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군바위 설화

실패는 다른 방향을 알려 준다

by 꼭그래

들어가며


장군바위 설화는 현장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해 준 설화다. 일할 때에는 주말에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보고 여행지와 관련 정보를 모은다. 미리 어떤 내용의 설화라는 가정을 한 후 글을 먼저 쓰고 나중에 현장의 사진과 이야기를 더하는 방식이었다. 대체로 비슷하게 맞았다.


그런데, 장군바위 설화를 통해 사전에 다양한 가설을 세울 수는 있겠지만 확실한 검증은 현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처음에 바위 설화를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으나 장군바위를 접하고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감출 수도 있고, 이 글이 없다 하더라도 맥락에는 상관없어 뺄까 했지만, 실패는 때로 옳은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넣었다. 겨울부터 봄까지 주말에 기록하면서 미리 분석을 시도한 글이다.


선바위 설화

선바위, 영양관광청.jpg
신선바위_01.JPG

좌측부터 경북 영양군 선바위와 남이포다. 남이포의 절경에 압도되어 선바위 사진을 찍었지만 지웠던 것 같다. 그래서 영양 문화관광청 사진으로 대신한다. 선바위와 남이포에는 남 이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운룡지(雲龍地)의 지룡(地龍)의 아들인 아룡(阿龍)과 자룡(子龍) 형제가 있었는데 역모를 꾀하여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남이장군(南怡將軍)에게 토벌할 것을 명하니 남이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 아룡과 자룡을 남이포에서 물리치고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 하는데 그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라 한다.


장군바위 설화


장군(장사) 바위 혹은 애기장수(아기장수, 우투리(윗도리) 이야기) 설화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아기장수의 겨드랑이에 날개나 용의 비늘을 달고 태어났다는 날개형과 아기장수를 곡식으로 눌러 죽였다는 곡식형이다.


날개형 1)


어느 산골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이를 얻기 위해 깊은 산에 기도를 몇 해 올리기를 몇 해 하던 중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 아이를 줄 터이니 아이가 사라지거든 따라가지 말라 전했다.

산에서 내려온 노부는 사내아이를 얻게 되었다. 아이는 특이하게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있었다. 아이는 성장이 빨랐으며 기골과 지혜가 남달라 몇 달 만에 몇 해 성장한 아이와 같았다. 일곱 달 되던 무렵 아이가 종종 집을 나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부부는 수상히 여겨 아이의 뒤를 쫓아갔다. 어느 깊은 산속에 이르자 하얀 말 한 마리가 날아왔다. 아이는 말을 타고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칼을 휘두르며 무예를 펼치는 것이었다.


아들에게 비범한 능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부모는 걱정을 하게 된다. 당시에 집안에 장수가 나면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모두 죽임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아들을 죽이기로 한다.


하지만 아이가 워낙 재빠르고 꾀가 많은지라 부부는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부모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노부부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아기장수는 부모에게 자신의 날개를 자르라 한다.


아들의 말대로 하자 아들이 죽었다. 그가 죽자 산에서 용마가 나와 사흘을 돌아다니며 울다가 연못에 빠져 죽었다. 지금도 아기장수가 무예를 닦던 곳 근처 바위에는 아기장수의 손바닥과 용마의 발자국이 찍혀있다.


날개형 2)


한 집에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날 때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있는 것을 발견한 부모는 늘 그것을 감추면서 아이를 키웠다. 아이가 자라 서당을 다니게 되었다. 훈장이 아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살펴보니, 아이가 저 정이 되면 나막신을 신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훈장이 미행을 하였다.

아이는 산으로 올라가 어느 곳에 멈춰서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백마가 나와 아이가 그것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칼싸움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안 훈장은 아이의 부모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아이를 죽이라고 하였다. 부모는 뱃놀이를 하자며 아이를 데리고 나가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곡물형 1)


어느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 부모들은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이 비범함을 알게 되었다. 장수가 되면 역적이 된다는 말이 있어 집안이 몰락할까 두려워한 부모는 콩 몇 섬을 아들 위에 올려놓아 죽였다.


곡물형 2)

어느 집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날개가 달려있는 장사였다. 그 시절에는 장사가 나면 역적이 되어 나라를 범할 것을 염려하여 그가 태어난 집안의 삼족을 멸하였다. 이를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장수의 날개를 잘라서 죽였다. 아기장수가 죽기 전에 무덤 주위에 생콩을 뿌려달라고 하였는데, 부모가 볶은 콩을 뿌려주었다. 그 후 석 달이 지나자 산에서 용마가 나와 장수의 무덤 앞에서 죽었다. 볶지 않고 콩을 뿌려주었으면 장수는 부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좌절되어 용마와 장수는 모두 죽게 되었다.


