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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분미

설화를 이용한 영화 만들기 1

by 꼭그래

설화를 이용해 영화 만들기


시대를 달리해도 여전히 이야기 방식은 설화의 구조와 닮았다. 특히나 각 나라마다 이야기 방식이 다르다. 불교설화와 매우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태국의 영화를 소개할까 한다. 그 중에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위라세타쿤 감독의 열대병과 엉클분를 소개하고자 한다. 열대병이 먼저 제작되었고 먼저 봐야할 수도 있지만, 불교설화의 방식과 태국의 설화를 가져와 영화적 이야기로 풀어낸 엉클 분미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 감상 글이 아니라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방식에 초점을 맞췄다. 매우 복잡한 이야기 같지만 인도불교설화의 액자식과 윤회적이며 사물과 관념의 해체에 관한 이야기다.


엉클 분미


201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엉클분미]는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열대병]의 주인공인 통이 재 등장한다는 점에서 열대병의 연장선상의 영화라 할 수 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다르다. 인간과 자연, 하지만 인간이 정의 내리고 통제해 왔던 자연이라는 곳에서 거꾸로 인간이 해체되었던 [열대병]과는 다른 내용을 다룬다. [열대병]이 의식의 해체를 시도했다면 [엉클분미]는 삶과 죽음이 의식의 세계인지 무의식의 세계인지, 아니면 이 의식이라는 말 자체를 벗어난 어떤 것인지 위라세타쿤 감독은 불교의 윤회를 통해 무엇인지 탐구한다. 사실 영화에서는 확실하게 답을 하지 않는다. 감독은 관객들이 어떤 정신 상태에 빠져들게 하려는 듯한 영화 [엉클분미]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정글과 언덕, 계곡 앞에 서면 짐승이나 다른 존재였던, 내 전생이 떠오른다.”그리고 화면은 한 마리의 소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소(쿄우)를 나무에 메어 놓았던 줄이 풀어지고 논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간다. 잠시후에 주인이 소(쿄우)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검은 털의 한 동물이 붉은 눈으로 관객을 응시한다.


통은 분미가 운영하는 농장으로 일하러 왔다. 라오스에서 온 자이라는 청년의 안내로 방을 정리한다. 그리고 농장주인 분미와 그의 처제 젠과 통은 저녁식사를 한다. 그런데 통의 옆에 분미의 죽은 아내 후아이의 유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원에서 자신을 위해 물건과 저 세상에서 행복하길 염원하는 남편과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잠시 후, 아내 후아이가 죽은 6년 후에 숲 속으로 사라진 아들 분쏭이 나타난다. 관객을 응시했던 붉은 눈의 원숭이로 나타난 분쏭의 목소리를 알아챈 젠은 자리에 앉기를 청한다.


분쏭은 자기가 왜 사라져야 했는지 말해준다. 아버지의 사진기에 빠져있던 분쏭은 한 장의 사진에 나타난 검은 형체인 원숭이 귀신을 숲 속에서 찾아 다녔다. 그들을 찾아낸 분쏭은 그들과 성행위를 해야만 대화를 할 수 있어 원숭이 귀신을 아내로 맞았다. 그러자 자신의 몸에 털이 자라났다고 한다. 젠은 사진첩을 가져와 언니 후아이와 분쏭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여준다.


다음 날 분미는 처제 젠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농장을 맡아 줄 것을 말한다. 신장병을 앓고 있는 분미는 자신이 살 날이 많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이를 비롯한 농장에서 일하는 라오스인들에게 처제 젠을 소개시킨다.


얼굴이 추한 공주가 가마를 타고 간다. 공주를 흠모하는 가마꾼은 사람들 몰래 공주를 훔쳐본다. 가마꾼의 시선을 알아챈 공주는 가만히 그의 머를 쓰다듬는다. 한 폭포에서 공주는 천으로 가려진 추한 자신의 얼굴을 물 속에 비친다. 보고 있으니 아름다운 얼굴로 변한다. 하지만 그것은 환영일 뿐이라는 것을 안 공주는 흐느껴 운다. 공주를 흠모한 가마꾼이 공주에게 다가간다. 급하게 얼굴을 가리지만 추한 얼굴마저도 사랑한다며 가마꾼은 공주의 얼굴을 가린 천을 벗겨내고 키스를 한다. 가마꾼을 밀쳐내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공주이기 때문이라 한다. 공주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가마꾼은 물러난다. 다시 흐느껴 우는 공주에게 물의 신인 메기가 나타나 공주가 아름답다 한다. 공주는 속세의 것들을 몸에서 벗어내고 값비싼 장신구를 주겠다며 자신을 아름답게 해 달라 한다. 물 속에서 물의 신인 메기와 공주는 관계를 갖는다.


신장 질병을 앓고 있어 라오스인 일꾼 자이가 상처의 붕대와 수액을 넣어줬었지만 아내 후아이가 대신한다. 분미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으면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지 묻는다. 유령은 어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생명체와 함께한다 후하이가 대답한다. 그러면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냐 묻지만 후아이는 아무 말 없다.

다급하게 처제인 젠과 통을 불러 갈 곳이 있다고 말한다. 후아이, 분미, 젠, 통은 숲 속의 어느 동굴로 들어간다. 동굴 어느 곳에 도착한 분미는 바닥에 눕고 유령 후아이는 분미의 배에 꽃혀 있는 호스로 물을 내보낸다. 그렇게 분미는 죽는다.


