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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설화

바위에도 이야기가 있다

by 꼭그래

바위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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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를 피해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경상북도 경주의 일천一千 바위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전남 무안군 해제면의 물 바위다. 이 두 바위는 사람의 생명과 관련 있다. 사람을 사려낸 바위와 해안의 만조(고조)와 간조(저조)의 측정을 할 수 있어 만조 때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추량 측정 용도의 바위다. 학계에서는 용못, 장자못과 함께 홍수 설화로 분류된다. 하지만 바위 설화에는 홍수 설화처럼 생명의 위협도 있지만, 일천 바위와 물 바위와 같이 생명의 보호의 의미도 있다. 바위와 물의 결합은 어쨌거나 생명과 관련 있다. 어떻게 옛사람들은 바위가 생명과 관련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이유를 찾았다. 먼저 전라남도 장흥의 억불산에 있는 며느리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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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바위는 사람이 산 아래를 보고 있는 듯하다.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장자못 설화에 등장하는 며느리 바위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며느리 바위 위에서 산 아래를 보니 저수지가 보였다. 바위와 물이 밀접한 관계라 생각했다면 바위 설화에서는 항상 물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바위 설화들을 찾았다.


쌀바위 설화


쌀바위.jpg 부여군 미암사의 쌀바위


『옛날 한 비구니가 불공을 드리러 찾아오고는 했다. 비구니의 불공에 감복해, 어느 날 꿈에 부처가 나타나 흰 바위의 구멍에서 쌀이 나오게 될 것이라 말해준다. 그래서 다음날 비구니는 바위 밑에서 그날 먹을 식량만큼 쌀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비구니 욕심이나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뚫어 더 많은 쌀을 가져가려는 욕심이 생겼다. 가지고 간 부지깽이로 구멍을 찌르니 구멍에서 쌀이 아니라 피가 흘러나오더니 그 뒤로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한다.』


충남 부여군의 미암사의 쌀바위에 전해지는 설화다. 욕심 때문에 바위가 더 이상 쌀을 주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쌀바위는 근처의 다른 바위보다 석영 함량이 많아 하얀색을 띠고 있다. 부여의 쌀바위는 흰색 때문에 생긴 이야기라 생각된다.


울산 가지산의 쌀바위도 흰빛을 띄고 있는데 바위에 구멍이 나 있다. 하얀색 쌀 바위는 지역을 달리해도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옛사람들의 세계관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쌀 바위 근처에 물이 흐른다. 계곡물이 아니라 비가 오면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의 낙수이기는 하다.


술바위(누룩바위) 설화


누룩바위.jpg 의성군 석탑리, 누룩바위


『경상북도 의성군 석탑리의 누룩바위는 예전에는 술이 나왔다. 바위 아래 빈 공간에 술 담을 그릇을 놓아두면 술로 채워져 누룩바위라 불렸다. 한 사람에게 딱 한잔만을 허락했다고 하는데, 어느 날 한 불량배가 두 잔을 마시더니 더 마시려 하자 누룩바위에서는 더 이상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한다.』


퇴적암으로 된 누룩바위입니다. 바위에 푸른곰팡이처럼 보이는 이끼 때문에 누룩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누룩바위 하단의 빈 공간에 잔을 놓으면 술이 채워진 것이 아니라 물이 떨어진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상인들이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지나쳤다고 한다. 더운 여름날 갈증이 날 때 이 누룩 같은 바위를 찾아 떨어지는 물을 마시며 술을 생각해 낸 듯하다.


처녀 바위 설화


경주 관음사 곰바위.jpg 경주 관음사의 곰바위(사자바위)


『신라시대 어느 처녀가 살고 있었다. 꽃다운 나이에 이르자 뭇 남자들이 그 처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처녀는 결혼보다는 속세를 떠나 부처님 세계인 열반에 살 것을 결심했다.


갱의암(更衣岩)에 이르러 처녀가 속세의 옷을 벗고 잿빛 승복으로 갈아입자 산짐승들이 길을 막았답니다. 살쾡이(고양이)가 등을 구부린 채 위협했습니다. 그다음 간사스러운 개(여우), 심술궂은 산돼지, 무서운 귀신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물리친 처녀는 계곡 암자에 이르러 정진에 열중했다.


계곡에서 처녀가 목욕을 하자 이무기가 덮칠 듯 산 위에서 위협했다. 그러나 큰 곰이 부처님을 동경하여 수도하는 처녀를 보살펴 주었다. 거북이도 눈을 부릅뜬 채 엎드려 처녀 곁을 지켰다.


