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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불교설화

인도에서 들어온 이야기

by 꼭그래

인도∙불교설화


불교와 토착신앙과의 융화(融和)는 의식화(意識化)를 통해서도 시도되었다. 토착신앙의 성소에 사찰을 지을 수는 있지만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에 접근해야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불교설화다. 친숙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불교를 친근하게 접하게 했을 것이다.


인도인들에게 친숙한 설화와 불교교리를 결합한 불교설화는 인도 문화적인 특징들이 남아있다. 중국화 된 이후에 이 땅에 들어온 이야기도 있겠지만 대체로 인도 설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게 들어온 불교설화를 우리 선조들의 재해석과 재창작의 과정을 통해 한국적 특징을 담은 설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인도 설화가 불교설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다시 불교설화가 우리 설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먼저 인도 설화다.


인도 설화


인도 설화와 불교설화는 형식과 내용이 다르다. 이 글에서는 판차 탄트라라는 인도 설화집을 통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판차 탄트라는 교육적 목적으로 인도 우화를 모아 엮은 책이다. 인도 설화집인 판차 탄트라는 발단∙갈등∙절정∙대단원이라는 단순 이야기 구조(플롯)가 아니라 복합적이다. 이야기의 갈등∙절정 단계에 또 다른 이야기가 추가되며, 이 추가된 이야기의 갈등∙절정 단계에 또 다른 이야기가 추가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판차 탄트라


산 지바카 이야기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우화집 판차 탄트라는 브라만 현자 판디트 비쉬누 샤르마의 저작이다. 판차 탄트라(다섯 단계 혹은 체계라는 의미)의 첫 편은 남인도의 마힐라포퍅이라는 성의 바르다 마나카로부터 시작된다. 장사를 위해 바르다마나카는 산지바카와 난다카라는 두 마리의 소에 짐을 싣고 하인들과 길을 떠난다. 산지바카가 넘어져 다리를 다치자 같이 동행하던 하인 둘에게 산지바카가 회복되면 뒤따르게 했다. 하지만 하인들은 산지바카를 정글 속 강가에 놔둔 채 산지바카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주인 바르다마나카와 합류한다. 여기까지 인간의 이야기다. 이후는 의인화된 동물들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홀로 남겨진 산지바카가 헤맨 곳은 핑갈라카라는 사자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었다. 물을 마시고자 강가를 찾은 사자 왕 핑갈라카라는 산지바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깊은 정글에 혼자 있는 소는 보통 소가 아니라 신과 관련된 존재라는 생각에 산지바카의 울음소리에 두려움을 느껴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핑갈라카는 도망친다. 그 광경을 보게 된 자칼 카라타카와 다마나카는 핑갈라카의 부하다.


전대의 아버지들은 대신으로 사자왕을 가까이에서 모셨지만 그들의 처지는 시종이었다. 다마나카는 이 상황을 이용해 사자의 신임을 얻어 아버지들과 같은 대신이 되고자 하지만 카라타카는 통나무에 깔려 죽은 원숭이 이야기를 하면서 다마나카를 말린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원숭이와 통나무 이야기는 사원을 짓기 위해 쌓아놓은 통나무 더미에 원숭이 한 마리가 인부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에 통나무 더미에 올라갔다. 통나무 더미가 쓰러지지 않게 박아 논 쐐기를 원숭이가 뽑자 무너지는 통나무 더미에 깔려 원숭이가 죽게 되었다면서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다 원숭이와 같은 처지에 빠진다는 카라타카의 이야기다. 하지만 다마나카는 사자왕 핑갈라카에게 가서는 핑갈라카의 두려움의 원인을 해결해 보겠다 말한다. 소리에 대한 두려움을 이긴 굶주린 자칼이 먹이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칼 카라타가와 다마나카의 자칼의 이야기로의 대화가 판차 탄트라다. 때로는 카라타가와 다마나카의 이야기에서 멀리 벗어난 듯 다른 동물의 대화로 이야기하다 다시 카라타가와 다마나카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인도 설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동물들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징들을 동물들의 이미지를 활용해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동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왜 그런 것인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익숙한 인간의 행동방식이기 때문이다.


