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龍
용과 관계해 태어난 서동의 태생 신화와 국조 신화國祖神話를 보면 기이한 출생 담을 통해 권위를 내세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곰이었던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거나, 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거나, 물의 신의 딸과 천제의 아들 사이에 주몽이 태어나기도 한다. 고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설화에서는 용왕을 괴롭히던 여우를 활로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았으니 왕건의 아버지 왕륭의 태생 신화다. 왕조의 당위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조선 세종 때에는 용비어천가를 짓기도 한다. 민중들의 설화에서도 등장하지만 권력자들은 용의 후예임을 주장한다. 지금에야 그것을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 용은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존재였다. 용이라는 실체와 관념이 형성되게 되었는지에 관한 학설들을 통해서 옛사람들이 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보고 서동설화의 의미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옛사람들은 용을 실제 존재로 생각했었다는 설이다. “중화제일룡”이라 불리는 중국 허난 성 복양현 서수파 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용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기원전 6세기경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사람의 유골 옆 동서 방향으로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호랑이와 지금의 용과 비슷한 모습이 확인되기는 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좌청룡·우백호의 방위에 놓여 있다는 점을 들어 용과 호랑이라고 추정한다. 어쨌거나 중국인들은 용으로 보고 있으니 그들의 판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지만 악어와 구분할 수 없기는 하다.
중국인들은 용과 악어를 구분하지 못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시경의 大雅三(대아 삼) 제 3권 대아에서는 용기 양양(龍旂揚揚)의 문장과 제 8장 영대 (靈臺)에는 타고(鼉鼓 : 악어가죽으로 만든 북)라는 각각의 문자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용과 악어를 구분했다. 또한 옛 중국인들이 악어를 대룡(大龍), 뱀과 거북을 소룡(小龍)이라 칭하는 점을 들어 다양한 파충류를 통틀어 용이라 했다. 용은 악어보다 더 크고 뱀과 같이 파충류의 형상을 한 어떤 거대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한자가 상형문자이기에 직접 본 어떤 자연물을 보고 용(龍)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공룡의 화석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살아남은 공룡을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지금도 중국에서 발견되는 공룡 화석을 보고 용(龍)이라는 글자를 만들었으며, 화석이라는 개념을 잘 몰랐던 옛사람들은 뼈 밖에 남지 않은 모습 때문에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생각해 용을 불火과 관련해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최근까지도 중국인들은 공룡의 화석을 돌이 아니라 실제 뼈로 생각해 약제로 사용했다.
옛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자연현상인 용오름을 보고 용 관념을 만들게 되었다는 설이다. 설화에서 용의 형상보다는 주로 승천이라는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 있다. 한반도 바닷가에서도 간혹 목격되기도 한다.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용(龍)은 우리 옛말의 미르이며. “미르”의 어원은 고어 수(水)의 물과 어원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용을 물과 관련해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관자(管子) 형세 해(形勢解)를 보면 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용(龍)은 물에서 생활하며 항상 오색을 겸비하여 놀기 때문에 신(神)이라고 하며 작아지고자 하면 누에처럼 작아지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감출 만큼 커지고 높아지려면 구름을 뚫을 만큼 높아지고 낮아지려면 깊은 샘물에 숨을 수 있어 변화무쌍한 것이며 거북이(龜)와 용(龍)을 일컬어 신(神)이라고 합니다.』
물에서 생활하며 구름을 뚫을 만큼 높아지거나 작아질 수 있고 수면에서 발생하며 뇌우((雷雨)나 풍우(風雨)와 함께하는 용의 승천이라 했다는 점에서도 용오름과 비슷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2년의 기록을 보면, 세종이 제주 안무사에게 용의 승천과 관련해 조사를 하도록 지시했는데 역시 용오름에 관한 기록으로 보인다.
