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설화는 우리 설화로 해석하자
뱀 변신 설화
구렁덩덩 신선비
『자식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던 과부 할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중이 찾아와 할머니에게 밥을 달라고 하지만 가난한 할머니는 중에게 줄 밥이 없다며 다른 곳으로 가라 한다. 중은 오던 길에 구렁이를 죽인 막대로 할머니를 쿡 찌르고는 할머니 집을 떠난다.
얼마 후에 할머니(혹은 정승 집 늙은 여종)가 임신을 하게 되고 출산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 사람이 아닌 구렁이였다. 할머니의 이웃에는 딸만 셋인 정승(부자, 장자)이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세 딸은 아이를 보기 위해 할머니 집을 찾았다. 할머니가 굴뚝에 숨겨 둔 구렁이가 자신이 낳은 아이라며 보여주자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징그럽고 무섭다며 도망갔지만 셋째 딸은 구렁덩덩 신선비가 예쁘게 생겼다 하며 축하해 주었다. (혹은 구렁이와 셋째 딸이 같은 날에 태어났다)
세월이 흘러 구렁이가 장가갈 나이가 되자 정승 집 딸과 혼인을 시켜달라고 할머니에게 졸라댔다. 어림없다며 할머니가 말리자 구렁이는 한 손에 횃불을, 다른 손에는 장검을 들고 할머니를 위협했다. 그리고는 만약 그리 되지 않을 경우에는 가시덤불을 자신의 몸에 칭칭 감고는 다시 할머니 뱃속으로 들어간다며 협박했다.
할머니는 이왕지사 말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정승 집을 찾아가 자신의 아들과 딸을 혼인시켜 달라고 말한다. 정승이 딸들을 불러 물으니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정색을 하며 도망가는데 셋째 딸은 결혼을 승낙한다. 단 초야에 자신의 집에 있는 간장과 밀가루로 신랑이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구렁이에게 돌아가 그러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신혼 초에 구렁이가 신부 집 밀가루와 간장으로 목욕을 하니 허물을 벗고 아주 잘생긴 선비로 변하더니 허물을 아내에게 주고 잘 간수하게 한다. 셋째 딸은 허물을 자신의 옷고름에 숨겼다. 어느 날 선비가 과거(공부하러 신선의 집, 용궁, 저승세계)를 보러 집을 나설 테니 자신의 허물을 절대 태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선비가 집을 비운 사이에 흉측한 구렁이가 잘생긴 선비로 변한 것에, 시샘하던 언니들이 찾아와 허물을 빼앗아 불에 태웠다. 허물이 타는 냄새(혹은 허물을 태우자 선비의 몸이 검어졌다)가 선비에게까지 전해지자 선비는 자신의 당부를 지키지 않은 신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남편을 찾기 위해 중(거지, 혹은 세 아들과 함께)이 되어 남편을 찾아다녔다. 우여곡절 끝에(동물, 이인(신선)들의 도움으로 남편이 있는 곳을 알아내 선비가 있는(신선의 집, 용궁) 곳에 찾아가 집으로 돌아가자 한다. 하지만 선비는 이미 그곳에서 새로운 아내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래서 새로운 처와 내기를 해 이긴 사람과 함께 살기로 한다. 아내는 멧돼지, 호랑이, 빨래하는 여인, 참새(혹은 새 보는 아이)등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 눈썹 세 개 뽑아오기, 나막신 신고 독에 물 채우기, 빨리 천 짜기, 땅바닥에 쏟은 쌀알 줍기 등의 내기에 이겨 남편과 함께 집에 돌아오게 됐다.』
구렁덩덩 신선비 이야기는 신이(神異)한 출생이라는 점이 그리스 신화 프시케(psyche)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래서 신화의 재미를 추구한 이야기라는 해석을 하기도 하고 늙은 할머니의 출산과 아내의 고난을 통해서 여성의 억압된 여성성의 해방이라는 여성심리학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
먼저 이 설화를 신화와 여성심리학적 두 가지로 해석하는 것을 소개하자면, 신화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할머니가 뱀을 낳는다는 점에서 김수로왕, 동명성왕, 탈해 이사금의 한국의 난생 시조 신화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셋째 딸이라는 점과 신분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하게 되며, 남편의 마음을 다시 되찾기 위한 여성의 고난이라는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가 프시케 신화와 같다.
