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것이 돌아올 때!
이 분야에 관해서 배운 적 없다. 관련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얕은 글일 수 있다. 이 여정은 어쩌면 배우지 않아서 학문에서 자유롭기는 하다. 어떤 문제에 가설을 세우고 증명해 내는 논문이 아니라 설화와 역사기록과 현장을 통해서 옛사람들의 의식세계에 다가가려 한다.
그래서 학계에서 사용하는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의 용어가 아닌 토착신앙으로 할 것이다. 이런 말들은 한국의 신앙 형태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신앙은 분류된 개념들의 신앙이 결합된 형식이기도 하고, 또 샤머니즘의 경우에 샤먼의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신을 찾아가는 북방 샤머니즘과 다르게 한국의 샤머니즘은 신이 인간의 몸으로 하강해 진입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차이점들을 분류하는 것은 학계의 몫으로 돌린다.
고대 신앙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여전히 옛 신앙 형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대와 현대를 분리해 내지 않겠다. 전통신앙이라는 표현에도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이면서도 타 종교에 개방적이지 않은 시대다. 전통이라는 말에는 오랜 시간 흘러와 현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말도 어색할 수 있다.
다른 세계관이 이 땅에 살던 토착민들의 삶과 의식으로 들어와 뿌리내려 정착하게 되었다는 토착이라는 말이 적합한 것 같아 앞으로 토착신앙이라 할 것이다. 토착이라는 말의 대상은 사람이다. 설화라는 것이 설명할 수 없는 우주적 신비에 관해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려 했던 옛이야기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세계관은 변해 왔다.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들의 의식세계를 여행 수단인 신앙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삼국시대 불교가 법적으로 공인된 신앙이라 해서 고대 신앙과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 공인 이후에도 왕의 주도로 천신제, 지신제 혹은 수신제의 제천행사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 모여 돼지와 사슴을 잡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구려에서는 10월 국중대회 때 수혈(隧穴)이라는 굴에서 수신(隧神)을 모셔와 나라 동쪽에서 나무로 만든 수신(隧神)을 신좌에 모셔 동맹(東盟)이라는 제사를 지냈다 한다. 동굴에서 모셔온 수신은 천신을, 수신을 나무로 만든 것은 지신을 상징한다.
또한 제천행사 때 신성한 지역에서 죄인을 처벌하는데 죄가 있으면 제가(제의祭衣를 주도한 권력자들)가 논의하여 죽이거나 가족을 노비로 삼는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는 제천행사를 통해서 정치권력이 신권을 빌려 죄인을 처벌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형법이라는 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神의 권위로 처벌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백제에서는 사계절 가운데 왕이 하늘(天)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시조 구태(仇台)의 묘(廟)를 국성(國城)에 세워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 것으로 나온다. 온조왕 20년에 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신이神異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천신제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풍흉에 관계없이 제천행사를 하기도 했다. 아신왕 11년(404년)에 크게 가물어 왕이 제사를 지냈다 하며 동성왕 11년(489년) 가을에 대풍년이 들어 단을 설치하고 감사의 제천행사를 했다. 기후 변화가 왕의 책임이었다.
신라도 천신과 지신에 대한 제천행사가 행해졌다. 일성 이사금(逸聖尼師今) 5년(138년) 태백산에서 친히 일성 이사금이 제사를 지냈다는가 하면, 기림 이사금(基臨尼斯今) 3년(300년)에도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이후 신라는 왕이 직접 제천행사를 주도하기는 하지만 친히 제사지祭祀地에 가는 것보다는 사당을 세워 그곳에서 다른 왕족이나 신하들이 제천행사를 거행하게 했다. 2대 남해왕 3년(서기 6년) 시조인 혁거세의 사당을 세우고 여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케 했으며, 36대 혜공왕 때에 미추왕을 김씨의 시조로 삼아 5 종묘를 세워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상숭배와 제천행사가 함께 이루어졌다.