※안무사 - 전쟁, 반란, 재난이 있을 때 왕명으로 특별히 파견되어 민심을 수습하던 관리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에게 전지 하기를,
"병진년에 최해산(崔海山)이 도안 무사(都安撫使)가 되었을 때, 치보(馳報)하기를, ‘정의현(旌義縣)에서 다섯 마리의 용(龍)이 한꺼번에 승천(昇天)하였는데, 한 마리의 용이 도로 수풀 사이에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뒤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였는데, 용의 크고 작음과 모양과 빛깔과 다섯 마리 용의 형체를 분명히 살펴보았는가. 또 그 용의 전체를 보았는가, 그 머리나 꼬리를 보았는가, 다만 그 허리만을 보았는가? 용이 승천할 때에 운기(雲氣)와 천둥과 번개가 있었는가? 용이 처음에 뛰쳐나온 곳이 물속인가, 수풀 사이인가, 들판인가. 하늘로 올라간 곳이 인가(人家)에서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는가. 구경하던 사람이 있던 곳과는 거리가 또 몇 리나 되는가? 용 한 마리가 빙빙 돈 것이 오래되는가, 잠시간인가. 같은 시간에 바라다본 사람의 성명과, 용이 이처럼 하늘로 올라간 적이 그 전후에 또 있었는가와, 그 시간과 장소를 그때에 본 사람에게 방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제주 안무사가 아뢰기를,
"고로(古老)에게 방문하니, 지나간 병진년 8월에 다섯 용이 바닷속에서 솟아 올라와 네 용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운무(雲霧)가 자우룩하여 그 머리는 보지 못하였고, 한 용은 해변에 떨어져 금물도(今勿頭)에서 농목악(弄木岳)까지 뭍으로 갔는데, 풍우(風雨)가 거세게 일더니 역시 하늘로 올라갔다 하옵고, 이것 외에는 전후에 용의 형체를 본 것이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화석설이 용의 형상에, 자연 현상설은 용의 현상에 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불교를 통해 인도 남부지역의 나가(naga) 신앙이 유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설이다. 하지만 중국의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고분의 복희와 여와의 그림에서도 뱀을 형상화하고 있다. 논농사 문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목축생활을 하는 중앙아시아의 무덤에서도 복희와 여와의 그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각 지역의 자생적인 뱀 신앙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가(NAGA): 상체는 사람이며 하체는 뱀으로 된 인도 힌두교의 반인반신. 산스크리트어로 코브라를 뜻한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행 중이던 석가모니를 지키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싯다르타 사후 불교가 인도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도의 대중적인 힌두 신을 수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나마 불교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을 들자면, 불교의 유입 이전에는 도가의 영향으로 선(善)의 상징성이었던 용이 인간을 이유 없이 해치는 나가 NAGA의 특성이 이무기에 수용되었다는 정도다. 용과 이무기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점차적으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하지만 근거가 부족하다.
특정 학설만이 옳다 할 수가 없는 것이 각 학설 모두 포함해야 지금의 용의 개념이 완성된다. 악어와 같은 실체적 모습에 공룡의 화석이 더해져 큰 파충류와 같은 형체가 있다는 바탕에 자연현상이 더해지고 선과 악의 성격을 갖는 존재로의 과정화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용이 되기 때문이다. 용에 대한 상징성을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 옛 문헌 기록으로 확인해 보았다.
한대漢代(기원전 206년 ~ 220년)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가 황제를 용과 동일시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사기 고조 본기를 보면,
『고조는 우뚝한 코에 얼굴 모습이 용을 닮았으며 아름다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유방을 용과 같은 위엄을 가진 것으로 기록했다. 한漢나라 때 용龍 에 대한 개념이 폭넓게 인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습은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25년 ~ 220년) 시대에 허신이 지었다는 설문해자를 보면,
“용은 비늘 달린 동물 중의 우두머리이다. 숨을 수도 있고 나타날 수도 있으며 아주 작아질 수도 커질 수도 있으며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춘분이면 하늘로 오르고 추분이면 깊은 못 속으로 잠긴다.”
후한 시대까지 용의 형상이 구체적이지 않고 비늘 달린 동물의 우두머리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형상보다는 계절 현상적인 자연현상과 관련해 초현실적인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후대에 보다 구체적으로 용의 형상을 묘사한 본초강목의 용에 관한 기록이다. 후대인 명나라(1368 ~1644) 시대의 본초강목의 기록부터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머리는 낙타 같고 뿔은 사름 같고, 눈은 토끼 같고, 귀는 소와 같으며, 목은 뱀과 같고, 배는 대합과 같고, 비늘은 잉어와 같고, 발톱은 매와 같으며 발바닥은 호랑이와 같다. 그리고 등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어 9․9의 양수를 갖추었으며 그의 소리는 구리판을 때리는 것 같고 입가에는 수염이 있으며 턱밑에는 구슬이 달리고, 목 아래에는 거슬 비늘이 있으며 머리에는 박산이 있는데 이는 척목이라고도 한다. 용에게 이 척목이 없으면 하늘에 오를 수 없다. 기운을 토하면 구름이 된다』
그런데 본초강목과 동시대의 그림 입문서인 당육여화보는 다른 모습으로 용을 설명하고 있다.