에로스와 프시케
『어느 왕의 셋째 딸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에 사람들이 찾지 않자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시켜 프시케가 추악한 수컷을 사랑하도록 한다. 프시케를 찾아간 에로스가 자신의 금화 살촉에 손이 찔려 프시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프시케의 입술에 에로스가 쓴 단물을 묻혀 놓아서인지 인간 누구도 그녀에게 청혼하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가 이미 시집을 갔지만 좀체 혼처가 생기지 않는 셋째 딸의 미래를 알기 위해 왕은 아폴론 신전의 사제에게 찾아가 물으니 프시케는 인간의 아내가 될 운명이 아니며 산꼭대기의 괴물과 결합하게 된다고 알려준다. 왕은 순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프시케를 산 꼭대기에 올려 보낸다.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프시케를 산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프시케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궁전에서 신랑 에로스를 만나게 해주지만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프시케도 모습을 볼 수 없어 누구인지 몰랐다. 프시케는 제피로스의 궁전에서 평안히 살아가고 있었다.
동생이 자신들보다 더 호사를 누리며 사는 것에 질투가 난 언니들이 찾아와 신랑의 모습을 본 적 없다는 동생의 말에 언니들은 프시케의 신랑이 뱀이라는 소문이 있으니 등잔과 낫을 에로스의 눈에 띄지 않게 준비한 뒤에 에로스가 잠들어 있을 때 얼굴을 확인해 괴물이면 낫으로 죽이라고 말한다. 언니들의 말에 따라 프시케가 에로스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 램프의 기름이 떨어져 에로스의 잠을 깨웠다.
의심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며 에로스는 프시케를 떠난다.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언니들은 자신들이 이제는 에로스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산꼭대기에 올라 제피로스에게 에로스가 머무는 곳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하면서 뛰어내린다. 제피로스가 미처 준비하지도 않은 사이에 뛰어내려 두 언니는 죽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신랑을 찾아 그리스 이곳저곳을 떠돌다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전에서 지내던 프시케에게 데메테르는 아프로디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할 것을 조언한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찾아가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자신이 주는 시련을 통과하면 용서해 줄 것을 약속한다. 땅에 있는 곡식 고르기, 양털 뽑기, 마지막으로 지하세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에게 얼굴 단장에 필요한 것을 단지에 담아 오라는 것이었다.
저승의 문지기 케르베르스를 피해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와 만나게 된 프시케는 단지에 단장에 필요한 것을 담아 지상세계로 나온 프시케는 단지 안에 들어있는 것이 궁금해 열어본다. 페르세포네는 저승의 신 하데스와 결혼하게 된 것은 아프로디테와 에로스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들에게 복수하려 잠의 씨를 넣어줬는데 단지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 열어 본 프시케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한 마리의 나비(psyche)가 날아와 에로스에게 그 사실 전합니다. 전해 들은 에로스는 프시케가 잠들어 있는 곳에 도착해 잠의 씨앗들을 단지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제우스에게 찾아가 프시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한다. 청년이 된 에로스를 대견하게 생각한 제우스는 아내 아프로디테의 프시케에 대한 노여움을 거두기를 요청하자 아프로디테는 이제 에로스가 어머니인 자신을 떠나 아내 프시케에게 간다는 것을 인정하며 프시케를 깨워준다.』
구렁덩덩 신선비와 프시케 이야기는 신과 인간이라는 신분의 차이에도 사랑이 이루어지고, 여성의 고난 속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방식도 두 이야기가 비슷하다. 여성이 고난에 맞선다는 점에서 여성신화로서 해석할 수 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신화인물을 창조해 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게 했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와 조금 다르게 여성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성적 욕구(libido)의 실현과 성적 제약을 벗어나려는 의지라 보는 여성심리학적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구렁덩덩 신선비 설화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리비도(성욕구, 성본능)가 상실된 것이 아니라 남성 관점에서의 성적 대상으로서의 상실이라는 무의식 세계와 여성에 대한 성적 제약이 존재하던 시대를 극복하려는 여성의식을 표현했다고도 한다.