비범한 재능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한국 구전설화 중에서 가장 비극적 이야기다. 자식의 재능이 많았으면 하는 지금에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당시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설화가 전해지는 지역을 통해서 이 이야기가 왜 만들어졌는지 대략적인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전라남도 담양과 고흥에서는 날개형이 전해지며, 강원도 횡성, 태백에서는 곡물형 장군바위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두 지역과 관련되어 있으며 역모라는 소재의 설화가 생성되게 하는 사람. 역모에 휘말려 죽은 인물, 허균이다. 그리고 이 날개형과 곡물형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도 짐작하게 한다. 전남 담양의 장군바위를 찾아가기 전에 허균에 관해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다.


허균(1569 ~ 1618)과 홍길동전


허균은 양천 허씨 가문의 부친 초당 허엽의 첫째 부인 한씨가 죽자 강릉 김씨와 재취해 낳은 아들이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허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칭찬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 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추연 만은 그 시를 보고 “후일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허균의 말로 또한 그와 같았으니, 광해군 10년(1618년)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 정 아무개가 온다.”라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기준 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광해군, 1618년) 신임을 얻은 뒤에 기회를 노려 반란을 계획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허균 또한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능지처참(살을 칼로 도려냄)에 처해진다. 장군바위 설화는 허균의 삶과 아주 유사해 보인다.


유형별로 차이가 나는데, 날개형의 이야기는 유배지였던 전라도에서는 그의 몰락을, 그가 태어난 강원도에서는 그의 죽음을 더 부각한 곡물형이다. 두 지역의 같은 점은 허균이 능지처참을 당해 그의 육신이 분리된 것처럼 말 바위, 갑옷을 벗어 놓았다는 갑옷 바위(우투리 바위)와 투구바위, 칼바위 등이 장군바위 근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다. 장군바위 설화도 경주의 처녀 바위 설화처럼 서로 다른 바위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허균이 실제 역모를 계획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역모를 계획했을 것이라 의심하게 하는 것은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 때문이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서얼 출신인 홍길동이 도술로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새로운 이상세계인 율도국을 개국한다는 내용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역모와 관련 지어 생각되기 때문이다. 허균의 태생과 주변 환경은 홍길동전을 쓸 수 있기는 하다.


출생과 친분


그에게 홍길동전을 구상하게 했던 것은 그의 삶이다. 전란 중에는 서얼을 등용했다가 전란이 끝난 뒤에는 서얼들의 관직을 박탈해 다시 서얼들을 차별하는 사회적 배경과 그런 서얼들과 허균이 친분이 깊었다. 또 형의 친구인 손곡(蓀谷) 이달(李達) 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도 서얼 출신이었다. 본인 또한 본처 소생이 아니었기에 서얼 출신들과 친분을 쌓았다.


유배지


기자조선에서 쫓겨나 새로운 땅에서 나라를 세운 기준 왕 설화가 전해지는 전라북도 익산 함열읍으로 귀양을 가게 된 점과 또 다른 귀양지인 전라남도 담양에 전해지는 전우치 설화 등은 허균에게 홍길동전의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삶의 행로에서 충분히 홍길동전을 구상할 이야기들이 제공되기는 했다. 그렇다면 홍길동전에 영향을 준 두 이야기, 기준왕과 전우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준왕(箕準王)


기자의 41대손. BC 195년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조선의 패수를 건너와 기준왕箕準王 에게 투항하고 살 곳을 요청했다. 기준왕은 박사 벼슬과 제사의식 때 쓰는 규(圭)를 하사하고 서쪽 땅 백리를 주어 서쪽 국경을 지키며 살게 했다.


위만은 기존에 피난 와 살고 있는 연, 제, 조나라 출신의 주민과 한나라에서 계속 망명해 오는 주민을 꾀어 세력을 키운 후 BC194년경, 기준왕에게 한(漢) 나라 군사들이 열 갈래로 나누어 침략해 오니 도성에 들어가 왕을 보호하겠다는 거짓 보고하고 군사를 몰아 기준왕을 공격했다.


기습으로 위만에 패한 기준왕은 좌우의 궁인들과 바다로 피신하여 마한 땅에 도착하여 스스로 한(韓) 왕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왕을 애왕(哀王)이라 하며 마한시대의 기준왕은 무강왕(武康王)이라 칭했다.


