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날, 영화 <Melancholia>
2011년에 릴리스된 덴마크 아트 필름 <멜랑콜리아 (Melancholia)>는 라스 폰 트라이어의 <우울증 삼부작 (The Depression Triliogy)>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 주연)>에서 메리 제인(MJ) 역할을 맡았던 커스틴 던스트가 다가오는 지구 종말을 감지하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드는 져스틴(Justine) 역할을 맡았다.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이 비극적인 종말을 암시하는 가운데, 아트 필름답게 대사를 통한 설명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화면 구성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 나갔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바뀌던 해, Y2K로 인해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또한 마야 문명의 유적지에 기록되어 있다는 2012년 인류 멸망의 예언은 영화 <2012>의 마케팅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AMC를 통해 현재 열한 번째 시즌이 방송 중인 포스트아포칼립틱 드라마 <워킹 데드>가 미국인들이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 중의 하나라는 통계가 있듯이, 지구 멸망이나 인류 종말이라는 주제는 항시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인류 종말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멜랑콜리아>는 그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하나의 거대한 행성이 있다. 사람들이 그 행성에 대해 알고 있는지 영화 초반부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내가 보기엔 그 행성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 같기는 하다. 골프장 한가운데 설치된 천체 망원경하며, 갓 결혼한 신랑의 정성 어린 선물에 대해 신부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의미가 없는 걸 알지 않냐고 되묻는 걸 비추어 보아 서 말이다.
아무튼 이 영화가 종말을 주제로 다루면서 그 시작은 결혼식 장면이다. 결혼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전제로 하는 사건이다.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함께 늙어가고. 그런데, 그 미래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행성에 의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다. 결혼식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인지 그들의 일상생활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신부인 져스틴만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 채 신부답지 않은 행동을 거듭한다. 피로연 도중 욕조에 들어앉아 생각에 잠기고, 골프장으로 나가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고, 첫날밤을 치르려다 말고 바깥으로 나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신랑은 결국 결혼식장을 떠나가고, 져스틴은 그 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우울증에 빠져 지낸다. 동물들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전,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본능에 가까운 이 육감이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걸까? 져스틴은 다가오는 지구 종말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우울증이라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인류의 삶은 지구가 존재하는 한 가능하며, 우리의 삶의 터전이 내일 산산조각 나버린다면 오늘의 삶은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닌 예정된 죽음을 사는 것일 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재난 영화나 포스트아포칼립틱 영화 대부분은 '생존' 특히 '나(가족도 포함됨)의 생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영화 <2012>를 보면 7척의 배에 탑승한 사람들 외의 인류는 전부 수장된다. 배에 인간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물이 다 빠져서 육지가 드러날 때까지 필요한 양식이 충분히 있다고 가정하자. 7척의 배에 탑승한 사람의 수로 과연 인류라는 종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근친교배는 종의 퀄리티를 떨어뜨린다. 하나의 종이 유지되려면 개체가 일정 수 이상이 되어야 한다. 마치 멸종되어가는 시베리아 호랑이 100마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개체는 살아남아 천수를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종의 존속은 불가능하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지구 종말이라는 인간 한계의 상황을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인류 전체가 패닉에 빠질 법도 할만한 상황인데, 사람마다 종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가 다르다. 져스틴의 형부인 존 은 과학자들이 예측하듯이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 옆을 스쳐 지나갈 것으로 믿는다. 존의 아내이자 져스틴의 언니인 클레어는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행성과 무관하게 일상생활을 변함없이 유지한다. 그러다가 말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행성 멜랑콜리아에 대한 리서치를 하게 되고, 급기야 지구와 충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영화 <멜랑콜리아>에는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행성을 피해 목숨을 건지고자 지구를 탈출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태운 우주 왕복선이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라는 존 던의 시의 한 구절처럼, 인류의 삶은 그 터전인 지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져스틴은 다가오는 지구 종말을 감지하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들지만,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마침내 겸허히 받아들인다.
종말은 말 그대로 마지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