수도를 마친 처녀가 부처님 세계로 향하는 산등성이로 올라서자 똥 무더기가 처녀를 가로막았지만 진리의 마음을 깨친 처녀는 더러움도 포용한 채 열반의 세계로 향했다. 멀리 산마루에서 할머니가 성도한 처녀를 반가이 맞이하고 있었다. 처녀는 할머니를 따라 열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들어갔다.』열반에 든 처녀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에 있는 남산(금오산) 열반 골에는 처녀의 열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한 처녀가 갖은 고생을 거쳐 열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용장리에서 관음사를 지나면 처녀의 열반 설화와 관련된 동물 이름 바위가 놓여 있습니다. 용장리 관음사에는 처녀를 지켜주었다는 곰바위(사자바위)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각각의 이름 바위들을 통해서 한 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관음사가 세워진 뒤에 동물의 형상과 비슷한 바위들에 이름이 붙여지고 그 이름들을 모아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경주의 처녀 바위 설화는 바위들을 한데 엮어 완벽한 서사구조의 이야기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의 바위들은 복잡한 서사구조보다는 바위가 이름이 붙여진 이유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호랑이 바위


산간지역에는 호환이 자주 발생하여 호랑이에 피해를 입은 것을 나타내 주는 피(혈액) 바위와 호랑이를 닮았다 해 호랑이 바위들이 많다. 자신들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큰 것들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인 바위가 대표적인데, 여인이 호랑이에게 잡혀가 죽어 호랑이의 형상인 호암(虎巖), 호랑이에 죽임을 당한 여인이 떨어뜨린 비녀와 닮았다 해서 비녀 바위, 여인의 피가 떨어졌다는 피 바위가 산악 지역에 많은 편이다..


벼락바위


벼락바위.jpg 강원도 속초, 벼락바위


『몹시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두 남자가 홍수를 피해 산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곡을 건너려는데, 불어난 물 때문에 쉽게 건널 수 없었다. 그러다 계곡 한가운데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남자 둘은 그 바위에 올라가 점점 불어나는 불을 피해 바위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 근처에 큰 구렁이가 다가왔다. 구렁이(혹은, 독사, 지네)도 불어난 물을 피하려던 것이었다. 남자들은 두려워하며 바위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구렁이는 바위에 오르자 남자 둘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구렁이에게 떨어졌다. 구렁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바위도 함께 두 동강이 났다 하여 벼락바위라 불려졌다. 그 이후 마을의 수호 바위가 되어 마을 사람들이 제(祭)를 지냈다 한다.]』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에는 벼락바위 설화가 특히 많이 전해지고 있다. 바위와 계곡이 많기 때문이다. 벼락이 치면 사람들은 큰 바위 밑으로 몸을 피했을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바위에는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는 신성한 힘이 있다 생각해 바위에 제사를 지냈다. 사진은 강원도 속초의 도천 삼거리, 도천교에서 바라 본 벼락바위다. 상당히 큰 바위가 두 동강 난 모습이다. 지금도 제를 지내는지는 알 수 없다. 벼락바위는 물이 흐르는 천에 놓여 있다. 역시 물과 관련되어 있다.


강원의 산천을 돌아보면, 돌이 많은 척박한 농지다.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돌은 원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벼락바위 설화는 자신들에게 힘든 삶을 주는 돌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다른 형태인 신앙적 형태로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돌이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면 원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돌이 바위에서 벼락에 맞아 인간을 위해 희생하면서 떨어져 나갔다면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바위 설화(동박삭 바위)


『동방삭의 명은 삼십갑자였다. 삼십갑자가 되던 해에 동방삭은 저승사자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을 미리 알고 저승사자를 대접할 음식을 잔뜩 마련하였다. 동방삭을 데리러 온 저승차사는 뜻밖의 대접을 받고, 그 사례를 하지 않을 수 없어 동방삭의 수명을 삼십에서 삼천으로 고쳐주었다(혹은, 음식을 먹고 꾸벅꾸벅 졸다가 십자에(三十) 자에 한 획을 더 그어 삼천(三千)이 된다). 삼천갑자를 살고 영악해진 동방삭은 죽을 날이 되었지만(혹은, 지났지만) 저승차사를 피해 도망 다녔다. 그러자 저승차사는 동방삭을 찾아내기 위하여 여인으로 <혹은, 할미, 마고할미> 변신하여 냇가에서 숯을 씻고 있었다. 그것을 본 동방삭이 “왜 숯을 씻고 있느냐.”라고 문자 여인은 “하얗게 되라고 씻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동방삭은 “내가 삼천갑자를 살도록 숯이 하얗게 되라고 씻는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하였고, 여인으로 변신한 저승차사는 그자가 동방삭임을 알고 저승으로 데려갔다. [한국 구비문학 대계, 223-6-(1)], <> 안의 글은 다른 설화의 내용을 추가 보완했음』


동바위 설화와 관련된 하천 지명이 탄천이다. 상류의 검은 바위에서 과거 저승차사가 숯을 씻어 하천 물이 검어졌다고 전해진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 2리는 동방삭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동바우 마을이라 한다. 청도군에서는 실제로 숯을 제조하던 곳이 있었는데 그 숯은 근처의 솥을 만드는 곳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물빛이 검고 상류에 검은 바위가 있는 곳에서는 탄천이라는 지명이 많다. 옛사람들이 알 수 없는 자연현상에 관해 동방삭의 이야기로 설명한 것이다.


