인의 모습. 젊으니 만큼 그럭저럭 봐줄 만도 했다. 어딘가로 향할 채비를 하던 모양이다. 중요한 곳. 반드시 가야만 하는 어딘가. 그러나 이제 막 잠에서 깨었는데? 멋진 직장이라도 얻었던가. 멋진 직장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보수를 많이 주는 곳. 욕심을 내보자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해주는 곳? 모르겠다.
낯이 익은 이 집은 또 어디인가. 기억이 났다. 네 식구가 모여 살던 18평 남짓 비좁은 아파트.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십 수년이 흘러 나는 다소 독거 생활에 집착하는 인간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이불과 베개가 사무치게 반갑다. 보드라운 감촉과 노스탤지어. 나의 어린 시절 유일무이한 안전지대. 내게도 스트로베리 필즈가 존재했다.
몽롱한 상태로 한참을 이불 위에 앉아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였다. 그녀는 늦었으니 얼른 아침을 먹으라며 나를 닦달했다. 그 순간 집안 가득한 생선 굽는 냄새가 잠든 후각을 일깨웠다. 대개의 경우 임연수였다. 우리는 제각기 다양한 새벽 냄새를 간직하고 있다. 내게는 이 냄새가 곧 새벽이었다. 그나저나 늦었다니. 어딜?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이 나라의 교육 과정 12년 내내 나는 어머니를 괴롭혔다. 선뜻 제 발로 일어나 학교에 간 적이 과연 몇 번이나 되었던가. 허구한 날 잠투정을 부렸다. 그녀 덕분에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개근상도 받았다. 성실 이데올로기의 산물! 아무쪼록 이 상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바쳐야 마땅하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일찌감치 집을 나서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녀는 대형 병원의 하청 업체 직원이자 어느 식당의 홀서빙 파트타이머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는 병동의 침구를 갈았고 밤이면 음식과 반찬을 날랐다. 새벽에는 이 빌어먹을 불효자의 식사를!
도무지 어디를 가야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늑장을 부렸다. 비몽사몽 웅얼거렸다. "입맛이 없어요. 그나저나 늦었다니요. 어디엘?"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이 꿈 또는 연극에서 퇴장했다. 그게 아니면 출근을 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도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느닷없이 한 곳이 떠올랐다. 허름한 학교의 운동장.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냉철한 인상의 사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나타나면 엄벌이라도 내리려는 걸까.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삶을 통틀어 나를 두렵게 만들었던 모든 이들의 총체? 게다가 나는 학생도 아니다. 왜 나를 기다릴까. 동시에 일종의 약속된 시간이 생겨났다. 등교나 출근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더구나 그 시간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나는 영문도 모르게 지각생이 될 운명이었다. 더러는 낙오자. 나는 자책을 했다. 자책하는 모습이 웃겨서 또 자책을 했다.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버스를 잡아탔다. 그러나 버스는 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실어갔다. 더 엉뚱한 곳으로 가기 전에 서둘러 내렸다.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 모든 상황이 어처구니없었으니. 그리고 몰려드는 공포! 이렇게 된 이상 전력을 다해 뛰기로 결심했다. 헐떡이는 모습을 보이면 용서를 받으리라. 누구로부터?
정신없이 뛰었다. 태양과 가까운 언덕을 오르자 내리막길이었다. 능선의 끝자락까지 뜨거운 아지랑이가 일었다. 몇 대의 버스가 내 앞을 지나치거나 뒤에서 나를 비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빴다. 목구멍이 따끔거렸고 내 존재만 인식할 뿐 육체는 느껴지지 않았다. 땀이 흘렀던가? 같은 방향의 버스가 나타나면 재빨리 잡아탈 심산이었다. 하지만 온통 엉뚱한 버스뿐이었다. 엉뚱한 버스란 그간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거니와 더욱이 앞으로도 없을 법한 그런 노선을 의미한다.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내 삶과 하등 관련이 없을 버스 말이다. 승객도 없는 저런 노선은 없애버려도 되지 않을까. 인력 낭비! 기름 낭비! 보다 많은 승객을 실어 나를 노선을 증차하는 편이 공공에 이익이 되리라. 이렇듯 몰인정한 공리주의적 상상을 품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때 맞은편에서 한 중년의 여인이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여인은 머리에 보따리를 인 채 팔 한쪽을 뻗어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차츰 가까워지더니 나를 빠르게 스쳐간 그녀의 표정은 그야말로 울상이었다. 한껏 구겨지고 그늘진 이목구비가 마치 근대 흑백 사진에서나 볼 법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버스를 쫓고 있다. 없애도 무방한 버스가 수많은 사람을 싣고 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