결혼의 성사도 아버지의 결정이 아니라 여성이 권한을 갖는 것과 소년의 허물을 벗겨내 남성으로 완성시켜주며 그 허물을 다시 여성에게 건네지는 것 또한 소년을 잉태할 수 있는 여성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
어떤 해석이 정확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옛사람들의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전해져 당시 사람들과 전혀 다른 해석일지라도 설화가 그래 왔던 것처럼 해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에게 상상의 공간을 확장시켜주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볼 것이다.
학계의 해석과 겹쳐지는 부분도 있고 전혀 다른 해석이 될 수도 있겠지만 구렁덩덩 신선비 설화를 우리 설화의 요소를 가지고 해석하려 한다. 대부분의 한국 설화 해석들은 먼 외국이나 주변국의 설화를 대입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팥쥐가 같다며 함께 해석하고, 구렁덩덩 신선비도 또한 프취케 신화를 가져와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 전체는 시종일관 우리 설화를 가져와 해석하려 한다. 마치 서양의 양복을 가져와 한복을 해석하려는 것처럼 어색할 뿐이다. 기존의 해석과 어떤 부분은 같을 것이며 다르기도 할 것이다.
임신의 이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처럼 할머니가 빨래터에서 구렁이의 알을 먹고서 임신을 하게 되고 구렁이를 낳는다. 하지만 구렁덩덩 신선비의 임신의 원인은 중(스님)이 구렁이를 죽인 막대기로 할머니를 찔러 임신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의 경우에는 서동설화와 유사하면서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의 난생(卵生) 신화로 해석할 수도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성적 관계를 통해서 임신을 하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야기 시작의 외면적인 부분을 보면 신화적이거나 여성심리학적 해석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다른 설화를 대입해 이 부분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 구렁이 알을 먹고 구렁이를 낳았다는 것은 궉씨(鴌氏) 시조 설화와 비슷하다.
궉(鴌)씨 설화
『어느 마을 소녀(과부)가 저녁 무렵에 냇가(우물, 산)에서 빨래(바가지로 물을 푸는데)를 하고 있는데, 이제 막 떠오른 달이 냇가(우물과 바가지)에 둥실 떠 있었다. 냇가의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실 때 새가 한 마리 날아가며 “궉궉” 울었다. (혹은 새가 날아가며 무언가를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소녀가 먹고) 그 뒤 배가 불러 사내아이를 낳자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원님에게 찾아갔다.
원님은 처녀(과부)의 말을 듣고는 새(조(鳥)가 하늘(천(天)로 날아가며 ‘궉궉’ 울었으니 하늘천에 소재를 합하여 궉(鴌)씨로 정해주었다.』
궉씨에 대한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과 이덕무(1741~1793)의 양 엽기에 성씨의 유래를 알 수 없지만 순창과 선산에 궉씨촌이 있다는 기록뿐이다. 궉씨에 대한 기원은 시조 설화를 통해서 구전되고 있다.
궉씨의 유래에 대해서 다양한 추측을 하는데 궉(鴌)은 원래 봉(鳳)의 이체자(음과 뜻은 같으나 모양이 다른 글자)이며 복희의 펑(凤)을 가져와 봉(鳳)씨를 다시 궉(鴌)으로 하였다는 것과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장수 궉시영(鴌時永)을 시조로 하는 외래 성씨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궉씨에 대한 이수광(1563년 ~ 1628년)의 기록 이전에 궉씨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반 이후 새롭게 편입된 성씨다.
