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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병

설화로 영화 만들기 2

by 꼭그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열대병, Tropical Malady]이다. 2010년 [엉클 분미, Uncle Boonmee ]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기는 했지만 태국 전통설화로서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특히나 [열대병]은 할리우드식 카메라 움직임이 아닌 동양화적 구도로 장면을 표현한다.


열대병


줄거리


영화는 인간사회를 보여주는 전반부와 자연을 담은 후반부로 나뉜다. 얼음공장에서 일하는 통과 군인인 켕은 서로를 사랑하는 게이이다. 도심을 배경으로 그들의 관계가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이 전반부의 내용이다. “영혼의 길”로 명명된 후반부는 무엇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크메르인 무당이 호랑이로 변신해 있을 때 사냥꾼이 그를 죽여 무당의 영혼이 호랑이게 갇히게 된 설화를 통해서 후반부는 시작된다. 마을에 소와 사람들이 죽어가자 군인인 켕이 크메르인 무당이 변신한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정글로 들어간다. 인간의 모습을 한 무당을 잡지 못하고 호랑이의 모습이 된 무당과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이해


옛 동양의 시선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 한국화들을 보면 인간과 자연을 구도로서 구분 지었다.

수평 : 자연과 인간의 안정적 상태를 표현한다.

Jeong_Seon-Apgujeong.jpg 압구정, 겸재 정선


사선 : 안정적인 수평상태에서 기울어짐은 불안감을 준다. 또 다른 공간과의 분리에 사용된다. 신윤복의 월하밀회月下密會를 보면, 남녀와 몰래 지켜보는 여인과 분리되고 하늘의 달과도 분리되며 우측의 담장 너머의 집과도 인물들이 분리된 존재로 표현한다.


월야밀회(月夜密會).jpg 월하밀회, 신윤복


수직 : 자연을 종교적인 초월 세계와 연결시킴, 정선의 삼부연 폭포에서는 물의 낙하가 초월적 세계인 하늘과 닿아있다.

겸재의%20삼부연폭포1.jpg 삼부연폭포, 겸재 정선

딱히 이 그림들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구글 검색 순서였다. 다른 그림도 비슷한 구도이다. 우리의 한국 산수화들과 인물화의 구도는 영화 [열대병]에 사용된다. 그런데 영화가 두 개의 이야기로 분리되었듯이 이 구도도 서로 다르다.


구도


전반부


인간이 자연을 정의하는 구도를 담은 후반부 영혼의 길은 전통적인 시선으로 구도를 담았다. 전반부는 그 시선과 반대의 구도로 촬영된다. 수직의 초월 세계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같지만, 켕과 통이 살아가는 인간 사회는 자연의 구도와는 다르게 표현한다. 군인들이 죽은 시체를 발견하는 첫 장면은 수평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을 때에는 안정적 감적의 표현인 수평이다. 그리고 후반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크메르 무당이 벌거벗고 정글로 들어가는 장면에는 분리의 사선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감독은 첫 장면부터 구도를 어떻게 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개가 암에 걸렸다는 의사의 말에 침울한 상태인 통과 켕은 수평으로 그들의 불안을, 켕과 통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오두막에서는 분리의 상징인 사선으로 그들을 잡는다. 이 구도의 방식은 관객의 감정을 반대로 자극한다. 통이 얼음공장에서 회전 톱으로 얼음을 잘라내는 장면도 역시 수평 구도인데 얼음을 자르는 통의 상반신만을 보여줘도 통의 얼굴 표정과 기계음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위험을 관객이 느끼게 한다. 이런 구도를 통해서 그가 관객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에 있다.


