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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석 설화

한국의 고대 신앙 지는 지금 어디에?

by 꼭그래

망부석 설화

치술령 망부석에 관해 울산과 경주, 두 도시가 서로 자기 시에 위치한 바위를 망부석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두 곳 중에서 경주의 향토 사료를 근거로 경주시 외동읍 외동리의 망부석을 찾았다.


망부석 설화


『박제상이 대마도에 가면서, 아내에게 대마도에 검은 구름이 덮여 있으면 자신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라 했다. 아내는 대마도가 보이는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검은 구름이 덮여 대마도가 보이지 않자,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내는 새가 되어 날아가(혹은, 아내가 딸들과 함께 새가 되거나 바위가 된다) 은을암(隱乙岩)에 날아가 숨었고, 남편을 기다리던 바위는 망부석이라고 하였다. 아내가 떨어질 때 새가 되었다 하여 마을의 이름은 비조(飛鳥)가 되었다.』


(혹은, 아내가 몇 마리 비둘기가 바위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본다. 아내는 비둘기를 한 마리 잡아 말을 외우게 하여 소식을 전하려고 하다가 그만 떨어져 죽는다. 아내의 원혼은 비둘기가 되어 남편에게 날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무정한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노라고 전한다). [한국 구비문학 대계]


망부석 설화의 시대적 배경인 당시 신라는 정치 혼란기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미해(눌지왕 셋째 아들)는 바다를 건너와 강구려(康仇麗 , 신라 눌지왕 때의 관리, 왜에 잡혀있었다)에게 먼저 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왕은 놀랍고 기뻐서 백관에게 명하여 굴헐역(지금 울산의 한 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에서 맞이하고, 대궐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제상의 아내를 책봉하여 국대 부인으로 삼고, 그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논자가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신하 주가가 형양에 있다가 초나라 병사의 포로가 되었을 때 항우가 주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되면 만호의 녹을 받는 제후로 책봉하리라.”라고 하니, 주가가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다가 초왕에게 살해되었는데, 제상의 충렬은 주가에 못지않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소문을 듣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게 부르짖었던 까닭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해 세 딸을 이끌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있다.』


눌지왕 10년(427년)에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진 눌지왕의 동생 보해를 구해낸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다시 왜에 인질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아들 미해를 구하고 왜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입니다. 삼국사기도 삼국유사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지만 연대상 눌지왕 즉위 직후(417년)라는 점과 미해(미사흔)가 눌지왕의 동생으로 되어있다는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박제상(朴堤上)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 이사금의 5 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갈문왕 : 왕이 되지 못한 왕의 형제)이고, 아버지는 파친찬 물품(物品)이다.

(생략)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드디어 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제상을 왜왕의 처소로 돌려보내니,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 보냈다가 곧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태운 후에 목 베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고 대아찬을 추증하였으며 그 가족에게 후히 물품을 내렸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여 보답하였다. 이전에 미사흔이 돌아올 때 6부에 명하여 멀리까지 나가 맞이하게 하였고,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마침내 형제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길 때 왕은 노래와 춤을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고려) 향악의 우식곡이 그것이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의 신라는 왕세자들을 타국에 볼모로 보내야 할 만큼 국력이 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나물왕(나물 마립간)의 동생인 실성왕이 백제의 인질이었다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다. 실성왕은 자신을 백제의 인질로 보낸 원한으로 나물왕(내물 이사금)과 그의 아들 눌지왕을 제거하려다 실패한다. 눌지왕은 삼촌인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쿠데타였기에 권력은 위태로웠을 것이고 지지세력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박제상의 박씨 세력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물왕(내물왕)시절에 굴욕적 협력관계였던 고구려와 왜와의 관계가 눌지왕 때에는 달라지게 됐다. 굴욕적 외교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자들을 빼내 오는 역할을 박제상이 한 것이다. 수평적 외교관계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원했던 눌지왕을 위해 박제상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박제상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박제상의 야망


박제상은 파사 이사금의 5 세손이다. 파사 이사금을 끝으로 박씨 세력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박씨 세력을 대신해 석씨 세력이 김 씨 세력과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파사 이사금 이후의 왕위 계승자들을 보면 파사 이사금 뒤에 김 씨 세력인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른다. 다음 왕위는 석탈해의 아들 구추각간의 아들 벌류 이사금이 오르게 되고 그 뒤로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까지 석씨 세력이 세 번의 왕위를 가져갔다.


