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잠든, 고개 이야기
동물을 인격화해 사람 대신 인간의 문제를 풀어낸 것이 동물 설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인 지역에 관한 설화를 이야기할까 한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역과 마을에 어떤 마음을 담았는지 보려 한다. 지역공동체에서 만들어지는 설화는 당연하게도 그 지역에만 존재하는 특정한 것과 관련된 설화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 얽힌 설화다.
조선시대 예언서로 알려진 정감록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열 곳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지명으로 공주시 유구읍, 보은군 속리산면, 영월군 영월읍, 무주군 무풍읍, 부안군 변산면, 남원시 운봉읍, 봉화군 춘양읍, 영주시 풍기읍, 예천군 용문면, 상주시 화북면, 합천군 가야면이 몸을 보전할 수 있는 땅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전쟁과 흉년을 피해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전쟁과 가난을 피해 용문면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용문면에 묏자리를 쓰자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 뒤로 용문면 사람들은 함부로 묏자리도 쓰지 않고 지관을 불러 묏자리를 정했다. 그 뒤로 임진왜란 당시에 이곳 용문면은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았다 한다. 정감록에 의해서이건 역사적 결과에 의해서이건 이곳은 지역 자체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성시되는 곳이다.
예천처럼 지역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 있는가 하면 대개 지역 설화는 지명, 산과 바위 등의 유래와 관련된 지물(地物) 설화와 그 지역 태생의 인물(人物) 설화가 있다. 지물 설화와 인물 설화는 따로 만들어 지거나 합쳐져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면서 유대감을 높인다. 지금도 어떤 건물이나 지형, 장소와 관련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느 시절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고, 어떤 식당이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렇다. 특정 인물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유명인의 고향이나 출생지에 생가를 만들어 기념하는 것처럼 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어 지역민의 자부심을 높이기도 한다. 지물 설화(地物說話)
계명산(鷄鳴산山) 이야기
『충청북도 충주(忠州)의 동쪽에 있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는 예전에(백제시대) 지네가 많이 나와서 지네와 닭은 상극(相克)이라 산 이름을 계족산(鷄足山)이라고 해서 불렀더니 지네가 전부 없어졌다. 그런데 계족산(鷄足山)으로 부르고 보니 닭은 땅을 파헤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주 지방에 재산가가 생기질 않았다. 부자가 나지 않고 요즘 말로는 재벌이 생기지 않는 까닭에 근자에 와서 그 산에 이름을 다시 고쳐야 하겠다고 해서 그런 방면에 조예가 깊고 고명한 분들이 서로 모여서 최근에 와서 닭(鷄) 자는 그대로 놔두고 닭이 운다는 울 명(鳴) 자를 붙여서 계명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과 어떤 관계 맺기가 이루어져야 하는지의 의도가 담겨 있다. 지네라는 것이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어 퇴치하려는 의미로 계족산으로 부른 것처럼 삶의 환경으로 개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담겨있다. 산의 이름으로 닭의 이미지를 넣어 부정적인 지네를 제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지 이름만 바꿨다 해서 지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 이름으로도 위안을 삼으려는 이야기다. 한국에는 산이 많다. 모든 산들을 다 소개할 수 없어 산에 인간의 삶을 위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확인한 정도로 마무리하겠다. 다음은 산 보다 더 많은 고개 이야기다.
고개 이야기
달래고개
『어느 마을에 사이좋은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누나가 혼기가 차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누나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오누이는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다. 누나가 앞서서 산을 오르는데 땀이 차니 옷이 그대로 몸에 붙어서 혼기 찬 여인네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동생은 난생처음 보는 여인의 몸에 욕정이 일었으나 동생은 누나에게 그런 욕정을 품은 자신이 부끄럽고 원통해서 어느 넓적한 바위가 보이자 그곳에 성기를 꺼내 올려놓고 주위에 있던 돌멩이로 자기 물건을 내리 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산을 오르던 누나는 동생이 뭐하나 뒤 돌아보니 동생이 그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가 보니 이미 많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동생을 부둥켜안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달래지, 달래지" 그리해서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간 동생을 기려, 달래고개라 했다고 전해진다.』
남자들의 성적 농담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하지만 고개에는 주로 슬픈 이야기들이 많다. 고개에서 넘어지면 삼 년 밖에 살 수 없다 해서 삼 년 고개라는 고개가 있었다 한다. 노인이 삼 년 고개에서 넘어져 돌아와 어린 아들의 조언으로 다시 넘어지기를 여러 번 해 오래 살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고개는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 넘어야 했던 곳이다.