인도 설화 한편이 끝나기까지 스무 편 정도의 짧은 이야기가 고리처럼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방식이라면 불교설화는 이어지지 않고 각 한 편의 이야기다. 불교교리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해설하는 방식이다. 자칼 카라타가와 다마나카가 화자였다면 불교설화는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이 글에서는 불교 용어를 걸러내 일반 용어로 바꿔 적었다. 인도 설화집인 판차 탄트라에 있던 이야기를 불교 설화화 한 이야기들이다.


인도 설화와 불교 설화


이와 벼룩


부처님이 사위국(舍衛國)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법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한 스님이 산속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이가 스님의 몸에서 피를 빨며 살고 있었으며, 좌선하는 동안에는 피를 빨지 않기로 약속하는 대신 이는 스님의 몸에서 살 수 있었다.

어느 날 한 마리의 벼룩이 스님의 몸에 찾아왔다. 이는 벼룩에게 스님의 몸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님이 좌선하는 동안에는 피를 빨지 말라 했다.


스님이 좌선에 들어갔다. 벼룩은 이에게 들은 말을 잊고 스님의 몸 이곳저곳 물고 다녔다. 스님은 좌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옷을 벗어 불을 붙여 태웠다. 결국 옷에 붙어 있던 이와 벼룩은 함께 불에 타 죽었으니, 좌선하던 스님은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이며 이는 부처님, 벼룩은 데바닷다다. 데바 닷다는 언제나 부처님을 이와 같이 괴롭혔다. 대방 편 불보 은경 4편, 데바닷다 : 부처의 사촌동생이자 제자이면서 배반자이자 불교설화에서는 악인으로 그려진다.


이와 벼룩의 이야기는 석가모니의 전생담으로 편집되었다. 위대한 종교지도자도 전생에서는 좌선하던 한 스님에 지나지 않으나 벌레들의 일들에게서 교훈적인 이야기로 만든다. 불교설화의 이와 벼룩의 이야기는 판차 탄트라의 빈대와 벼룩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조금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판차 탄트라


빈대와 벼룩, 화자는 자칼 다마나카이다.


『어느 왕국 왕의 침실 침대에는 값비싼 비단으로 된 시트가 있었다. 그 시트에 만다비사르피니(Mandavisarpini 느리게 움직이는)라는 벼룩은 왕의 피를 빨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왕의 침실에 아그니무카(Agnomukha 뜨거운 주둥이)라는 빈대가 들어왔다. 지금껏 혼자 왕의 피를 독차지하던 만다비사르피니는 빈대에게 나가 달라 한다. 하지만 빈대 아그니무카는 손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며 오히려 벼룩을 꾸짖는다. 그리고는 자신은 별의별 피를 다 빨아 봤지만 온갖 좋은 것들을 먹은 왕의 피는 먹고 싶다 한다.

벼룩은 지금껏 왕이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만 피를 빨아왔다고 말해준다. 빈대도 왕이 곯아떨어졌을 때 피를 빤다는 조건으로 비단 시트에 빈대를 머물게 한다. 그때 왕이 들어와 침대에 눕자 빈대는 참지 못하고 왕이 잠에 들기도 전에 왕의 몸을 물었다. 빈대에 물린 왕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시종들을 불렀다. 왕은 시종들에게 침대 시트에 빈대나 벼룩이 있는지 찾아보라 명령한다. 그 말을 들은 빈대는 몸을 피합니다. 시종들에게 발견된 벼룩 만다비사르피니는 시종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자칼 다마나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천성을 살피지 않고 돕는 일은 삼가야 해야 한다고. 잘못은 빈대가 저질렀지만 벼룩이 죽었듯이.』


판차 탄트라가 왕자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면 불교설화는 종교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이야기로서, 서로 목적이 다르다. 그래서 불교설화가 교훈적인 삶의 자세에 관한 이야기라면 판차 탄트라는 왕자들의 처세적 삶의 방식이 목적이다. 종교와 우화로서의 차이점이다.


불교설화가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판차 탄트라처럼 통치자의 덕목, 자질, 소양, 통치방식을 다룬 설화가 있기도 하다. 처음부터 판차 탄트라의 영향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점차 권력자가 필요한 이야기를 만들어 추가했을 수도 있다. 불교설화 중에 “앵무새의 충고”는 태자의 교육을 위한 목적을 가진 이야다.