통은 승려가 되어 분미의 장례식을 치룬다. 장례식을 마치고 젠은 딸과 함께 부의금을 장부에 기록한다. 잠시 후에 통이 젠의 방문을 두드린다. 남자가 아니라 승려이기에 들어 올 수 없다 말하지만 들여 보내달라 한다. 젠은 허락하고 통은 승려복을 벗고 샤워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통은 배고프다며 식당에 갈 것을 권한다. 젠의 딸은 거부하며 방에서 티비를 보고 싶다 말한다. 그런데 젠과 통은 둘로 분리된 화면이 나온다. 젠의 딸과 함께 티비를 보는 것과 식당의 젠과 통.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이해


본생담으로서의 이해


영화는 시작부터 영화가 어떤 세계관에 이야기를 풀어낼지 말해준다. “정글과 언덕, 계곡 앞에 서면 짐승이나 다른 존재였던, 내 전생이 떠오른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마치 싯타르타가 전생에 여러 생명체로 덕을 쌓아 깨달음을 얻었다는 본생담인 자카타적 이야기와는 반대로 분미가 어떻게 소가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처제 젠에게 농장을 맡기며 자신의 병이 들게 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사람들을 많이 죽인 업보라 말한다. 메여진 줄이 풀어져 숲 속으로 들어간 소가 다시 주이의 손에 이끌려 메여진 곳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영화는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 같은 영화다.


그래서 영화를 거꾸로 돌려보면 음악이 흐르는 식당 안에 있는 통과 젠은 미각과 청각의 세계에, 그리고 티비를 보고 있는 통과 젠은 가시의 세계, 샤워를 하는 통의 몸은 육체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통은 속세의 옷을 벗고 종교인(불교승려)의 의복으로 갈아 입는다. [열대병]에서 해체된 인간의 의식이 다시 속세로 진입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남자로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중재해 주는 승려로서, 관찰자로서다. 누군가를 이름과 돈으로 기록하는 기록하는 속세로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분미의 극락왕생을 빌어준다. 영화를 다 본 관객들은 분미가 소가 될 것임을 안다. 이야기는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거꾸로 흐른다.


등장 인물로서의 이해


분미 : 아내와 아들을 잃은 것 뿐만 아니라 병에 걸려있다.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분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다. 부처가 생로병사에 의문을 품고 출가한 것이라면 영화는 관객을 생로병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누군가는 분미를 동정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분미를 성공한 농장주로서 부러움을 가질 수 있다. 어떤 대상을 통해서 전달되는 모습이 같겠지만 인간의 감정은 늘 같은 선택을 하게 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하다.

DSC_4970.JPG 충북 진천 길상사

젠 : 분미의 처제 젠은 다리의 길이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인간의 이성과 감정이 불균형적임을 상징한다. 분미가 군인이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을 많이 죽인 업보라 말하지만 젠은 옳은 일이었다 말한다. 하지만 분미를 간호해주고 농장에서 일해 주는 라오스인 자이에게는 불안감을 분미에게 털어 놓는다. 악행을 두둔해주는 반면에 선행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는 불균형성은 영화의 끝무렵 와상(죽어 누워있는)의 상

태에서는 두 다리가 균형을 갖는다.


엉클분미.jpg

분쏭 : 아들 분쏭은 군인 시절 살생 했던 분미의 악행의 그림자다. 지울 수 없는 기록이자 업의 대물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난 악행들이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불교적 업보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이다. 그림자들이 쉬고 있는 숲 속으로, 그림자가 묻히는 동굴 속으로 분미는 아내 후아이를 따라 들어간다. 통이 맨 뒤에서 손전등을 비추며 따라간다. 그리고 분미와 젠의 그림자들은 앞장선다. 죽음에는 자신이 했던 악행이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불교적 생각이다.


후아이 : 42세로 죽은 모습 그대로 나타난 후아이의 유령은 시간이다. 인간이 본다고 하는 것은 늘 현재 만을 본다. 한 존재를 바라볼 때 생성과 소멸까지 볼 수는 없다. 또한 시간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은 유령처럼 늘 우리와 함께한다. 인간과 같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유령이 함께 한다는 후아이의 말처럼 시간에 따라 늘 변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시간이다. 동생 젠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후아이의 모습은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때만 아니라 의식이 없는 때에도 시간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농장 : 인물이 아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서 인격체가 모여있는 곳이다. 라오스에서 온 이들은 농장의 일원이었다가 떠난다. 세상이 자기 것 같았다가 죽어서야 세상은 세상 자체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듯이. 살생을 금하는 불교국가에서 더 많은 과실을 위해 벌레를 죽이는 농약을 한다.


공주 :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가는 인도설화 판차탄트라처럼 액자식이다. 그 액자에는 한 공주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추하다. 우리가 흔히 걸어 놓는 액자들의 인물들은 미의 대상이다. 추함을 담는다는 것과 아름다움을 담는다는 것은 구별이라는 방식이다. 이 구별은 자연의 방식은 아니다. 자연에는 다양성이 담긴다. 낯선 곳에 여행을 가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도 다양성을 눈에 담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기괴하건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들이지만 그것 조차도 인간은 선택해서 받아들인다. 추한 공주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자연과 호흡한다. 추함이라는 개념 조차 물거품처럼 의미 없이 사라지는 자연 속으로.


구도로서의 이해


영화는 [열대병]과 마찬가지로 헐리웃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원숭이 귀신 분쏭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중앙에 잡지 않고 나무와 함께 좌측에 담아낸다. 카메라가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는 분미를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따라가기는 하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사람이 카메라 안에 들어온다. 보이는 것들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시선처럼. 살다가 사라지는 사람들 처럼.


삶으로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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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까만배경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해 찬란하게 빛나는 분미의 상여로의 시간을 보여준다. 분미의 삶이 찬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찬란하다. 시인 프로스트는 탄생 기쁨의 대가로 삶의 고통을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가? 감독 위라세타쿤은 이 말을 뒤집어 대답한다. 찬란하다는 탄생에는 이미 죽음과 함께하는 것, 또한 찬란함은 고통을 견뎌내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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