기준의 8 세손 마한(馬韓) 원왕(元王) 기훈(箕勳)에 이르러 세 아들이 있으니, 우평(友平)은 용강(龍岡)으로 돌아가서 북원(北原) 선우(鮮于)씨가 되고, 우량(友諒)은 마한의 옛 제도에 따라 상당(上黨, 청주)은 한(韓)씨가 되었다.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돌아가 덕양(德陽, 행주) 기(奇)씨가 되었다. [행주 기씨 대종중]


전라북도 지역에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기준왕에 관한 이야기로는, 위만에 쫓겨 바다를 건너 전라북도 부안 해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내륙으로 이동해 지금의 전북 익산 금마면에 나라를 세우고 한(韓) 왕이 되었다 전해지는데, 익산을 남북으로 갈라 동북쪽, 지금의 미륵산과 미륵사지터가 자리한 쪽에 나라를 세웠다 전해진다.


금마면 옆의 낭상면에는 낭산토성이 있는데, 당시 기준이 축성한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익산과 김제를 가르는 만경강을 기준으로 김제는 김제평야라 하고 금마에서 시작되어 만경강까지를 왕의 땅이라는 왕지평이라 한다. 만경강 근처 춘포면 마을 사람들 말에 따르면 기준왕 창고터가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무왕(武王)의 무덤이라 하는 익산 쌍릉도 지역민들은 기준왕의 무덤을 백제시대에 재 매장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무강왕은 기록에 없다며 무왕이 맞다고 하는데, 일연은 아마도 익산의 무강왕(武康王)과 무왕(武王)을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준이 기자의 후손인 증거가 부족해 학계에서는 준왕準王이라 한다.


전우치(田禹治)


본관은 남양 전씨(南陽 田氏), 호는 우사(雨士), 전라남도 담양이 고향이며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송도의 미관말직의 관리로 일하다 서얼 출신으로서 출세의 가능성이 없다 판단해 관직을 관두고 도가 계열의 책을 공부했다. 서경덕과 같은 문인들과 어울렸다.


전라남도 담양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옥사했으나 그의 동문에게 책을 빌려가기를 한참이어서 동문 차식이 전우치의 집에 찾아갔으나 전우치가 책을 빌려간 때는 이미 죽은 지 한참 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문 차식이 전우치의 죽음을 기이하게 여기고 고향 담양에 이장하려 전우치의 무덤을 팠으나 전우치의 시신이 사라져 있었다 한다.


호남지역에는 전우치 설화가 전해지는데 훗날 그의 이야기가 소설이 된다. 허균은 당시에 구전으로 전해지던 전우치에 대한 인물과 기준왕, 그리고 조선의 현실을 소재로 홍길동전을 썼을 수도 있다.


전우치 설화와 홍길동전이 다른 점은 이상향의 세계가 어디에 위치하느냐다. 전우치의 이상향은 그림 속 다른 초월적 세상에 세웠다면 홍길동전의 율도국은 기준왕이 조선에서 쫓겨나 익산 금마에 한韓을 세웠듯 허균 또한 자신의 정치적 이상 세계를 조선이라는 실재하는 곳에 새롭게 세우고 싶어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40년 사헌부의 허균 탄핵에 관한 상소문


『삼척 부사(三陟府使) 허균(許筠)은 유가(儒家)의 아들로 그 부형이 종사하던 것과는 반대로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불경을 외며 평소에도 치의(緇衣)를 입고 부처에게 절을 하였고, 수령이 되었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재(齎)를 열어 반승(飯僧)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으며, 심지어 중국 사신이 나왔을 때에는 방자하게 선담(禪談) 불어(佛語)를 하며 부처를 좋아하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중국 사신의 눈을 현혹시켰으니, 매우 해괴하고 놀랍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 사습(士習)을 바로 잡으소서.(선조 40년 5월 4일)


밥을 먹을 때면 반드시 식경(食經)을 외고, 항상 작은 부처를 모셔두고는 새벽이면 반드시 설위(設位)하고 치의를 입고 염주를 걸고서 절하고 염불(念佛)하면서 불제자(佛弟子)라 자칭하니, 승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을 대하여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는 일이 없다는 것은 반드시 부연하여 전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은 비록 미세하지만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고 지금의 사풍(士風)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빨리 파직하고 서용 하지 말라고 명하시어 천백의 사람을 경계하소서.』


선조 40년 5월 5일의 상소문이다. 허균은 불교에 심취했었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儒敎)의 나라인 조선에서 이단이라 할 수 있는 도교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광해군 때에 사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서책을 광해군에게 보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사찰에 드나든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기준왕, 전우치, 허균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장군바위는 허균의 새 세상을 희망이 좌절된 것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허균과 관련된 설화인지 전남 담양의 장군바위를 찾았다.