앵무새의 충고


『여자를 탐하여 정조를 무시하는 것이 첫째요. 술자리를 베풀고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 것이 둘째요, 승부에 치우쳐서 예의와 교(敎)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이 그 셋째요, 유렵(遊獵)과 살생을 예사로 하여 자비심이 없는 것이 그 넷째요, 다른 사람을 쓸데없이 즐겨 꾸짖고 착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다섯째요, 부역처벌(賦役處罰)을 보통 법보다 배로 무섭게 한 것은 그 여섯째요, 백성의 재물을 뺏는 것은 그 일곱째요. 이상 일곱 가지 일은 왕의 스스로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다시 세 개의 조항이 있어서 왕의 국운이 기울어지게 하는 것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 아첨하는 나쁜 사람과 친한 것이 그 첫째요, 현인이나 성인을 멀리하고 충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그 둘째요, 즐겨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 민력의 함양을 잊어버리는 것이 그 셋째요, 이상 세 가지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왕의 국가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운수행각, 앵무새의 충고 170p ~ 172p,


카아시국의 악수(惡受)라는 왕에게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앵무새가 충고해 준다는 설화다. 불교설화에서도 인도 설화처럼 앵무새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을 의인화해 등장시킨다. 또한 한국의 토착신앙에서 천신의 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새가 한다 생각했던 우리 선조들에게는 “앵무새의 충고”는 친숙했을 것이다. 왕이라 할지라도 새가 전해주는 하늘의 말은 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동물이 등장하는 불교설화는 선조들의 의식에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불교설화의 끝에는 “앵무새는 석존(釋尊)을 말함이다”라 하며 석가모니를 천신과 동일한 권위자로서 전달한다. 석가모니 역시 초월적 존재자인 천신의 권위를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토착신앙이 초월적 세계와 현세적 권위인 자연현상을 갖는 것처럼 불교설화에서의 석가모니도 현세적인 권력도 갖고 있다 말한다.


머리털 공양

머리털 공양.jpg 머리털공양, 출처 불교신문


사찰에 가면 각 건물에는 불교설화와 관련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들 중에서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바로 머리털 공양에 관한 불교설화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쇼오옹왕의 왕궁에 석가모니가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가큐라는 사람이 석가모니를 만나 공양하기 위해 그의 전재산을 바쳐 연꽃을 구해 공양하려 했으나 그 꽃을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된다. 빈 손으로 왕궁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석가모니를 기다렸다. 그런데, 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진흙탕이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값비싼 옷을 진흙탕 위에 펼치고 그 옷을 밟고 석가모니가 지나가게 했다. 그러자 미가큐도 자신의 사슴 가죽옷을 벗어 진흙탕 위에 펼쳐 놓았으나 누군가 미가큐의 허름한 옷을 집어던지고 자신의 값비싼 비단옷을 펼쳤다. 그러자 미가큐는 자신의 머리를 풀어 진흙탕 위에 펼치고 석가모니가 밟고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값비싼 비단옷이 아니라 미가큐의 머리카락을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미가큐의 머리카락을 다른 사람이 밟지 못하게 했는데, 석가모니는 훗날 미가큐가 성불해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될 것이라 말한다. 그러자 쇼오왕을 비롯해 그 대신들은 미가큐의 머리카락을 정광여래 (錠光如來, Dipamkara, 연등불)의 머리카락으로 생각해 잘 모셨다.』


머리털 공양이야기는 석가모니의 전생담 이면서 왕의 덕목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왕은 점쟁이들을 불러 이제 곧 태어날 태자의 앞길을 점치게 했다. 그들은 태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자는 위엄과 덕망을 겸한 큰 인물이며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되어 전 세계를 통일하게 될 것이며, 출가하게 되면 불타가 되어 전 인류를 구제할 것이라고 왕에게 말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점쟁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네 사람의 유모에게 키워진 태자는 8,9세가 되어서는 덕서(德書) ∙산수∙음악∙무술을 모두 터득하였다.』 불교의 설화(한국불교설화연구회), 반야용선, 머리털 공양 122p


덕서, 산수, 음악, 무술을 가르치는 것은 왕위 계승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소양이자 국가경영능력이다. 또 사교성은 타국과의 외교 협상력을 위해서, 신체를 단련하고 자신을 보호할 호신술을 배우는 것 등은 모두 통치자가 될 태자의 교육과목이었다. 또한 “머리털 공양”설화에서는 태자가 귀의(歸依)함으로써 불교 승려와 왕권은 대등하다는 권위를 내세운다.