그 뒤에는 다시 김 씨 세력인 미추 이사금이 이어받고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 뒤에 왕위는 석씨 세력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시기였으나 김씨인 나물 이사금이 왕위에 오릅니다. 석씨 세력이 왕위에 오를 시기에 계속해서 김 씨 세력이 왕위에 오르니 석씨 세력은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석씨 세력은 김 씨 세력의 내분을 이용해 다시 왕위에 오르려 했었을 것이다. 그때 신라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난 박씨 세력 박제상이 등장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실성왕과 석씨 세력의 신라가 대외적으로 친왜∙반백제였다면 눌지왕은 반왜∙친백제의 입장을 취한 것 같다. 그런 정치적 상황에서 박제상이 눌지왕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 박제상의 입장에서도 눌지왕을 지지함으로써 박씨 세력이 다시 신라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서 발돋움할 기반을 마련하려 했을 것이다. 두 세력이 번갈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석씨 세력과 김씨 세력이 결혼 동맹을 통해서였지만, 미사흔(미해)이 왜에서 도망해 온 뒤에 박제상의 딸과 결혼을 한 것은 김씨 세력과 박씨 세력과의 결혼 동맹이 맺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박제상의 행적과 죽음을 정치∙외교적으로 다루었다면 삼국유사는 돌이 된다거나 새가 된다는 기이(奇異)한 이야기로 서술하고 있다. 설화는 남편 박제상을 따라 죽음을 선택한 열부의 이야기다. 설화에서 박제상의 아내가 바위가 된 것과 아내와 딸들이 새가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경주시 외동읍 외동리의 망부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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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들어서자 계곡 물소리가 반겼다. 찾아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등산로라 하기에는 애매한 빗물이 흘러내린 곳을 따라 오르다 이젠 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으로 올랐다. 그렇게 찾은 망부석을 자세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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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밑을 보면 이곳에서 물이 흐르기 조금씩 흐르기 시작해 줄기들이 만나 계곡이 된다. 망부석은 계곡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암 바위이고 물이 흘러나온다는 점이 담양의 장군바위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은 예전에는 기자 신앙적 장소였을 것이라 판단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될 정도의 중요성을 따지자면 기자신앙에 한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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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망부석은 이 바위가 아니라 조금 더 위쪽에 있다 해서 조금 더 올라가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바위 위쪽은 넓고 평평했다. 바위는 넓고 평평해 종교의식을 행하던 제단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현장에 맞춰 해석해 보면 “노래와 춤을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고려) 향악의 우식곡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있다.”라는 점을 해석해 보면 왕이 주관하거나 참석한 제천의례를 행하던 곳이라 생각된다.


삼국유사의 망부석 설화에서 박제상의 처는 치술신모로서 산신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전해지고 또 죽어 새가 되었다 하는 것은 치술신모가 천신과 연결된 존재라는 의미다. 당시 사람들은 새가 천신의 전령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천신이 새를 통해 그의 말을 전하는 소도지역을 표시하는 솟대(긴 장대 끝에 새의 조각이 달림)가 있었을 것이다.


기록과 설화, 현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제천의례가 행해졌던 소도라는 지역이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박제상과 그의 아내 치술신모가 되었다는 망부석 설화는 정치적∙종교적 관계에서 만들어져야만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또 이때까지 신라는 불교보다는 토착신앙이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훗날 박씨 세력이면서 토착신앙의 상징적인 존재인 치술신모의 후손인 법흥왕이 불교의 국교 공인과 대중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민중의 신앙도 왕이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동설화에서 무왕이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용과 불교의 상징성을 이용했다면 망부석 설화는 치술신모라는 토착신앙과 결합되었다. 불교가 늦게 공인된 신라에서는 토착신앙이 불교를 공인할 수 없을 만큼 영향을 가지고 있어 치술신모(산신)와 결합되어야 했다는 것을 망부석 설화가 말해주고 있다.


은을암.jpg 은을암

박제상의 처와 딸이 새가 되어 숨었다 전해지는 은을암(隱乙巖)을 찾았다. 암자 옆에 은을암이 보인다. 은을암 옆에는 작은 사찰이 세워져 있다. 박씨 세력이자 치술신모의 후손인 법흥왕은 신라에 불교를 국교로 한다.

울산의 망부석도 경주의 망부석과 같을지 확인하기 위해 울산 치술령으로 향했다.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박제상 기념관인 치산 서원이었다.

박제상기념관.jpg 박제상 기념관

울산 치술령 초입에 있는 박제상 기념관. 영조 21년(1745년)에 박제상과 그의 처와 딸을 기리기 위해 치산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원 안에는 박제상을 모시는 충렬묘와 신모사, 두 딸을 기리는 쌍정려가 있었으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毁撤)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박제상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울산.jpg 울산 치술령 망부석


치술령 정상의 망부석이다. 바위에서 물이 기원하거나 바위 근처에서 기우제나 천신제를 했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바위가 대마도 방향으로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울산2.jpg 울산 치술령 망부석 전경

울산의 망부석은 장군바위나 망부석, 며느리바위의 특징은 없고 망향석(望鄕石)이나 관망대의 역할을 하던 곳으로 보인다. 경주의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용도의 관망대의 역할을 한 것 같다. 경주와 울산 두 곳을 찾은 결론은, 경주 망부석이 신앙적인 역할이었다면 울산 망부석은 정치∙군사적인 역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는 경주의 망부석이 신라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울산의 망부석이 당시 신라의 정치상황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 두 갈래의 이해를 위해 모두 소중한 유산이다.

고대 신앙의 장소는 지금도 존재한다

용장사지_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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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용장사지 석조여래 좌상과 등산로>


지금까지 바위 설화를 찾아다니며 알게 된 것은 바위 설화가 전해지는 곳에는 기자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옛 신앙 공간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됐다. 물이 흐르고, 바위가 있으며, 의식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나 바위가 있는 곳, 지금의 사찰이다. 옛 신앙의 장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화한 것이다. 다음은 어떻게 이 땅에 종교가 변해 왔는지 짚고 다른 설화를 찾아갈 것이다. 설화를 이해하기 위해 현장을 찾아가지만 그 목적은 옛사람들의 의식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설화라는 것이 옛사람들의 의식 세계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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