저승 고개(봉오 고개)
옛날 이곳 무안 봉오 고개 근처의 사찰에 공부를 하기 위해 노승이 한 겨울에 찾아왔다. 눈이 너무 쌓여 길을 잃다 배고픔과 추위에 그만 죽고 말았다. 그 뒤 이 고개를 넘으려는 사람들을 노승의 귀신이 따라가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그를 죽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노승의 제자가 스승의 시신을 안장하고 스승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한다. 그리고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 사람들은 떡 세 잔을 바치고 넘었다 해서 저승 고개라 했다 전해진다.
묻은 산
전북 남원의 장백산 주위를 묻은 산(향토사료에는 무등산이라 나오지만, 마을 주민들은 묻은 산이라 한다.)이 있는데, 이곳이 묻은 산이 된 사연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떨어지자 일 하지 못하는 노인들을 산에 묻었다 해서 묻은 산이라 전해진다.
열 고개
전남 해남에는 열 고개라고 하는 고개가 있다. 인가를 짓지 못하고 지금은 공장이 들어서 있다. 위치상으로는 전망 좋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집을 짓지 못하는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 이 마을에 역병이 돌았다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무수히 죽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이 열 고개에 묻어 주었다 한다. 그 뒤로 밤에 불빛이 있어 도깨비 고개라고도 했으며 어린아이들의 얼이 담긴 곳이라 해서 “얼 고개”라 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넘고 넘어도 결국 넘지 못한 “열 고개”라 불리고 있다. 삶의 고개를 넘기 버거웠던 아이들의 영혼이 잠든 곳이다.
한국에는 작은 산들이 많다.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옛사람들은 고개 하나 넘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호랑이 때문인데, 실록에 보면 많은 피해를 당한 해에는 400명이 넘게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했고 매년 100여 명 이상이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고개는 생명을 걸고 넘어야 할 곳이었다. 충청북도 보은의 사립문(대문) 고개 도호 환과 관련 있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삽작 고개
『옛날 경상도에서 보은으로 시집오던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마를 타고 신랑 집에 가는 도중 고개를 넘어 주막집에 도착 해쉬고 있는데 누군가 찾아와서는 신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해준다. 외동딸이라 상주이기에 다시 돌아가려 했는데 모두 말렸다. 모두가 산 넘어가는 걸 두려워해서 아무도 다시 산을 넘지 않으려 했다.
모든 사람들의 만류에도 여자는 꼭 아비의 상을 자신이 치르겠다 결심하고 산을 넘으려 했다. 주막에는 상인들이 많이 모이면 함께 넘으려 했지만 숫자가 적어 그냥 포기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들을 뒤로하고 산을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주막에서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람 냄새를 맡았는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여자는 옷을 모두 벗어서 둘둘 말아 허리에 매고서는 엎드렸다. 머리도 풀어헤치고 엎드려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상 즈음에 다다르니 호랑이가 여자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랑이는 보고 있을 뿐 여자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호랑이는 생각했다. "이것 봐라! 사람 냄새는 나는데 얼굴인 것 같은데 입은 세로로 찢어졌고, 엉덩이를 보아하니 무슨 꼬리가 저리 크냐. 더군다나 똥구멍은 가로로 찢어지고, 이게 말로만 듣던 천제의 짐승 기린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호랑이는 잘못 걸렸구나 싶어 도망을 쳤다.
여자는 그렇게 해서 친정에 갈 수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고개를 여자의 두 문(門) 때문에 고개를 넘었다 해서 충청도 사투리로 문을 뜻하는 삽작 고개라 했다는 이야기다.』
이원리는 낮은 봉우리 여러 개가 둘러 쌓인 곳이다. 삽작고개는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 사립문 고개가 있는 이원리는, 도보나 소나 말을 이용해 상인이나 여행객들이 머물렀던 주막이 있던 곳이라 생각된다. 주막에 머무르는 여행객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파는 또 다른 상인과 여행객들의 소나 말을 먹여주고 품삯을 받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촌락을 이루던 곳을 주막촌이라 했다. 그러다 교통수단이 발달해 주막의 역할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떠났다. 그래도 작은 농지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주막을 중심으로 촌락을 이룬 주막 촌은 교통수단과 도로의 발달로 대부분 사라졌다. 마을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나마 이원리처럼 적은 농지를 기반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이렇게 여전히 마을이 남아 있다. 농지가 적어 부가가치 높은 과일과 인삼을 재배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 사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이 풍부하게 흐르고 있었다. 삽작 고개의 이야기는 주막에서 술잔을 나누며 재미난 이야기를 안주 삼아 나누던 여행객들의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인 듯하다..