『인간은 본래 야생동물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의무는 그 동물들을 억제하고, 야수적이지 못하게 조련하는 조련사처럼 되는 것이다.』 - 돈 나까지마


돈 나까지마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허구적 인물이라 생각된다. 혹은 위라세타쿤 감독의 의도는 저 말을 깨 부숴 허구임을 밝히는 데 있다. 그래서 전반부를 인간의 구도로 촬영을 했고 인간사회에서 켕과 통은 웃음을 띤 얼굴로 행복한 삶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관객의 시선에서는 그런 구도는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얼음을 자르는 통의 손과 하반신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관객의 입장에서는 위험을 느낀다. 그리고 병원의 대기 의자에 앉아 수술동의서를 작성하면서 통과 켕이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관객은 개가 곧 죽을 것을 안다. 결국 인간의 구도는 허구임을 관객의 심리로 드러나게 한다.


후반부


영혼의 길이라는 후반부의 시작은 한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크메르인 여성 무당이 호랑이로 변신해 사냥꾼을 찾아 자신의 어머니를 치료해 줄 것을 요청한다. 따라가던 사냥꾼은 여인의 치마 아래로 호랑이 꼬리가 보여 총으로 호랑이인지 사람인지 모를 그것을 죽인다. 그리고 그 사체는 어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무당은 호랑이의 몸에 갇혀 밤에는 호랑이로 변신해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전반부와 매우 흡사하다. 관객이 직접 확인할 수 없으면서 사실임을 강조한다. 처음부터 후반부 전체는 허구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 이제 내가 당신들을 위한 거짓말을 할 테니까 당신들은 이제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서는 안돼”라는 위라세타쿤 감독은 그래서 후반부는 인간들이 자연을 정의한 구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설화를 실화로 믿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DSC_8816.JPG 남원시, 장백산


영화 외적인 이야기 하나를 하고자 한다.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 자락의 장백산이라는 곳이다. 그저 여느 산처럼 보이지만 이곳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오래전, 어느 처녀가 호랑이에 물려가면서 그녀가 떨어뜨린 장신구와 피가 바위에 그 흔적을 남겨 지금도 전해진다 하는 이야기 하나와 노인들이 병에 걸리거나 흉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생매장을 했다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주위 산들을 “묻은 산”이라 부른다.

이 사실을 알기 전에는 지리산 자락의 장백산이라는 경치 좋은 곳으로 생각했겠지만 이젠 다른 사실도 알게 됐다.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 산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도 알게 됐다. 이 정의 내린 것에 관한 이야기가 후반부다.


무당은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었지만 사냥꾼이 무당을 죽여 호랑이로 정의定義 된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라도. 호랑이를 잡으려 숲 속으로 들어간 켕은 인간으로 변신한 무당과 마주친다.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를 총으로 쏘지 않고 붙잡으려 한다. 마지막에는 켕이 호랑이에게 희생될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생각과 감정은 무당이 호랑이보다 나약한 인간으로 변해 있을 때 총으로 쏴 죽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허구다. 허구의 이야기를 실화로 받아들이는 이 심리적 상태. 정의는 인간의 이성으로 문명사회를 지향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구분을 하기 위해서인가 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높은 나무 위의 호랑이를 보며 그때서야 알게 된다. 모든 것들을 정의하고 조련해 왔던 인간이 자연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보게 된다.


『켕 : 여기서 나 자신을 본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공포, 슬픔들이 현실적이어서 그런 것들이 나에게 삶을 생각하게 했다.


호랑이 : 이젠 너의 영혼을 빼앗았다(관객). 우리는 동물도 인간도 아니다. 호흡(정의, 定義)을 멈춰 보고 싶었어.


켕 : 유령(정의 내릴 수 없는 것), 너에게 나를 준다. 내 영혼, 육체, 기억을 내 피 모두를』


인간과 자연이라는 구조와 정의가 초월적(수직적) 세계로(종교, 호랑이) 켄(인간)은 해체된다.


마치며


영화에서도 설화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위라세타쿤감독의 [열대병]에서 보여준 것처럼 여전히 매력적인 이야기다. 전해지는 수많은 설화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색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될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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