남해왕 3년에 세운 사당이 지증왕 때 시조 혁거세가 내려와 태어난 나을(奈乙)에 신궁(토착신과 조상의 신위를 함께 모심)의 있었으며 이후 선덕여왕 때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신라 왕조는 토착신앙과 결합된 조상숭배를 강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는 토착신앙에서 불교로의 전환보다는 유교와 결합을 시도한 편이었다.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보다는 토착신앙과 조상숭배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신앙 형태를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불교국가로의 전환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느리게 진행됐다. 신라의 민중들은 토착신앙을 신라의 왕족들은 유교적 조상숭배로의 전환을 꾀한 것을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천자는 천지(天地)와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社稷)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 지낸다. 12월 인일(寅日)에는 신성(神城) 북문에서 팔자(八䄍)에 제사 지냈는데, 풍년에는 대뢰(大牢)를 쓰고 흉년에는 소뢰(小牢)를 썼다』
신라는 왕이 종묘제례에는 직접 주관하고 참석하지만 제천행사는 제후들이 주관하여 행해졌다. 토착신앙과 관련된 제례는 각 제후들이 주도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교를 공인하는 문제는 각 제후들이 제관으로서의 지위로 민중들을 이끌 수 있었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제정일치 국가에서 토착신앙의 문제점은 기후 변화에 따라 통치자의 권위가 위험해질 수 있다. 풍흉과 천재지변에 관계없이 지속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왕조에게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당시의 사상들 중에서 윤회 사상인 불교가 토착신앙 보다 유리했다. 왕은 하늘과 연결된 사람이기는 하지만 자연현상과 개인문제는 각자의 업보로 하면 왕위 권위는 추락하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각 왕조들은 불교가 필요했다.
왕조에 의해 불교가 국교로 되었다 하더라도 민중의 종교의식을 토착신앙에서 불교로 곧바로 교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불교 안으로 토착신앙을 융합∙수용해야 했다. 사찰은 정치∙군사적인 목적과 사회∙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워졌다. 문자를 배운 승려들은 평상시에는 행정관과 외교관 역할을 했으며, 전쟁이 일어나면 정치∙군사적인 일을 맡게 했다. 사회적으로는 사회통합과 종교통합을 위해서 사찰에서 토착신앙적인 행사도 주관했습니다. 사찰은 곡창지대를 경영하고 군사요충지에 군량을 빠르게 제공하기 위한 곳에 사찰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토착신앙에 의지했던 사람들을 불교로 귀의하게 해야 했다. 이 두 목적으로 사찰이 세워졌다.
종교 통합 목적의 사찰은 토착신앙이 제천행사를 행하던 곳에 세워졌다. 지형적으로 큰 사찰을 세울 수 없는 곳에는 작은 암자를 세웠는데, 은을암이 대표적이다. 박제상 설화와 토착신앙과 관계가 있는 이곳에 암자가 들어선 것이다.
망부석 설화를 통해서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 신모로서 신격화되었는데, 그곳에 불교의 암자를 지어 불교와 토착신앙의 융화를 시도한다. 그렇다고 꼭 사찰이 들어서지는 않았다. 특히나 신라에서는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 망부석에는 사찰이나 암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다른 하나는 인접성이다.
제천행사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천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어 오랫동안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그렇다 보면 행사의 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길어진 기간만큼 음식 또한 많아야 했다. 온 나라가 제천행사에 빠져 있으면 군사와 농경 인력의 부족을 가져온다. 그래서 사찰은 대체로 옛 신앙지信仰地 이면서 행정, 군사, 농경에 적합한 곳에 세워야 했을 것이다. 그곳에 세워진 사찰의 역할은 토착신앙이 의식에 고착화되었던 사람들에게 불교로 개종시키기보다는 불교가 자체적으로 흡수해야 할 문제로 생각했다. 대표적인 종교 갈등으로는 이차돈의 순교다.