당육여화보는 송대 곽약허의 화룡 집의(1074년)를 참고했고, 화룡집의는 또 후한 말 사상가였던 왕충의 [논형, 용허 편]을 참고했다 한다. 왕충이 정확히 언제 태어나 죽었는지 모르지만 후한(AD 26 -220년) 대 사람이니 설문해자의 허신과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다. 허신이 설문해자에서 용을 자연현상처럼 표현하기도 하지만 왕충처럼 실제의 동물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는 것은, 용의 현상(現想)과 형상(形象)이 같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국대학교 니 국영 NI, Guo ying의 “중국 용문양의 연구”의 용문양 변천에 관해 도표로 인용한다.
중국의 용문양에 관한 변천은 이렇다. 한국의 용은 어떻게 변해 왔는지 각 시대의 문화재를 통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국조 신화(國祖神話)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신라의 박혁거세의 부인이 된 알영은 계룡(鷄龍)의 갈비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파충류뿐만 아니라 조류(鳥類) 모습의 용도 상상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와 고구려의 영토였던, 북한의 국경과 인접한 중국 요녕성에서 발굴된 안키 오르 니스 훅 슬레 이아이라는 공룡의 화석에서는 깃털이 달려 있음이 확인됐다. 화석설에 따른다면 용이 커다란 조류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출처, 구글 지도와 2010 사이언스온
또 해모수가 오룡 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유화(柳花)와 관계해 낳았다는 주몽 설화, 신라 4대 왕 석탈해 이사금은 용성국(龍城國) 출신이라고 하며, 고려 시조 왕건도 자신의 할머니를 용녀(龍女)라 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기도 했다. 삼국시대 이래로 왕조들이 용의 상징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어떻게 용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비교해 보았다.
고구려 용문양은 강서중묘, 강서대묘, 퉁구 사신총, 쌍영총, 무용총, 약수리 고분의 사신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강서대묘의 청룡도다.
유려한 곡선으로 살아 움직이듯 하다. 또한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희와 여와도 가 확인된다. 해와 달을 상징하는 것을 들고, 상체와 하체를 인간과 뱀의 모습으로 그렸다.
삼국유사 혜통강룡(惠通降龍)편을 보면 용은 인간을 헤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승려 일연이 썼기에 인도의 남방불교의 사고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오래된 한국적 인식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왕녀(王女)가 갑자기 병이 나자 왕은 혜통을 불러서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했다. 혜통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서 죄 없이 국가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이에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자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속에 이르러 용을 달래어 불살계(不殺戒)를 주니 그제야 웅신의 해독이 그쳤다.』
거북도 용의 한 종류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남조 시대의 현무도와 비교해도 무척 비슷하다.
공주 송산리 6호분 고분 벽화는 윤곽만 남았다. 윤곽은 고구려 강서대묘의 그림과 매우 비슷하다. 고분 양식이 고구려와 비슷해 고분 벽화 또한 같았을 가능성이 높다.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뛰어나다. 용 받침대의 용은 섬세하고 유려한 곡선이다. 고구려의 벽화에서도 그렇지만 금동대향로 역시 발가락이 세 개다.
신라는 특이하게 생활용품에 용문양 유물들이 많이 전해진다. 신라에서의 용은 왕만 사용하지 않고 귀족들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수형 주전자의 모습을 보면 몸통은 거북으로 되어 있으나, 길게 솟구친 머리와 구부러진 꼬리에 삼각형의 돌기가 달려 있어 용을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금동 당간 용두를 보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다른 형식의 용을 추구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드러운 곡선을 통해 세련미를 추구한 반면 신라는 비늘과 투박한 돌기를 묘사해 강렬한 사실감을 더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서수(瑞獸) : 상상의 동물
연대상으로 통일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되는 금동 용두 토수(金銅龍頭吐首)는 박력과 기개가 넘친다. 과감하고 강렬한 용의 모습을 표현했다. 뿔이 하나인 점을 들어 용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용은 상상의 동물, 서수(瑞獸)의 한 종류다. 당시 사람들에게 용은 명확한 기준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서로운 어떤 상징성이라 생각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보다 다양한 곳에 용문양이 사용되었다.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장신구와 거울 도자기에 새겨져 있는데 청자가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의 용문양은 고구려, 백제의 섬세함과 신라의 기개와 박력이 결합됐다.
용두 보다 : 사찰에서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메달아 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한다. 장대 모양의 당의 꼭대기가 용의 머리 모양이라서 용두보당이라 한다.
좌측이 용농기는 모네기할 때 부정을 막으려 세워 두는 농기다. 우측은 전주박물관 영조어진의 복부의 용문양.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귀족들, 사찰에서 용문양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조선시대에는 민화, 도자기, 가구, 복식, 문방구, 과학기구류 등 다양한 계층과 여러 물건에서 용문양을 사용했다.