토착신앙의 각 신들이 자연현상을 토대로 권위를 갖는다면 불교의 석가모니는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왕과 결합해 현세적 권위를 갖는다. 그렇다고 불교가 왕권과 결합해 제정일치의 국가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아사세왕의 설화를 보면 불교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사세왕의 후회


아버지 빈비사라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사세왕에게 병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치료할 수 없자 아사세왕은 자신을 찾아온 신하에게 말하기를 몸의 병은 치료할 수 있으나 부왕을 죽인 마음의 병은 치료할 수 없으니 어떤 명의라도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신하가 아사세왕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대왕께서 너무 심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 법이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출가법(出家法)과 왕법이 있는데, 왕법에 따르면 아버지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마치 어떤 종류의 벌레가 어머니 배를 뚫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이 벌레의 태어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벌레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가법에 따르면, 가령 모기 한 마리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가의 이야기지 대왕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마음을 활달하게 가지시고 걱정하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 발고여락, 아사세왕의 회개 14p 하단에서 15p상단


“아사세왕의 회개”설화에서 아사세왕은 승려가 됨으로써 불교가 현세의 권위도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화에서 주인공은 왕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불교설화에서는 승려가 된다. 현세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권력 현상에 중점을 둔 것이 신화라면 불교는 권위를 뒷받침하는 사회현상에 영향을 주려 했다. 현세와 내세를 분리해, 정치는 현세의 권위를, 종교는 내세의 권위를 갖게 되면서 정치와 종교는 양립하게 된다. 불교는 이 양립을 통해서, 정치권력과 타협이 가능하게 되고, 종교만의 내세 권위를 통해서 제정祭政일치 시대에서 제정분리 시대로의 이행이 가능할 수 있게 했다.


불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되어있는 인도의 신분제를 무시하거나 폐지를 주장하면서 왕권은 인정하고 있다. 사회 신분제는 반대하면서 국가권력은 인정하는 것이 당시 불교 종단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교리상 그러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권력의 지지를 얻어 인도는 물론이고 타 국가에 불교 교리를 빠르게 전파하고 국가적 종교로서 공인받을 수 있는 이유다. 불교가 국교로 인정받았던 아쇼카왕 시대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아쇼카왕 설화


『아쇼카왕은 평소 불교 수도자들을 존경해왔다(불교에 심취했는지 왕권강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신하 야시야는 불가 수도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출가할 수 있으며 특히 크샤트리아족이나 브라만족은 극히 드물고 천한 바이샤족과 슈드라족이 많음을 지적하며 수도자들을 신분이 천한 자들이라 존경할만한 가치가 없음을 아쇼카왕에게 말한다.


아쇼카왕은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는 신하들에게 각기 다른 동물의 머리를 팔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신하들은 시장에 나가 동물의 머리를 팔아온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분과 관계없이 죽은 시체의 머리를 팔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신하들은 시장에 나가 팔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은 시체의 머리를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죽은 시체의 머리를 그대로 들고 온 신하들에게 아쇼카왕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내 머리를 사가는 사람이 있을까?” 신하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대답한다. 죽은 시체의 머리는 귀천과 종족을 가리지 않고 혐오를 받는 것과 같이 불교 수도자를 경배하는 것은 출신이 어떻든 불교 수도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왕이 신이 아닌 종교인을 경배한다는 것은 인도뿐만 아니라 신분제 국가들에서는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 아육왕(阿育王)으로 불리며 황제 중의 황제로 추앙받는 아소카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왕이자 무력을 통한 정복전쟁을 포기하고 불교를 통해 종교적, 문화적 통일을 이루려 했다. 작은 종파에 지나지 않았던 불교를 인도 전역과 세계적인 종교가 될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 아쇼카 왕이다. 인도의 수많은 종교 중에서 불교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정치 상황에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교는 왕권은 인정하면서도 왕 이하의 신분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점과 왕권과 종교가 내세의 권위와 현세의 권위를 양분하게 되면서 아소카왕은 자신의 정복전쟁으로 가족과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또 불교가 인간의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원시종교들은 신화와 자연현상, 인간과 자연과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불교는 인간의 삶을 다룬다. 인간 삶 중에서 생과 사의 문제와 인간의 갈등과 관련한 문제를 다루는데, 갈등의 해소는 윤회사상과 보편적 윤리에 따르게 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의 통합에 불교가 적합했을 것이다.