장군바위


장군바위2.jpg
장군바위1.jpg

장군바위(애기바위)다. 성별로는 수 바위로 예상했으나 두 개의 암 바위다. 그리고 두 바위 아래에는 또 작은 바위 하나가 있었다. 장군바위 바로 밑 바위를 살펴보면 바위 옆에 고무 대야와 물컵이 놓여있고, 대야 안을 살펴보면 물이 가득 차 있고 고무 호스로 물이 나오고 있었다. 물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지만 장군바위 앞에 있는 하천으로 흘러간다.

장군바위3.jpg
장군바위_01.JPG

장군바위라는 곳에는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암 바위에 물이 흘러나오는 장군바위. 허균의 죽음과 장군바위 설화, 그리고 마주한 장군바위와는 연관성을 찾을 단서가 없었다.


암 바위와 수 바위 : 남근석처럼 기다란 바위를 남성성을 가진 수 바위라 하고, 넓적하거나 큰 덩어리의 바위를 암 바위라 한다. 이 두 성질을 이용해 옛사람들은 습도를 조절하기도 했다. 습도가 높은 주택에서는 수 바위를 놓아 바람의 흐름이 빠르게 했으며, 건조한 주택에서는 암바위를 쌓아 바람과 공기가 오래 머물게 했다.


허균과 관련 있다 생각되었으나 오히려 담양 장군바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에 전해지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금와왕 출생에 관해 전해지고 있는 한 바위와 관련된 이야기다.


『부여 해부루가 늦게까지 아들이 없어 후사를 얻기 위해 산천에 제사를 지내 돌아가는 길에, 큰 돌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보여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돌을 젖히게 하니 금색으로 된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으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태자가 되었다.』


삼국사기 금와왕 탄생 기록으로 보자면 장군바위는 역모가 아니라, 출산과 관련성이 더 많아 보입니다. 장군바위가 암 바위라는 점, 그리고 애기장수설화가 출산과 관련된 점에서 장군바위는 아들을 낳기 위해 여인들이 기원했던 기자(祈子) 바위였다. 우리 산천에 수많은 바위들에는 기자 치성을 올렸던 곳이 있는데, 그 바위들에 설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아들을 낳게 해 달라던 기자 신앙이 그렇게 중요했었나 보다. 기자 신앙에 관해 알아봐야 했다.


기자 신앙(祈子信仰)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결혼을 한 뒤에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허물)을 어긴 것으로 여겨 이혼을 당해 친정으로 쫓겨났다. 옛 여성들이 산신이나 자연 신앙의 대상에 아들을 얻기 위해 기원하던 신앙행위다. 가장 오래된 기자 신앙의 기원을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웅녀가 아들을 얻기 위해 단수(壇樹)에 기도를 올리니 환웅이 호응해 단군을 낳았다 전해지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자 신앙의 기원이다. 이 땅의 여인들은 고대국가에서는 왕조의 대를 이어야 했겠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민중들도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를 져야 했다.

김제 귀신사 사자석수.jpg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jpg

전북 김제 금산사 근처의 귀신사에는 사자 석수라는 남근석을 사찰 안으로 들여놓았다. 전북 부안군 개암사의 산신각이다. 이런 곳에서 아들 낳게 해 달라는 치성을 올리기도 했지만, 옛 장소는 금와왕 탄생설화의 장소처럼 신단수(神壇樹)와 큰 바위였다. 삼신, 산신, 칠성신, 용신, 부처를 대상이었으며 영험하다는 무당을 따라 당집이나 기도터에서 치성을 드리거나, 사찰의 무속신앙 수용장소인 칠성각, 삼신각, 산신각에서 치성을 올리기도 했다. 또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아들 낳은 집의 금줄과 수탉의 불알, 돌부처의 코를 갈아먹기도 했으며 씨앗과 관련된 은행이나 밤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아들을 얻기 위해 치성을 드리는 바위를 기자암, 장군바위, 애기암, 치성 바위, 아들바위라 한다. 전남 담양의 장군바위도 아들을 얻기 위한 기자 신앙의 대상인 기자암(祈子巖)이었을 것이다. 기준왕, 전우치, 허균의 홍길동전과 상관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평범한 아이 얻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허균과 역모와 관련된 추론이 완전히 틀렸다 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자료 해석과 장군바위를 직접 찾아본 현장 해석에 차이가 있었다. 이렇듯 어떤 것을 보지 않고 짐작만으로는 해석의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설화를 텍스트에서 현실로 끌어내는 것이어야 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위 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