이 땅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성씨로 등록이 되어야 하기에 그 가문의 기원인 시조 설화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쉽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국의 토착신앙의 신과 연결되는 존재인 새와 결합된 궉씨 시조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 해석된다. 새롭게 편입된 성씨이고 토착신앙과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 중기에도 토착신앙적 관념이 뿌리 깊게 사람들 마음에 자리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시조 신화는 신이(神異)한 임신과 출생을 가져야 하는데 궉씨 설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궉씨 설화에서 임신을 하게 되는 이유는 자연과의 결합이다. 새의 똥이나 소리, 베어진 나무, 달과 같은 자연계와의 결합이다. 궉(鴌)씨라는 이름의 문자적 해석을 통해서는 하늘(天)과 새(鳥)의 결합이라는 점에서도 주로 새와 관련되어 임신하는데, 초기 국조(國祖) 신화의 형식과 같다.
구렁덩덩 신선비에서 구렁의 알을 삼키고 임신을 하게 되는 것과 궉씨 설화에서 새의 똥을 삼키고 임신을 하게 된 이유는 토착신앙적인 수신과 천신을 여성의 몸에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으로 재생시킨다. 구렁덩덩 신선비도 마찬가지다.
구렁덩덩 신선비의 또 다른 임신 원인은 중이 막대기로 할머니를 찔러 임신한다. 남성이 여성으로 진입하는 성행위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남성의 손에 들려있던 막대기는 뱀을 죽인 상징인데, 인간을 파괴할 수 있는 힘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여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생성과 파괴의 힘을 갖는 뱀이 된다.
뱀이 새의 알을 해치려 하자 구해준 선비를 뱀이 죽이려 하자 새벽종이 울리도록 새가 날아와 부딪혔다는 이야기처럼 뱀에게는 부정적인 설화들도 많다. 우리 설화에서 생성과 파괴의 힘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은 마고할미다. 한국의 창세신화라 할 수 있는 마고할미에 관해 박제상이 저술한 부도지 3장을 보면
『마고가 실달대성(實達大城)을 끌어당겨 천수(天水)의 지역에 떨어뜨리니 대성의 기운이 상승하여 수운(水雲)의 위를 덮고, 길달의 몸체가 평평하게 열려 물 가운데에 땅이 생겼다. 땅과 바다가 나란히 늘어서고 산천이 넓게 뻗었다. 이에 천수의 지역이 변하여 육지가 되고, 또 여러 차례 변하여 수역(水域)과 지계(地界)가 다 함께 상하를 바꾸며 돌므로 비로소 역수(曆數)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기(氣)∙수(水)∙화(火)∙토(土)가 서로 섞여 빛이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을 구분하고 풀과 짐승을 살지게 길러내니 모든 땅에 일이 많아졌다.』
여신(女神) 마고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할미와 결합하여 지금은 삼신할미, 신선 할미로 알려진 마고할미는, 구비전승 설화에서는 큰 거인으로서 치마에 돌을 담아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세상을 창조한 힘은 여성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생성을 끝냈기에 마고는 할미가 되고 그 생성과 파괴의 힘은 인간 여성에게 넘겨진다. 할머니가 창조한 뱀을 파괴하고 인간 남성으로 셋째 딸이 재생시킨 것이다. 명나라 주원장과 관련된 설화도 선조들이 전하고 있는데, 뱀의 재생성과 관련되어 있다.
뱀의 영혼을 가진 주대명(주원장)
『걸인 패(혹은 가난한 집)에서 구렁이의 혼을 가진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비범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하루는 어느 마을 사람들이 주대명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들이 사는 마을의 주민과 마을 원님의 가족들이 원인을 알 수 없이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주대명은 그 마을 원님 집에 찾아간다.