불교는 때와 장소, 상대에 따른 행위 때문에 선악이 결정되고 윤회의 동기가 된다고 한다. 전생의 선악의 행위 때문에 현세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한다. 개인의 행(幸)과 불행(不幸), 신분제의 문제들을 주로 전생과 현세, 내세의 문제로 설명하는 불교의 설화는 사람들의 불만을 권력과 체제의 문제로 향하게 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아소카왕은 불교를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 이유는 아소카왕 만이 알고 있다.


불교로의 개종을 위한 설화.


인도라는 곳이 넓기도 하지만 다양한 종교가 있어 불교로의 개종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리력이나 복잡한 교리 논쟁이 아닌 보다 더 쉽고 세련된 방식으로 해야 했는데 설화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중에서 힌두교를 믿는 시댁을 불교도로 개종시킨 며느리의 이야기가 당시 인도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교인들을 집으로 초대한 시댁에 며느리는 석가모니를 초대한다. 이교인들의 방해와 모함에도 석가모니가 이교인들은 물론이고 시댁을 신비한 능력으로 감화시켜 불교로 개종시킨다는 이야기다.


불교설화도 흥미를 줄 수 있어야 하기에 세련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들게 되는데, 불교 설화 중에서 “지혜로운 도둑” 이야기와 “제침공”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공주를 얻은 지혜로운 도둑의 이야기와 바늘을 만드는 제침공(製針工)의 아름다운 딸을 얻기 위해 장인이 될 제침공보다 더 뛰어난 제침 기술을 익혀야 했던 청년의 이야기다.


지혜로운 도둑

26.jpg 인도의 결혼, 출처 구글


『왕궁에 고용되어 비단을 짜는 남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일을 도와주는 조카가 한 명 있었는데 그들은 왕궁 안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어느 날 조카가 왕궁 안을 돌아다니던 중 창고에 보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촌과 조카, 둘은 보물을 훔치기로 했다. 창고 바닥까지 굴을 파고는 보물이 없어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씩 가져다 팔았다. 창고지기가 어느 날 물건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은 창고지기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단속을 시키고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하고는 경비를 늘려 도둑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경비가 늘어난 것을 보고, 둘은 다시 굴을 이용해 창고에 들어가 혹시나 도둑질이 들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카는 삼촌을 먼저 들어가 살펴보게 했다. 젊은 자기가 나중에 구해 주면 된다면서 삼촌을 먼저 들어가게 했지만 경비병들에게 들켜 잡힌다.


조카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혼자 도망간다. 탈출에 성공한들 늙은 삼촌의 느린 발걸음으로는 또 잡힐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삼촌이 누구인지 왕궁 사람들은 알기에 자신도 탄로 날 것은 뻔했고 경비병들이 왕궁 사람을 부르러 갔을 때 삼촌을 풀어주고 같이 도망가다가는 잡힐 것 같았기에 조카는 다시 돌아가 삼촌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경비병들이 잠깐 나간 사이에 조카는 삼촌을 죽이고 목을 잘라 달아났다.


목이 잘린 도둑의 시체를 보고 왕은 공범을 잡기 위해 시체를 광장에 놓아두고 치우는 자를 잡으라 명령한다. 도둑의 시체를 광장에 놓아 둔지 며칠이 지닌 어느 날, 장사꾼들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비좁아진 광장에 장작을 실은 수레를 가져온 누군가가 어디에 있을 수가 없어 시체 위에 수레를 세워 놓았다. 지켜보던 왕이 경비병들에게 도둑이 시체를 태우려 한다며 장작에 불을 붙이는 자를 잡으라 말한다. 조카는 광장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횃불을 나눠주고 장작에 불을 붙이게 했다. 그렇게 조카는 삼촌의 시신을 화장하게 됐다.