토착신앙의 성지인 곳에 이차돈이 사찰을 지으려다 제후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었던 점에서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토착신앙이 민중들 사이에서 강력한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와 토착신앙의 융합이 그리 쉽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불법을 위해 이차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왕권 강화를 위한 희생으로 해석된다. 삼국유사를 보면 이차돈이 흥륜사를 세우려던 곳은 천경림이란 곳인데, 당시 이곳은 토착신앙의 성지로서 불가침 영역이었다. 하지만 왕명을 이유로 이차돈은 흥륜사 창건을 밀어붙였고 후에 신하들의 반발이 일어나자 법흥왕은 이차돈이 왕명을 어기고 성소에 사찰을 세웠다며 이차돈을 사형에 처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이차돈의 의지였는지 법흥왕의 의도였는지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진흥왕 5년, 544)가 토착신앙의 성소에 세워지게 된 것은 토착신앙에서 불교로의 전환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지리 조건으로 보자면 물이 흐르거나 큰 바위가 있는 토착신앙의 성지였던 곳에 사찰과 암자가 세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법흥왕,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평왕 이후 신라 왕들은 제위 2년에 신궁에서 제의와 종묘제를 지내며 사면령을 내렸다. 제천행사에서 하늘의 신귄을 위임받아 처벌했다면 종묘의 권위로서 사면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천신이 왕가의 종묘와 결합되었고 산신과 지신은 불교와 결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사찰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산신과 지신의 제례를 사찰에서 주관하고 토착신앙의 상징적 의미의 것들을 수용해 민중들을 사찰로 모여들게 하려 했다. 불교가 토착신앙을 수용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사찰 입구의 장승과 돌무더기나 탑이다. 그리고 사찰 내에 산신각, 칠성각, 삼신각이 세워졌다.
실상사 가는 길가에 세워진 장승이다.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석장승이 길 양 옆에 세워져 있는데, 수 바위와 암 바위로 음양의 조화∙균형을 중요시했던 토착신앙적 상징물이다. 사찰 입구의 시작은 이렇게 토착신앙적인 익숙한 상징물로 세워졌다.
산신각은 사찰 입구에서 제일 뒤쪽에 위치한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모신 대웅전을 거쳐야 산신각에 갈 수 있게 했다. 토착신앙의 신자라 하더라도 부처를 지나야 산신각에 이를 수 있게 했는데, 천신제를 하게 되더라도 대웅전 앞에서 행사가 이루어졌다.
산신의 지위도 달라졌다. 왕이나 귀족에 의해 세워진 사찰의 산신각 탱화는 부처가 중심에 놓여 있으며 산신이 좌우에 자리한다. 서열에서 산신은 부처에 밀리게 된 것이다. 반대로 부안의 개암사처럼 민중들이 세운 사찰에는 부처의 자리에 산신이 놓여 있어 부처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찰 내부에 민중들의 남근석 신앙, 기자 신앙도 들였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귀신사의 사자 석수다. 사자의 등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웅전을 지나 산신각의 건너편에 석탑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사찰 창건 시기가 고려임을 감안하면 당시까지도 불교와 민간신앙과의 융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불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것이 중요했겠지만 민중들에게는 탑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민중들은 석가모니의 사리 안치의 기능인 불탑으로서가 아니라 아들을 낳게 해달라 기원하는 남근석이나 기자암과 같은 토착신앙적 바위 신앙으로 해석했었을 수도 있다.
논리적 비약일 수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탑은 암 바위와 수 바위를 서로 교차해 쌓아 올린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 두 성질의 바위를 이용해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애기바위나 기자암의 상징성을 의도적이었건 아니건 간에 탑은 그런 형식이며 그렇게 옛사람들에게 해석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퇴적암층인 신라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없다. 퇴적암은 바람과 비에 약해 쉽게 훼손된다.
경상북도 의성군 석탑리의 방단형 석탑은 비바람에 약한 퇴적암으로 세워졌다. 그래서 신라는 주로 목탑을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무 또한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탑은 화재에 약해 토착신앙을 담아내기엔 부족했을 것이며 석탑보다는 그 대상의 상징적 의미가 약했을 것이다. 질 좋은 화강암을 구하기 위해서 신라는 백제에서 석탑용 바위를 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질 좋은 화강암을 얻으려면 화강암 산지와의 교역을 통해서이거나 전쟁을 통해서 그 지역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백제의 화강암 산지를 얻어 탑을 세운 흔적으로는 진평왕 26년(583년)에 창건된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신안리의 신안사 탑(身安寺)이 당시 신라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주
사진으로 보면 분홍색으로 표시된 한반도의 화강암층은 강원도에서 시작해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지나 전라북도까지 형성되어 있다. 신라의 영토인 강원도에서 가져오면 되겠지만, 거리가 멀고 산악지역인 강원도에서 경주까지 가져오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가까운 충청도의 화강암 산지이면서 백제 수도와 가까운 금산을 진평왕이 신라의 영토로 하면서 금산의 화강암으로 세운 탑이다. 규모가 작고 모양 또한 화려하지 않아 당시 신라인들의 석공 기술은 백제보다는 발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 탑은 신라의 목탑이 아니라 석탑이 주를 이룬다. 석탑이 화재나 비∙바람에 강해서 이기도 하지만 석탑이 토착신앙을 수용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불교와 토착신앙의 융화는 마무리되지 않은 채 조선시대에는 다시 나뉘게 된다.