원님의 집에는 과년한 원님의 딸 한 명만이 남고 모두 귀신에 의해 죽었다. 딸은 그날이 자신이 죽는 날이라고 말하자 주대명은 자신이 귀신을 물리쳐 주겠다고 하며 그 집에 머물기를 요청한다. 밤늦게 귀신이 찾아와 딸을 해치려 하니 주대명이 귀신을 물리치려 하자 귀신은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 마을 원님에게 살 집을 마련해 달라는 말을 하면 모두 죽였다는 것이다. 자신도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고 복수를 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원님의 딸을 죽이지 않겠냐고 물으니 귀신은 살아서 얻지 못했던 머물 장소를 하나 마련해 달라고 한다. 주대명은 귀신이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자 귀신은 한을 풀고 마을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
재생의 상징인 뱀의 혼이 황제에 들어 있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 달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설화에서의 금기
구렁덩덩 신선비 설화에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게 하는 것은 허물이라는 금기다. 남편이 당부한 금기를 어겨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니들에게 남편의 허물을 빼앗겨 태워진다는 의미는 남성인 남편의 허물을 다른 여성들에게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사회인식과 맞닿아 있다.
한국 설화에서는 다양한 금기가 등장하고 주인공에게 고난을 준다. 금기는 한국 설화에서 중요한 소재다. 설화에서 금기를 어기면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며 시련, 이별, 고통을 받게 된다. 단군신화에서 호랑이가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으로 변하지 못한다거나,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아내가 용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이별하게 된다..
장자못 설화처럼 며느리가 돌로 변하는 비극적 결말이 있기도 하지만 구렁덩덩 신선비 설화처럼 여성이 금기에 대한 시련을 적극적으로 극복해 희극적 결말로 끝나기도 해 신화적이기도 하다. 설화를 주고받았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장자못 설화에서 떠나온 며느리가 뒤돌아 집을 바라본 것은 친정(親庭)을 바라본 행위라는 당시 결혼관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으며, 콩쥐팥쥐에서도 계모와 팥쥐가 찾아오면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남편의 말을 어겨 콩쥐는 죽는다.
구렁덩덩 신선비 설화에서도 남편의 당부를 어긴 것은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이라는 말처럼 여성의 결혼생활은 소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의식세계에서는 그렇게 해석되어야 했을 것이다. 여성에 의해 벗겨졌던 남성의 허물을 외부에 노출시켜 셋째 딸은 고난을 겪게 된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완성, 창조, 재생의 의미이기 때문에 여성의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여성에게 고난을 부여할 동기는 금기의 어김일 수밖에 없다.
여성과의 대결
아내는 중이 되어 아이 셋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 떠난다. 인간이 아닌 종교적인 초월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남편의 새로운 처와의 겨루기는 물 긷기, 수놓기, 싸리나무 먼저 베기, 범의 눈썹 세 개 구하기이다. 여성의 노동력과 관계있는 것들이며 범의 눈썹 세 개는 신성성과 결합된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다. 또 다른 여성성에 있는 남편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여성성의 대결이 아니라 다른 초월적 존재여야 하거나 남장을 해 남편을 데려오는 것은 같은 여성성은 대결을 하지 않는 방식이어야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과 여성의 대결은 대체로 비극적이다. 콩쥐팥쥐의 계모와 콩쥐의 대결과 장화홍련의 계모와의 대결, 서수왕 딸애기와 자청비의 혼인 문제로 서수왕 딸애기가 자살하는 자청비 설화 등에서 여성과 여성의 대결은 비극적이다. 그래서 선비의 아내는 여성이 아니어야만 남편을 데려 오거나 후처가 죽지 않고 이야기가 끝날 수 있다. 죽은 콩쥐와 장화를 살려내고 자청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는 마고의 상징인 할머니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의 하나다.
토착신앙이 불교로 수용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온 것과 같은 흐름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저 멀리 초월의 세계에 도달하려 했고, 동물로 다시 인격 화하고 이제 이야기는 마을과 사람들에게로 돌아온다. 모든 설화를 담을 수 없어 해석에 필요한 설화들만 글에 담았다. 다음 편은 지역 설화다.