백자청화 운룡문과 백자철화 운룡문 항아리는 조선 후기 왕실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용은 전기, 중기, 후기의 용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조선 전기에는 신라와 고려시대처럼 사실적이던 것이 중기에는 추상적인 모습을, 후기에는 사실성과 추상성을 섞었다. 같은 것 같지만 모양은 조금씩 달라져 왔다. 다음은 용의 세세한 모습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구별해 생각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용조(龍爪용의 발톱)의 개수는 전기에는 명이 오조룡을, 조선은 사조룡이었으나, 고종 이후 오조룡이 사용되었습니다. 삼국시대까지 용의 발톱수는 대개 4개 혹은 3개였습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 따라 고려, 조선 중기까지 발톱이 4개인 용포를 사용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국의 사대주의를 버리고 조선의 왕도 발톱이 5개인 용포를 사용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고려시대부터 중국의 왕에게 왕의 관복을 사여 받았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삼 조룡(三瓜龍) : 왕세손, 사조룡(四瓜龍) : 왕세자, 오조룡(五瓜龍) : 황제
몸의 비늘 색깔에 따라 청룡, 적룡, 흑룡, 백룡, 황룡이 있으며 각 방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청룡 : 푸른색의 비늘이며 현무, 주작, 백호와 함께 사신의 하나이다. 고대 국가에서는 고분(무덤)에서 확인이 되며 조선시대에는 수호신으로서 궁궐의 문에 사용되었다. 동쪽의 수호신
적룡 : 붉은색의 비늘이며 태양과 화산에서 태어나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다. 남쪽의 수호신
흑룡 : 검은색의 비늘이며 백룡과 반대인 어둠을 상징한다. 북쪽의 수호신.
백룡 : 구름과 같은 흰색의 비늘이며 다른 용에 비해 하늘을 빠르게 날을 수 있다. 서쪽의 수호신
황룡 : 황색의 비늘이며 사룡이 동서남북의 수호신이라면 황룡은 중앙을 수호하는 신이다. 또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농(神農)이 갑을(甲乙)의 날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동쪽에 청룡(靑龍)을 만들어 놓고 동자에게 춤추게 하고, 병정(丙丁)의 날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남쪽에 적룡(赤龍)을 만들어 놓고 장정에게 춤추게 하며, 무기(戊己)의 날에 비 내리지 않으면 중앙에 황룡(黃龍)을 만들어 놓고 장정에게 춤추게 하고, 경신(庚辛) 날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서쪽에 백룡(白龍)을 만들어 놓고 노인(老人)에게 춤추게 하며, 임계(壬癸)의 날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북쪽에 흑룡(黑龍)을 만들어 놓고 노인에게 춤추게 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거행해 볼 만하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32년 4월 26일의 기록, 갑을(甲乙)의 날 : 그날 일진(日辰)의 천간(天干)에 ‘갑’ 자와 ‘을’ 자가 드는 날.
용은 물을 관장하기에 기우제의 대상이 이었습니다. 또한 왕은 황룡과 같은 권위를 가졌다는 의미로 왕의 의복에 황룡을 수놓은 용포를 부착했습니다.
교룡(蛟龍) : 설문해자에 뿔이 없다 한다.
응룡(應龍) : 날개 달린 용을 말한다. 용이 천 년이 되면 응룡이 된다.
규룡(虬龍) : 설문해자에 따르면 붉은빛의 뿔이 있는 새끼용을 말한다.
촉룡(燭龍) : 산해경에 사람의 얼굴에 용의 몸을 한 것을 말한다. 붉은색을 띤다 하여 화룡이라고도 한다. 낮과 밤, 계절을 관장한다.
훼룡(虺龍) : 큰 이무기로 물속에서 살며 5백 년을 살면 교룡이 된다. 은대 도철문에 그려져 있다.
리룡(螭龍) : 빛이 노랗고 뿔이 없다. 이무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발가락이 독수리의 모양이다. 용의 암컷이라고도 하며 자연을 파괴하여 악룡으로 불린다.
저파룡(猪婆龍) : 입이 작은 악어처럼 생겼다.
사룡(蛇龍) :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오백 년 된 훼룡
반룡(蟠龍) : 승천하지 못한 용.
지금까지 용에 관해 알아보았다. 시대에 따라 모습과 상징의 의미가 추가∙변화되어 왔고 용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서동설화에서 용의 상징성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자 혹은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국조 신화처럼 강력한 상징인 용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하나 빠트린 것이 용이 사는 연못에 관한 것이다. 다음은 연못에 관한 이야기다. 여정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