불교와 토착신앙의 분화
고려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토착신앙은 지속적으로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와 토착신앙은 전환기를 맞는다. 그중에서 서낭당은 사찰에 있던 산신각의 기능을 다시 끄집어 내 마을로 돌려보낸 작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병조 판서 조말생과 이조 판서 허조 등이 임금의 병환이 심하였다는 것을 듣고 걱정하여, 여러 대언과 의논하고 종묘와 산천에 기도하고자 하여, 이조 정랑 김종서(金宗瑞)를 시켜 영돈녕 유정현·영의정 이직·우의정 유관에게 가서 가부를 물으니, 모두
"기도를 속히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전에도 임금이 병이 있으면 종묘와 산천에만은 기도하였다."
고 하고, 지신사 곽존중이 말하기를,
"사직은 일국 토신의 으뜸인데, 산천에만 기도하고 사직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의리상 부족한 일인가 합니다."
하니, 대신들이 모두 옳다 하였다. 이에 금등 고사를 본받아서 길일(吉日)을 가려, 대신과 근시(近侍)가 종묘·사직·소격전(昭格殿)·삼각산(三角山)·백악산(白嶽山)·목멱산(木覓山)·송악산(松岳山)·개성 덕적도(德積島)·삼성산(三聖山)·감악산(紺岳山)·양주 서낭당에 기도하였는데, 그 제문에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신이직 등은……"이라 하였다. 처음에 대신이 부처를 모신 절에도 기도하려고 하였는데,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중지시켰다.』 - 세종 7년(1425년)
조선 초기에 산신과 지신,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다. 절에 기도하려던 것을 세종의 만류로 중지되었다는 것은 신라 왕조가 토착신앙과 멀어지려 했던 것처럼 조선도 불교를 멀리하려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극심한 자연재해와 질병에 대해서 국가적인 문제로서 직접 왕이 제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점차 지역의 문제로 국한시키거나 신하들이 제천 행사를 주도했다.
삼국시대에 왕에게 있던 제천행사의 제의권을 제후들에게 넘겨줬다면, 고려시대에는 불교 승려들에게 넘겨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민중에게 제의권을 넘기게 된다.
『이번에 풍운 뇌 우단에 온 나라 안의 산천·서낭당 등의 귀신을 모두 모아 친제 하시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에 풍운뇌우단에서 제사할 적이면 축문(祝文)에 ‘국왕의 신하 아무는 감히 아무 신에게 분명하게 고합니다.’ 했었고,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할 적에는 직접 ‘국왕 아무는 감히 아무 신에게 고합니다.’ 했었으며, 성황당에 제사할 적에는 단지 ‘국왕은 감히 성황당 신에게 고합니다.’ 했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세신(三神)에게 차등이 있게 한 듯한데, 친히 제사한 전례가 없으므로 예를 정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선농단(先農壇) 【신농(神農)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후직(后稷)을 배위(陪位)로 했다.】 의 예로 보면 배위에도 모두 친히 제사했고, 문묘(文廟)에 제사하는 예로 보면 오직 문선왕(文宣王) 앞에만 친제 했을 뿐 나머지 사성(四聖) 에게는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했습니다. 이번 제단의 제사에는 어느 예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선농단의 예대로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 중종실록, 중종 32년(1537년)
풍우뇌우단은 천신과 지신, 수신에게 하는 제례로 중국의 성황당이 고려시대에 이 땅에 들어와 조선 초까지 영향을 주었다. 성황당은 지역단위나 성(城)의 대문을 지켜주는 신에 대한 제사를 하는 곳이다. 서낭당에서는 작은 마을이나 각 가정의 산신(山神)과 지신(地神)에 대한 제천행사를 하는 곳인데, 조선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천신의 제사권을 사찰이 아니라 국가 기관에서 신하들이 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이후에는 신하들 또한 직접 제의에 참석하지 않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조선 왕조는 종묘의 권위를 높이려 했음을 실록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라에서도 시도하기는 했지만, 당시 신라 사회는 왕가의 종묘보다는 토착신앙이 민중들에게 더 권위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왕가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토착 신보다 조상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혹은 자신들의 조상신이 토착 신인 천신, 산신, 지신, 수신과 같은 권위를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들오게 된 것이 서낭당이다.