돼지 고개 이야기
한산 모시관 옆 기산면으로 향하는 이 도로를 돼지 고개라 했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악명 높은 도적무리가 있었다. 마을을 약탈하고 약탈할 것이 없으면 또 멀리 다른 마을에 가 약탈하고서는 다시 이 고개에 돌아왔다. 그러니 인근 마을 주민들은 늘 도적들의 약탈을 걱정했다. 그런데 이 고개에는 위쪽에는 한 홀아비(신선 혹은 수도자)가 살고 있었다. 지금의 모시관 즈음에 한 과부가 살았다. 그 둘은 돼지 한 마리씩 키우고 살았다. 그런데 도둑들은 이 홀아비와 과부의 집은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절대 약탈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과부의 돼지가 집을 뛰쳐나갔다. 그러더니 홀아비의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과부는 돼지를 쫓아가 돼지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다. 외간 남자의 집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어 마냥 기다리다 해가 질 무렵 집에 돌아왔다. 며칠을 기다리니 다시 돼지가 돌아오니 과부는 돼지가 또 도망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높게 쳤다.
하지만 돼지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홀아비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그래서 또 홀아비의 집 앞에서 돼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너무 추워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과부가 쓰러지면서 "쿵!" 소리가 나니 홀아비는 누가 왔는지 방문을 열어보니 쓰러진 여인이 있어 홀아비는 얼른 밖에 나가 과부를 데려와 따뜻한 아랫목에 눕히고는 언 몸을 이곳저곳 주물러 줬다.
정신을 차린 과부는 돼지의 일(더 이상 자신이 키우지 않아도 되고)도 그렇고, 이왕 외간 남자의 방에 들어왔으니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되어 죽으려 했으나 홀아비의 설득으로 같이 살기로 했다. 둘은 그렇게 돼지 때문에 부부의 연을 맺으니 고개에 있던 도적무리들이 그곳을 떠났다 한다. 사람들은 그곳을 "돼지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돼지 고개 이야기를 해석하자면, 도적무리들은 호환이라고 해석된다. 선비는 산신에, 여성은 창조의 신 마고할미를 의미한다. 돼지는 호랑이에게 바칠 제물과 인간의 다산을 상징한다. 이렇듯, 고개는 생사를 위협하는 곳이지만 여성의 생명력의 기운을 넣어 고개 이야기를 완성해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려는 옛사람들의 생각이다.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해 인간의 생존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을 여성의 상징을 통해 삶의 영속성이 끊기지 않게 하려는 심리적 대응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관령 설화
대관령이라 부르게 된 이유가 바람 때문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바람이 대굴 대굴 굴러 내려간다 해서 대관령이라 했다고도 하는데 발음 때문에만 들어진 이야기인 것 같다. 또 강릉지역만의 "고시래" 유래 설화가 만들어다. 강릉에서 대관령을 넘어갈 큰길을 만들었다 해서 대관령이라 불려졌다고도 한다. 또 고씨라는 사람이 대관령을 넘을 큰길을 뚫었다 해서 대관령이라 불려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강릉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해서 대관령 길을 뚫은 고씨라는 사람을 죽이니 흉년이 잦았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씨의 무덤을 잘 만들어 모신 뒤에야 농사가 잘 되었고 고씨의 무덤이 어디인지 몰라 "고씨네" 하면서 음식을 그에게 바친다는 강릉지역에 내려오는 "고수레" 유래 설화도 있다.
『강릉현 동래 정씨인 정현덕의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대관령 성황신이 나타나 정씨 집에 장가들기를 간청했다. 사람이 아닌 성황을 사위로 맞을 수없다 거절했다. 하루는 정씨의 딸이 노란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단장하고 뒷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범이 와서 업고 달아났다. 소녀를 업고 간 범은 산신이 보낸 사자로, 대관령국사성황은 소녀를 데려다 아내로 삼은 것이다.