치마바위와 부랄바위

부랄바위.jpg 안동시 상원사 가늘 길의 바위로 부랄바위를 대신했다


안동시 와룡면의 부랄바위는 훼손되어 상원사로 가는 길목의 비슷한 모양의 바위로 대신했다. 부랄바위는 고인돌의 모습과 유사하다. 위에 있는 바위가 굴러 떨어져 아래의 바위를 둘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부랄바위 건너에는 치마를 펼쳐 놓은 것 같이 넓고 평평해서 치마바위라 한다.


부랄바위와 치마바위는 바위의 성별과 관련이 있다. 숫바위인 부랄바위와 암 바위인 치마바위, 사람의 출산에 관련된 바위로 여성이 오른손으로 돌을 던져 치마바위에 올려놓으면 딸을 낳고 왼손으로 던져 부랄바위에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딸아이는 낳기 쉽고 아들은 낳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농경생활에서는 여자 아이보다는 남자아이를 원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부랄바위와 치마바위 근처에는 물이 없었다.


상사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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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국사골에 할아버지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할머니 무덤으로 찾아가 울곤 했다. 동네 아이들을 손자처럼 귀여워했다.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하며 따랐다. 그중 피리라는 이웃 소녀가 무척 따랐다. 할아버지는 피리를 친 손녀처럼 대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는 귀도 어둡고 눈도 잘 보이지 않기에 피리는 할아버지를 친할아버지처럼 봉양했다. 어느덧 피리도 무럭무럭 자라 꽃다운 처녀가 되었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피리가 이사를 한 후너 무 외롭고 쓸쓸했다. 어느 해 가을날 할아버지는 피리 소녀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때서야 자신이 피리를 손녀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 마음속에는 온통 피리 모습뿐 이였다. 눈을 뜨면 산마루에, 눈을 감으면 눈 속에 피리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피리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할아버지는 너무 고통스러워 죽을 결심을 하고 국사골 큰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날 이후부터 피리는 밤마다 할아버지 꿈을 꾸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큰 뱀이 되어 밤마다 피리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때마다 비몽사몽 정신이 혼미해져 피리는 나날이병약해졌다. 피리는 밤마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뱀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밤마다 꿈속에 피리에게 다가오는 할아버지가 그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피리의 꿈속에 할아버지가 울면서 나타났다. “아무리 피리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국사골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는데 죽어서도 피리를 밤마다 괴롭히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 말하는 것이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가 측은했다. 피리는 꿈속의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피리가 멈춘 곳은 할아버지가 뛰어내린 국사골 큰 바위였다. 피리는 생각했다.


“생전에는 나이 때문에 저와 사랑을 이룰 수 없었지만 천년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바위가 되어 변함없는 사랑으로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피리는 그곳 벼랑 끝에서 뛰어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치솟았다. 그 후 사람들은 그곳 두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불렀다. 지금도 큰 바위 아래 붉은 반점이 피리의 핏자국이라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상사바위 설화다. 경주 남산의 상사바위는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랑을 이루지 못해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슷한 이야기가 논산의 상사바위에도 전해지는데, 논산의 상사바위는 신분의 격차 때문에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남근석


설화는 사랑이야기지만 상사바위의 경주시를 향한 뒤편을 보면 출산과 관련된 남근석男根石으로 확인된다. 남근석 두 개가 차례로 놓여 있다. 상사바위 설화는 신분과 나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짝을 찾지 못한 비극적 사랑이야기다.


석불상 제작을 위한 채석장이나 작업장이 있는 곳에 상사바위가 앞은 넓다. 아마도 이곳 상사바위에서 어떤 제의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혼인과 출산을 중요시했던 농경 사회에서 신분이나 전쟁, 질병, 징용, 부역 때문에 혼인 적령기를 넘겨 짝을 찾지 못한 남녀가 결혼과 관련한 것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로 추정된다. 그래서 남근석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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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의 남근석이다. 무등산 자락이 동과 서로 뻗어있고 그 중간에 논이 있다. 서편에는 북北에서 남南으로 하천이 흐른다. 물이 흐르는 인근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다. 남근석 아래에는 작은 돌들을 올려 아들을 낳게 해 달라 기원했다. 그리고 돌을 올려놓는 것뿐만 아니라 남근석의 돌을 갈아먹기도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상사바위 인근의 마애불(석벽에 부처를 새김)이 있다는 점은 이곳이 종교적이면서 인간의 생명과 관련 있는 어떤 제의祭儀가 있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충남 예산 석조 사면불상


충남 예산의 석조 사면 불상이다. 한반도 최초의 사면 불상이지만 안타깝게도 얼굴은 사라졌다. 얼굴이 없어진 이유로는 전쟁의 피해, 타 종교인들의 훼손을 들기도 하지만 과거 남근석을 갈아먹고 아들을 낳게 해 달라던 기자 치성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바위설화에서 확인되는 것은 생명의 위협, 보호였으며 남근석에서는 생명의 탄생과 관련 있다. 설사 예산의 사면불상이 기자치성과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부랄바위와 치마바위, 상사바위까지 기자 치성과 그 근처에 마애불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토착신앙을 불교가 수용하려 했다는 흔적 으로 생각된다. 그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다음에 소개할 장군바위설화와 경주 망부석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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