고려시대에 서낭당은 지방 호족들에 의해 많이 세워졌다. 대지주나 큰 재산을 가진 호족들은 여전히 사찰을 창건했지만 그들도 점차 마을 안에 서낭당을 짓게 된다. 가난한 호족들이나 마을 대표는 작은 서낭당을 지어 마을 수호신과 자신들의 조상신을 함께 모셨다.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국가나 호족들이 서낭당의 제사를 주도했다면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에게 완전히 넘겨준다. 마을의 대표가 제의를 주관하고 제의문을 낭독하게 된다. 오래전 권력자에게로 떠났던 토착신앙이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된 것이다.
서낭당에서 제의가 이루어져야 했던 것은 서낭당의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마을 근처나 농지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서낭당은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에 제례의 기간이 짧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서낭당에는 토착신앙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들이 없습니다. 국가나 귀족들이 강제적으로 서낭당에서 제의를 주도했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는 다시 토착신앙의 상징물들이 그들의 삶으로 가져온다. 대표적인 것이 각 마을 입구의 돌탑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신평리 평촌 마을의 탑이다. 충청북도 금산군에는 아직도 마을 탑이 많이 남아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제의를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한국의 각 마을마다 이런 탑들이 있었으나 새마을 운동 시절 길 넓히기 사업과 도로 정비로 대부분의 마을 탑들이 사라졌다.
좌측 사진을 보면 왼편에 선돌이 있고 오른편에 탑이 자리하고 있다. 우측 사진을 보면 제단이 보이고 돌탑과 비석 옆에 남근석과 뒤 편에는 여음석이 있다. 남근석과 여음석은 인근 서대산의 기운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애기바위나 기자암과 같은 남아 출산의 기자 신앙 역할을 마을로 가져온 것이다.
돌탑 설화
『어느 날 마을에 소들이 갑자기 죽어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무녀(풍수가)에게 찾아가 물었다. 그러자 산신이 노해서, 혹은 어떤 기운이 강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해서 마을 사람들은 탑을 세울 때 안에 지네의 상극인 닭, 두꺼비를 넣은 뒤 돌탑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마을 탑은 공동체와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있다. 벼락바위처럼 지네나 뱀을 물리치기 위해 천적인 두꺼비를 넣어두기도 하며, 마을의 풍농을 기원하며 농기구를 넣기도 한다. 평촌마을의 탑처럼 역병을 물러가게 하고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탑을 조성하기도 했다.
충청북도 금산군 제원면 대산리의 한뫼 마을의 할아버지 탑이다. 한뫼 마을에는 할아버지 탑과 할머니 탑 두 개의 탑이 3백여 미터 가량 떨어져 따로 세워져 있다. 마을 입구 쪽의 할아버지 탑은 위쪽이 상투를 튼 것 같이 뾰족하며, 금줄에는 솔가지와 고추를 달아놨다.
마을 안쪽의 할머니 탑은 족두리 모양의 네모난 돌이 올려져 있다. 금줄에는 부정한 액을 막으려 숯을 달았다. 이 두 탑은 출산과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며, 탑 안에는 풍작을 기원하며 쇠스랑을 넣었다 합니다. 주위에 남근석이나 여음석은 없는데 아마도 탑 자체가 음양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군북면 산안리 자진뱅이 탑은 언뜻 보면 장승이 세워져 있어 탑이 아닌 것 같지만 엄연한 탑이다. 한뫼 마을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탑으로 나누어 세우기도 하고 이렇게 낮게 돌을 쌓고 그 위에 남녀 장승을 한 곳에 세운다. 금줄에는 무병장수를 바라는 의미의 하얀 천이 꿰어져 있다. 이렇게 옛 토착신앙은 다시 사람들 곁으로 왔다가 다시 떠났지만, 그 상징물은 아직도 그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불교와 토착신앙 융화의 기간이 길었기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설화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이야기의 여정. 다음 편 인도∙불교설화와 동물 설화 편에서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