범에 물려 간 것을 안 정씨 집에서 국사성황을 찾아가 보니,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정신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가족들이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우니 처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 혼배 한 날이 4월 15일이다"- 강릉단오제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르다. 호랑이가 내려와 정씨의 딸을 헤치니 머리만 남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상의해 범일국사와 혼례를 치르게 하고 여성황사에 모셔 지금까지 모셔졌다 한다. 혼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죽은 정씨의 딸을 범일국사의 처로 삼게 했던 것이다
계족산 이야기처럼 고개도 마을과 사람을 연결하는 삶의 영역이다. 산과 고개의 이야기에는 죽음을 기억하고 삶을 이어가려는 옛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신령을 통해 호환을 막아달라 했던 성황제와 단오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범일 국사의 어머니가 석천 우물에 비친 해(혹은 달)를 떠 마시고 범일국사를 잉태했다. 시집도 안 간 여자가 애를 낳으니 부모들은 그 사실을 숨기려 갓난아기를 지금의 학 바위에 버렸는데 3일 뒤 죽은 줄 알았던 아기는 학이 날개를 펴 아기를 보호하고 있었고 아기의 입에는 아름다운 구슬을 물고 있었다. 하늘의 뜻이라 여겨 다시 데려다 키우니 훗날 나라의 큰 승려가 되었다 하여 지금도 이곳 학산리에서는 우물을 보호하고 그를 위한 서낭제를 올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억압과 제한을 받기는 하지만 토착신앙은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불교에 수용된 토착신앙적 요소인 삼신각, 칠성각을 사찰에서 행해지던 제례를 다시 당집을 세우고 것을 국가기관인 관아가 제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강릉, 대관령의 범일국사 성황 사처럼 전라북도 김제 성모암에는 풍농을 기원하는 성모신이 모셔지기도 했다. 또한 강릉과 유사한 설화들이 전해진다.
1
김제 만경 평야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는데 유독 한 농민의 벼만 잘 자랐다 합니다. 그 농민은 만경평야의 어느 묘비에 밥을 던져주곤 했다 합니다. 그러자 다른 농민들도 따라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묘비의 주인은 성이 고씨여서 사람들은 밥을 던질 때 "고씨네"라 말하며 던졌다 합니다. 그것이 "고시래"가 되어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 모두 따라 하게 되었답니다.
2
한 스님이 승려인지라 후손이 없어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의 무덤에 벌초하는 것과 제사하는 것이 걱정되어 김제 만경평야에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었다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돌봐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덤에 밥을 갖다 놓은 농부와 제사를 지낸 농부의 농사는 잘 되었다 합니다. 그것이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직접 제사를 하지 못하지만 그 묘가 있는 방향으로 밥을 던졌다 합니다. 그 승려의 어머니의 성이 고씨였는데 그 승려의 어머니 잡수시라고 "고씨네" 또는 "고수레"라고 하면서 밥을 던진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합니다.
처녀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복숭아 하나가 떠내려 왔다. 그것을 먹고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모는 처녀가 애를 낳은 것이 부끄러워 복숭아가 떠 내려온 냇가에 아기를 버렸습니다. 아이가 버려진 것을 안 처녀가 냇가로 가 보니 까마귀 수천 마리가 날개를 펴 아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합니다. 부모는 기이히 여겨 아이 기르기를 허락했습니다. 복숭아를 먹고 낳은 아이라 하여 도손(桃孫, 혹은 도순)이라 이름 지었다. 아이가 자라 출가하여 법명 진묵이 되어 중국으로 건너가 도통한 스승으로부터 천문과 지리를 배워 풍수지리에 밝았다. 중국에서 돌아온 진묵 대사는 자신 때문에 시집도 못 가고 죽은 어머니가 자신이 죽어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명당에 어머니의 묘 자리를 썼는데, 그곳이 지금의 성모암이다. 옛사람들은 도손의 어머니 고씨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밥을 던져 주면 농사가 잘 되었다 한다. 그것이 "고수레"의 유래라 합니다.
고수레의 기원에 관해 다른 설이 있다. 고조선 시대에 고시(高矢)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불을 얻는 방법과 농사짓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였다는 설이다. 또 중국의 향음주례(향대부(鄕大夫)가 인재를 뽑아 임금에게 천거할 때 출향에 앞서 베풀었던 전송의 의례)에 보면 향대부가 빈을 초청해 술자리를 하는데, 고수레의 예로 땅에 희생 고기(개고기)의 뼈와 살과 허파를 고수레한다. 조선시대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권장되기도 했다. 향교에서 행하던 고수레가 성황사나 성모암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여전히 향촌에서는 제례를 토착신앙지에서 주로 행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국가에서 토착신앙을 권장하는 것은 농업경제시대에서 마을 공동체를 통한 노동 생산성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토착신앙적 의식을 없애기란 쉽지 않아서 국가에서 정한 방식의 제례로 하게 했다. 지금도 여전히 당 제례를 올리고 있는 서낭당에 얽힌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