왕은 경비병들에게 뼈를 수습하는 자를 잡으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조카는 술 장수로 위장해 경비병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에 뼈를 수습해 가져갔다. 자신의 계획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자 왕은 이 도둑을 꼭 잡고 싶었다. 그래서 강기슭에 집을 짓고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자 자신의 딸인 공주의 몸에 화려한 보석으로 꾸미고 살게 했다.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보석을 노리고 강을 건너는 자를 잡아오게 했다.


도둑은 강 상류에서 통나무를 떠내 보냈다. 경비병들은 처음에는 주의하며 통나무를 살폈으나 계속 떠내려 오자 나중에는 통나무를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도둑은 그때를 기다려 헤엄쳐 강을 건너 강기슭 집안으로 들어가 공주와 정을 통했다. 어쩔 수 없이 정을 통하게 되어 부부의 연을 맺어 공주는 방을 나가 떠나려는 도둑의 옷깃을 붙잡았다. 도둑은 자신을 붙잡으려거든 자신의 손을 잡으라 하면서 송장의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붙잡지 못하기 위해서였다. 공주가 도둑의 손을 잡으니 그것은 송장의 손이었다. 깜짝 놀라 공주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도둑과 정을 통한 공주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분명 도둑이 자신의 아들을 데리러 올 것이라 하며 유모에게 성 안을 돌아다니게 했다. 잡히지 않는 도둑은 필시 성 안에 잠입해서 염탐하며 아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유모와 아이에게 접근하는 자를 붙잡게 했다. 도둑은 이번에도 술 장수로 위장해 유모와 경비병에게 술을 먹인 뒤에 아이를 훔쳐 다른 나라로 도망간다.


다른 나라에 도망간 도둑은 그 나라의 왕궁에서 일하다 왕의 신뢰를 받아 대신이 되었다. 그리고 도둑을 사위로 삼고 싶어 자신의 딸인 공주와 혼인할 것을 제의 하지만, 도둑은 이미 처와 아이가 있다며 거절한다. 아이의 어미인 공주를 데려오고 싶다고 왕에게 간청하니 왕은 도둑의 제의를 수락하고 아이 엄마의 나라에 사자를 보내 공주를 보내달라 요청한다.


왕은 분명 도둑이 공주를 데려가려 한 것이고, 도둑을 잡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공주를 보내는 것을 승낙한 뒤 수백 명의 병사와 함께 공주를 국경 근처에서 도둑을 기다리게 했다. 도둑은 그것을 미리 간파해 자신이 모시는 왕에게 공주를 데려 올 수백 명의 병사를 요청한다. 왕이 병사를 내줘 도둑은 수백의 병사와 함께 국경에서 공주를 무사히 데려 올 수 있었다.』


왕과 도둑의 대결 이야기이지만 대립하던 두 나라의 외교비화일 수도 있고 신분이 다른 공주와 천민인 직조공의 사랑 이야기 일수도 있다. 지혜로운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인도의 시대상황을 알 수 있다. 신분제 사회였으나 개인의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이 가능했고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교역을 할 수 있었다. 삼촌을 살해하는 부분은,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을 산속에 버리는 고려장과 유사한 인도 설화가 있다는 점에서 도둑의 삼촌 살해가 당시 당시의 인도인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으며, 고인의 유해는 소중하게 다뤄졌다는 점에서 사후세계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화를 통해서 본 사회관


인도∙불교설화를 통해서 당시 인도인들의 여성관을 알 수 있는데 여성의 지위는 낮았다. 심지어 여성성 자체가 비하의 대상이었다. 정조가 없으며 악(惡)의 발로이자 타락의 원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수도자가 미모의 아내를 잊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으나 이미 부인은 죽어 흉측하게 썩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성의 아름다움은 타락의 출발이고 세월에 흩어져 허망하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일부다처제인 결혼제도와 이혼 제도가 있었고, 형사취수 제도도 있었다.


또한 인도의 법과 사회관계를 보면 법률로써 죄를 처벌했으나 당시 인도의 형법은 가혹했으며 죄인을 처벌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처벌을 달리 하기도 한다. 힌두 사회가 죄를 무겁게 처벌했다면 불교에서는 죄인의 처벌은 양형에 근거하거나 사형제를 반대한다.


설화를 통해서 당시 인도인들의 사회 관념, 인간관, 가치관, 법률 관등을 알 수 있다.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도 납득할 만한 것들로 이야기를 채워야 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가 이야기의 배경이 아닌 한 인간 세계는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다.


불교설화는 인간의 범죄와 법률에 근거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비로 해결한다. 불교설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법률로써 양형이 정해졌다 하더라도 종교로서 감형을 받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당시 아소카왕이 생각하거나 원했던 국가체제라 생각된다.


도둑의 출가


어느 수도자의 수도원이 강도에게 늘 약탈을 당했다. 그날도 역시 강도는 시주한 것을 빼앗으려 수도원을 찾아왔다. 수도자는 수도원의 문을 걸어 잠그고는 아무도 없는 척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도는 문을 부실 기세로 문을 두드렸다. 문을 부수고 화가 난 강도가 더 무서운 일을 저지를 것 같아 수도자는 강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뒷걸음으로 들어오면 문을 열어 주겠다는 것이다. 강도는 수도자의 제안을 수락하고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뒷걸음으로 수도원안에 들어갔다. 수도자는 도둑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고 굵은 밧줄로 강도를 수도원 기둥에 꽁꽁 묶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몽둥이로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귀의불(歸依佛, 부처에 귀의하겠다)을 따라 말하게 했다. 도둑은 하는 수 없이 귀의불을 따라 말했다. 다시 수도자는 몽둥이로 힘껏 치더니 이번에는 귀의법(歸依法, 부처의 법에 따르겠다)을 따라, 도둑은 아픔을 참으며 귀의법을 따라 말했다. 수도자가 또다시 몽둥이로 힘껏 치더니 귀의승(歸依僧 귀의해 승려가 되겠다)을 말하니 도둑은 죽을 것 같은 아픔을 참으며 귀의승을 말한다.


그때서야 수도자는 강도를 묶은 밧줄을 풀어줬다. 도둑은 심한 매질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일어나더니 수도자에게 묻는다. 부처의 삼귀의라 망정이지 더 많았다면 자신은 죽었을지 모른다면서 부처는 도둑의 생명조차 소중히 여겨 삼귀의 만을 말한 것이라 생각이 들어 자신도 출가하여 수도자가 되겠다 했다. [대장엄론경6]


당시 인도는 법률과 재판이 있었던 듯 하지만 죄의 성격에 관계없이 왕이나 재판관은 가벼운 범죄라도 생사여탈권을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불교는 양형과 감형을 요구했다. 복잡한사상을 쉽게 풀이한 설화를 통해서 불교가 시대와 세상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인도 설화와 불교설화의 차이점을 조금 짚어보기도 했고, 불교설화가담고 있는 것이 당시에 어떤 쓰임으로 필요로 했는지 보았다. 권력자들은 천재지변과 계급 차이로 인한민중의 분노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윤회사상을 통해서 내면으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대가로 권력자들은민중들의 죄를 무겁게 묻지 않아야 했

다. 자비의 세상에는 강자의 자비가 있어야 하듯 고대 국가의 계급제는공고해진다.


어려움에 처할 때 조언자를 찾는다. 조언자의 말에 잠시 희망을 갖기도하고, 때로는 삶을 잊는다. 살아가려는 삶이 아니라 살아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더 크게 마음에 닿았을 것이다. 좋은 말 여러 번 들으면 지겨운 것처럼승려의 조언과도 같은 설법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겹다. 불교설화가 그 사이를 채웠다.


딱히 즐길 게 없던 시절 이야기가 놀이였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었던이야기를 다른 누구에게 전해주고, 또 그러다 보면 화자의 감정과 생각을 넣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한다. 불교설화를 통해서 옛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가져온다. 동물의인격화다. 자연물의 인격화는 시도되었지만, 잠시 동안의 현상을인격화한 것이지 인간의 특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교설화를 통해서 인간화가 완성된동물을 등장시킬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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